[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당시 34세인 하얼빈(哈爾濱)의 쑹안위(宋安宇)는 2002년 2월에 치치하얼(齊齊哈爾)의 한 파룬궁수련생의 집에서 포위돼 5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다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여전히 납치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게다가 2003년 4월에 14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다. 타이라이(泰來) 감옥에서 13년 동안 박해를 당했는데 마침내 2016년 4월에 억울한 옥살이가 만기돼 집으로 돌아왔다.
수년간의 박해는 쑹안위의 가족에게 극심한 상처를 조성했다. 특히 집안 노인에 대해 충격이 가장 컸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로 나날을 보냈다. 70여 세 노인은 1년 내내 그리움 때문에 거리에서 누구를 보아도 모두 자신의 아들 같았다. 아들이 그리워 잠을 자지 못하고 온밤 모두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마음속으로는 시시각각 안위를 걱정하며 감옥에서 살아나올 수 있을지 걱정했다.
쑹안위(1968년 출생)는 1992년에 헤이룽장성 화건회사(化建公司)에서 나와 1994년부터 치치하얼시에서 약을 판매했고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생의 무상함에 탄식했고 인생의 귀착점을 추구했다. 그리고 신화, 신선의 이야기를 즐겨봤으며, 어렴풋하게 부처님이 존재함을 믿고 줄곧 금생에 해탈하는 길을 찾으며 불도(佛道) 경전 및 서방 종교 중에서 힘들게 찾아다녔다. 1994년에 원하는 대로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 중국 대륙에서 맨 마지막에 개최하신 광저우(廣州) 제5기 학습반에 참가했다. 이로부터 온몸이 가볍고 걷는 것도 나는 듯 해 정법대도(正法大道)의 신기함을 느꼈으며, 큰 파룬이 광저우 상공에서 돌고 오색 상운이 동반한 정경을 직접 목격했다.
1. 매달려 불구가 된 손은 아직도 완전히 등까지 닿지 못해
99년 7.20에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후 쑹안위는 성 정부로 청원하러 갔다가 체육관에 저녁까지 갇혔다.
2000년 9월 8일, 쑹안위는 다른 사람에게 진상자료를 선사하다 치치하얼 민항로(民航路) 파출소에 의해 납치됐고 대법책, 파룬도형, 녹음기 두 개, 대량의 녹음테이프, 사부님 법상 등을 강탈당했다. 파출소 안에서 사악한 경찰에게 ‘상대괘(上大掛)’ 고문을 당했다. 발끝만 땅에 닿게 하고 두 손은 스팀 파이프 위에 매달아 왔다갔다하게 한 후 2시간 넘게 나무 몽둥이로 후려쳤는데 늑골 틈까지 잡아당겨져 갈라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땀에 흠뻑 젖어 사람 전체가 마비됐다. 당시 또 파룬궁수련생 몇 명도 박해를 당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중에는 왕웨이쥔(王衛軍)이 있었다.
중국공산당 고문 설명도: 등 뒤로 매달기(吊背銬)
그날 저녁 쑹안위는 치치하얼시 제1구치소로 보내졌다. 이틀 후 또 밤에 불려나가 심문을 당했다. 이 사람을 못살게 구는 곳에서는 어떻게 외쳐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 ‘상대괘’ 고문을 두 시간 넘게 당했는데 오래 된 상처가 완쾌되기도 전에 또 새로운 상처가 추가돼 구치소 안에서 밥그릇마저 들지 못하게 돼 다른 사람이 먹여줘야 했다. 손목 상처흔적은 1년이 넘어도 없어지지 않았다.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된 손은 여태껏 완전히 등까지 닿을 수 없게 됐다.
쑹안위는 치치하얼시 제1구치소에 2개월 동안 불법 감금당한 후, 또 하얼빈시 난강구(南崗區) 구치소로 옮겨져 1개월 동안 감금당했다.
2. 이미 부서진 무릎 뼈 위에 올라와 짓누르다
2002년 4월 19일, 쑹안위는 막 파룬궁수련생 왕진판(王金范, 치치하얼 철로1중학교 음악교사)의 집으로 갔는데 베이쥐자이(北局宅) 파출소에서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했다. 쑹안위는 핍박에 못 이겨 5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두 무릎 뼈가 완전히 부서지고 발가락, 발바닥뼈도 여러 곳이 부러졌으며, 두 손바닥은 피투성이가 되고 손 힘줄도 끊어진 곳이 있었다.
(당시 왕진판의 집 전화도 이미 끊겼고 앞뒤 건물마저 무장경찰과 형사경찰대대 경찰 및 관할구역 파출소 경찰에게 에워싸였다. 건물 구역에서는 몇 백 명의 사람이 에워싸고 구경했다. 왕진판은 잇따라 납치됐다. 형사경찰대대의 두 명의 악독한 경찰이 그녀를 구타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거의 마비될 뻔 했다. 두 개의 늑골, 유방 등 여러 곳에 어혈이 생겼는데, 그 후 또 전기고문을 당해 생명이 위급해져 공안병원으로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았다.)
중국공산당 불법 감옥의 고문 재연: 담배 쐬기 고문
쑹안위는 철도병원으로 보내져 엑스레이를 찍은 후 베이쥐자이 파출소로 들려가 학대를 당했다. 그들은 잔인하게 쑹안위의 두 손과 두 발을 네 사람이 눌렀고, 두 개의 콧구멍에 불을 붙인 담배를 꽂아 넣었다. 동시에 다른 한 사람은 구두로 이미 부서진 쑹안위의 무릎뼈 위에 올라가 왔다갔다하며 짓누르며 “내가 바로 백정이다. 내가 바로 살인범이다!”고 외쳤다. 쑹위안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중국공산당 고문 설명도: 전화기로 전기충격을 가하기
쑹안위는 세상과 격리된 톄펑구(鐵鋒區) 형사경찰 1중대로 들려가 계속 박해를 당했다. 악독한 경찰은 전기선을 엄지손가락에 묶어놓고 전화기를 돌려 전기충격을 가했는데, 전기 불꽃은 탁탁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또 쑹안위를 쇠의자 위에 놓고 두 발이 의자 위에 수평으로 놓이게 했다. 그리고 두 손을 쇠의자 뒷면 구멍으로 가로질러가서 수갑으로 조여 놓고 일주일 동안 밥 한 끼와 죽 한 끼만 먹였을 뿐이다.
그후 타이라이(泰來)감옥 부속병원[당시는 신성(新生)병원이라고 불렀음]으로 보내 수술을 받게 했는데 실질적으로 부서진 뼛조각을 골라냈던 것이다. 두 무릎을 모두 세로로 쪼갠 후, 동시에 또 악독한 경찰이 짓누르고 지나간 오른쪽 무릎을 8호선 철사로 고정한 다음 실로 꿰맸다. 그리고 분홍색 오래 된 화장지와 석고를 씌웠다. 1개월 후 치치하얼시 제1구치소로 보냈다. 구치소에서 수감을 거부하자 또 전화를 걸어 공안국장에게 물어보며 압력을 가했다.
구치소에서 쑹안위는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되어 하루가 1년 같았다. 몸을 뒤척이려 해도 할 수 없었고 대소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돌봐줘야 했다. 구치소의 밥과 반찬은 더구나 무슨 영양을 말할 나위가 못됐다. 불법 감금당한 기간, 철사가 무릎을 뚫고 나왔는데 구치소에서는 책임지기를 원치 않아 차량공장병원으로 끌고 갔는데 수술도 받게 해주지 않았다. 철사는 외부에 6개월 넘게 드러나 있어 몸 위에 입은 내복 바지마저 찔려 뚫어졌다. 2003년 4월 25일에 이르러서 타이라이 감옥으로 들어가 새롭게 수술을 받은 후에야 뽑아냈다.
3. 감옥에서 13년을 보내다
근 1년 동안 불법 감금당하고 쑹안위는 톄펑구 법원에 의해 14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다. 타이라이감옥 병범(病犯) 감구에서 대략 4년 동안 쭈그려 앉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어섰다가 몇 분이면 곧 주저앉았다.
2010년에 이르러 쑹안위의 다리가 일부 회복되자 그가 있던 제17감구 2분감구 부교도원 쉬리신(許立新), 지도원 쑨궈위(孫國譽)는 그에게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수갑을 채워 일을 책임진 죄수 장신(張鑫)을 지시해 강제로 그를 세워두고 ‘보증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족쇄를 차고 세워두는 고문을 당해 무릎 뼈가 부서졌던 그는 전혀 서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서지 못하면 그에게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반들반들한 대리석 위에 앉게 해 8명의 죄수가 주야로 번갈아가며 당직을 섰다. 쑨궈위 등은 배후에서 죄수를 지시해 쑹안위를 박해했다. 장신은 “내가 당신을 괴롭힌다고 날 원망하지 마시오. 모두 그들(악독한 경찰)이 시켜서 하는 것인데, 당신을 괴롭혀 죽이더라도 보증서를 써야 합니다.”고 말했다. 쉬리신은 “나는 업보를 입는 것이 두렵지 않다. 나에게 인과응보를 내리라고 해”라고 소란을 피웠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쉬리신의 부교도원은 체포됐고 쑨궈위가 시험을 잘 보아도 승진하지 못했다.
감옥에 있던 13년 동안 쑹안위는 줄곧 정신적으로 고도로 긴장된 상태에 처했는데, 언제 경찰이 와서 교란하고 그의 물품을 없앨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슈퍼로 가고 전화를 걸 수 있었으나 쑹안위는 제한을 받았다. 입감 후부터 전문 인원이 그를 감시하며 지켰다. 많을 때는 4명이나 됐는데 그들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쑹안위가 톄펑구 형사경찰대대에 의해 강탈당한 물품에는 핸드폰 2개, 레이저 프린터 3개, 컬러 잉크젯 프린터 한 개, 핸드폰 4개, 고속 프린터 복합기 한 대, 텔레비전 스폿 방송기 한 개, 복사용지 백여 박스, CD-RW 한 개, CD 몇 천 개, 토너 몇십 통이 있었다. 옷과 일상 용품, 물품도 아주 많았는데 그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현금 3만여 위안, 본인 몸에 있던 2천6백여 위안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14년 동안의 억울한 옥살이는 쑹안위의 심신에 대해 큰 손상을 입혔으며 그에게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게 해 경제 문제에 직면하게 했다. 지금 타이라이 감옥에서는 또 10명의 파룬궁수련생이 있는데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문장발표: 2016년 8월 2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8/21/3332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