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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동안 유랑생활을 한 텅스쥔, 다시 납치돼

[밍후이왕] 전 지린성 도문(圖們)시 파룬궁수련생 텅스쥔(滕世軍)은 2016년 5월 12일 오후에 지린시 룽탄구(龍潭區)의 한 주택 중에서 룽탄구 신안(新安)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됐다. 집안 물품은 모조리 빼앗겼고 2만 여 위안의 현금도 강탈당했다.

滕世军

텅스쥔(滕世軍)

경찰은 포대로 텅스쥔의 머리를 씌워 그를 구타했다. 그리고 또 그의 손을 뒷짐결박으로 쇠의자에 채워두고 더러운 양말을 입에 밀어넣었다. 불법 심문을 진행한 후, 그를 지린시 수란(舒蘭) 세뇌반(불법 감옥)으로 납치해 박해를 가했다. 열흘 후 또 텅스쥔을 지린시 구치소로 납치했는데, 그의 혈압이 245에 달했던 이유로 구치소에서는 수감을 거부해 집으로 돌아왔다.

中共酷刑示意图:背铐

중국공산당 고문 설명도: 뒷짐결박으로 채우기

텅스쥔은 장쩌민 집단이 파룬궁을 박해한 17년 동안 파룬궁에 대한 믿음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직장에 의해 불법 해고를 당했다. 여러 차례 불법 체포, 감금을 당했고 예전에 세 차례 세뇌반에 갇혔으며, 네 차례 불법 구류를 당했고 두 차례 노동교양 박해를 당했다. 그 후 핍박에 못 이겨 지린시로 가서 유랑했다.

아래 내용은 텅스쥔이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심신 변화와 법에 의거해 믿음을 견지한 이유로 10여 년 사이에 박해를 당한 사실 경과를 자술한 것이다.

나는 텅스쥔(남, 48세, 한족)이라고 부르며, 지린성 연변 도문시 사람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체질이 약하고 잔병이 많았다. 16세 때, 갑자기 이상한 병에 걸렸다. 어느 날 아침, 쭈그려 앉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두 무릎에 기운이 없어 다만 팔 힘으로 겨우 일어날 수 있었는데, 무릎을 굽히기만 하면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린시 철도병원의 진단을 거쳐 ‘길랭-바레 증후군’이란 진단이 내려졌는데 즉 급성다발성 신경염이었다. 이 병은 척수검사로 확진을 받아야 했으며 확진 후에도 특효약이 없어 다만 ‘위생소’계열약과 ‘프레드니손’ 등 약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복용한 후 후유증이 생겨 근육이 무력(근육이 위축되어 몸을 떨었음)하고 무거운 일을 하지 못해 나는 폐인으로 변할 것 같았다. 부친은 내 몸 때문에 걱정돼 고통스러웠다. 어찌할 방도가 없게 되어 나는 각종 기공을 찾아 내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차례로 몇 가지 기공을 연습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1996년 5월, 다른 사람을 통해 파룬궁은 질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다는 소개를 받았다. 나는 파룬궁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먼저 지린성 도문시 철도분국 원내에서 연공을 했는데, 그 후 파룬궁이 서로 서로 마음으로 전해져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게 되어 또 철도 광장으로 옮겨 연공을 했다. 연공한 후, 나는 파룬궁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에게 좋은 사람으로 되도록 요구해 도덕수준을 제고했고,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을 고려했으며 다른 사람을 대신해 생각했다. 몸은 하루 하루 좋아지고 몸에 기운이 났다. 1개월 후, 나는 무거운 일, 힘든 일까지 할 수 있었고 온몸에 병이 없이 가벼웠다.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나를 건강한 사람으로 변하게 했고 사회에 공헌하고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 나는 생명의 본원 깊은 곳에서 파룬따파가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더욱 기뻐하고 감동했다. 우리 전 가족은 마침 평화와 유쾌, 즐거움과 행복 속에 흠뻑 젖었다.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먹구름이 머리를 내리누르더니 사악한 박해가 시작됐다.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 이유로 공장에서 해고당해

1999년 7월 20일, 장쩌민(江澤民)은 질투심으로 수중의 권력을 이용해 전 국가 선전기구를 동원해 천지를 뒤엎을 듯이 파룬궁을 먹칠하고, 파룬따파 사부님에 대해 거짓말을 날조하고 비난하며 모함했다. 당시 나는 지린성 연변 정유공장에 출근했다. 파룬궁 진선인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려 했고 주변의 모든 동료를 선하게 대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업무에 임했으며, 기술 심사 중 성적이 우수했던 이유로(만점), 직장 책임자는 배수 작업실 순환팀 반장으로 나를 임명했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직장 책임자는 내가 파룬궁을 연마함을 알고 나를 찾아 나에게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길 권했다. 내가 수련을 포기하지 않자 직장에 의해 당적에서 제명당했다.(그 사악한 조직에서 나를 제명하지 않았다면, 나는 스스로 탈당하려 했을 것임)

몇 달 후, 내가 여전히 수련을 포기하지 않음을 보고 1999년 11월에 나를 공장의 직원 신분에서 해고했다. 이로 인해 경제력을 잃어 생활은 곤경에 빠졌다.

국가 정부에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을 설명하고 사람들에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알려주기 위해 나는 청원하러 베이징으로 가려고 결정했다. 1999년 말, 첫 번째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는데 진저우(錦州)시에서 청원을 가로막는 인원에게 가로막혀 돌아왔다. 나는 정유공장 공안과 인원에 의해 강제로 도문시 석현진(石峴鎭) 동림산장(東臨山莊) 세뇌반(산장의 한 요양원)으로 끌려가 강제 ‘전향’을 당했다. 매일 또 반드시 50위안의 급식비를 내야 했고 매일 체벌을 당했으며, 파룬궁을 모독하는 텔레비전을 보고 핍박에 못 이겨 감상문을 써야 했다. 수련을 포기하지 않기만 하면 세워두기 고문을 저녁 10시까지 당해야 했는데 매일 시간을 늘렸다. 내가 줄곧 포기하지 않자 또 다른 한 방안으로 옮겨갔다. 연변시 폭동방지대대의 한 대장과 대원들이 나를 뒷짐결박으로 채워 방안에 가두고 고무봉으로 허벅지를 구타했다. 모든 일체는 바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시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협력하지 않자 한 번은 나흘 동안 저녁에 세워두기 고문을 가했는데 새벽 2시에야 잠자는 것을 허락했다. 5시에 여전히 일어나 군대훈련을 받아야 했다. 보름 동안 불법 감금당하고 그제야 풀려나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간 후 가도(街道)에서는 늘 집으로 와서 소란을 피워 편안하게 생활할 수 없었다.

2000년 연말, 연변 정유공장 공안과 직원은 속임수를 써서 나를 석현 동림산장 세뇌반으로 보냈다. 책임자는 도문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서기 왕(王) 모씨, 부장 장(張) 모씨, 무장부의 눙즈가오(農志高) 등으로 이들은 나에게 믿음을 포기하도록 핍박했다. 나는 보름 동안 갇히고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 근근이 보름 동안 있었는데, 또 납치돼 30일 동안 형사구류 처분을 당했다. 섣달 그믐날을 구류소 안에서 보냈다.

2001년 11월 20일, 나는 거듭 베이징으로 가 파룬따파를 위해 공정한 말을 했다. 그 결과 납치됐는데 그 후 1년의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았다. 지린성 주타이(九台) 노동교양소 안에서 고문 학대를 당했다. 어느 한 번, 나는 강제로 한 작은 방안으로 끌려갔다. 방안에는 쇠침대가 하나 있었다. 형사범 류(劉) 모씨는 내 옷을 완전히 벗기고 왼손과 오른손을 침대 머리에 채웠으며, 두 발은 침대 아래 난간 위에 묶어놓았다. 악독한 경찰은 길이가 1미터나 되는 강압 전기봉을 들고 내 아래턱, 흉부, 유두, 겨드랑이에 전기충격을 가했다. 동시에 내 몸 위에 냉수를 끼얹고 창문을 열어놓아 추위에 떨게 했다. 정신과 육체적인 이중학대로 내 두 다리는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게 됐고 갈수록 수척해졌다. 노동교양소에서는 부득이 2003년 12월 21일에 나를 석방해 집으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했다. 몸은 매우 빨리 회복돼 직업을 찾아 생활을 유지했다. 이 기간, 도문시 ‘610’(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 조직), 가도, 파출소에서는 늘 우리 집으로 와 소란을 피워 우리 집의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했다.

2004년 10월 25일 오후, 나는 우유회사로 가서 우유를 나르려고 하다가 가도 치보주임이 향상가(向上街)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을 거느리고 날 강제 납치했다. 난 도문시 당교의 ‘강화(強化) 세뇌반’으로 끌려갔다. 도문시 ‘610’사무실의 양창청(楊昌成), 비원거(畢文革), 푸옌후(付彥虎) 등은 창춘(長春)에서 온 사오(邪悟)한 자를 이용해 나에게 수련을 포기하도록 핍박했다. 나는 단호히 믿음을 포기하지 않아 화룡(和龍)시의 ‘숭상(崇尚)’이라고 부르는 두메산골 안 세뇌반에 갇혔다. 악도는 조금도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나를 지켰다. 4명이 나를 에워싸고 정신적인 공격을 진행했다. 나는 그 후 벗어났고 이로부터 유랑생활을 했다.

또 납치돼 노동교양 처분을 받다

2005년 8월 16일, 나는 민정국으로 가서 집안일을 처리하다가 악도에게 납치돼, 국가보안대대 경찰에게 폭력적인 구타를 당했고 도문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박해를 당했다. 1개월 후, 나에게 3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내렸다. 나는 지린성 주타이시 인마허(飲馬河) 노동교양소로 납치됐다. 1대대에서 대대장 펑웨이(馮偉)는 두 명의 바오자(包夾: 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원)를 찾아다가 날마다 나를 지키게 했다. 창문을 열고 추위에 떨게 했고 하루 24시간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강제로 이층 침대의 아래층에서 좌판(坐板, 10센티미터 좌우 너비에 10센티미터 좌우 높이의 작은 걸상)에 앉도록 강요했고, 수갑 두 개로 손목을 침대 머리 양측 쇠파이프 위에 채웠다.

1대대에서 1개월 동안 엄격한 관리를 진행하고 또 교육대대로 옮겼다. 대장 마광펑(馬廣峰)은 일반 죄수를 지시해 나를 좌판에 앉히고 구타하고 욕하도록 했다. 그는 내 다리를 철판 위까지 잡아당겨서는 다리 위에 앉아 나를 박해했다.

酷刑演示:浇凉水

고문 재연: 냉수 끼얹기

2006년 12월, 또 나를 엄격한 관리실 안에 가뒀는데 나는 매달아 채우기 고문, 비닐주머니로 머리 씌우기 고문을 당해 숨이 막혔다. 3~4명 사람이 침대 판자로 나에게 폭력적인 구타를 진행했다. 화장실 안에서 내 옷을 완전히 벗기고 냉수관으로 물을 부었는데 대략 1시간을 넘게 부었다. 3년의 노동교양 박해 중에서 나는 육체적인 고문학대와 정신적인 손상을 입은 이중 박해를 당했다. 동시에 부모님 및 가족에게 정신적인 압력과 아픔을 가져다 준 것은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8년간 유랑생활을 하다가 지린시에서 납치되다

2016년 5월 12일 오후, 나는 지린시 룽탄구의 한 주택 내에서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리며 아래층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문을 열자 낯선 사람 두 명이 들어왔다. 내가 그들에게 뭐하는 사람인지 묻자 그들 중 한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단번에 나를 땅에 눌러 넘어뜨렸다. 내가 줄곧 그들에게 누군지 물었으나 그들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은 “네가 텅스쥔이야?”라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줄곧 반항하자 그들 두 사람은 나를 침대 위에 눌러 넘어뜨려 수갑을 채우고 내 안경을 때려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후 또 몇 사람이 들어와서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끊임없이 진상을 알렸으나 그들은 듣지 않고 내 양말을 하나씩 벗겨서 내 입안에 밀어 넣었다.

우리 집안에서 수색한 물건은 현금 2만여 위안, 핸드폰 8개, MP4 두 개, 작은 라디오 3개, 인터넷 셋탑 박스 9개, 스캐너 한 개, 시디롬 드라이브, 전자책, 6~7개의 낡은 기계, 210 엡손 프린터, 사진기 한 개, 자료, 종이 자르는 칼, 구멍 뚫는 기계, 탁상식 케이스, 노트북 컴퓨터 두 대, 대법 책 한 세트, 이동 전원장치 두 개, 오토바이 한 대, 일하는 공구 한 세트(렌치, 펜치, 관각렌즈, 전기 드릴 등)이다.

双手反背铐在椅子上

두 손을 거꾸로 의자 위에 채워두다

그들은 뒤져낸 모든 물건을 모두 방안 바닥에 쌓아놓았다. 그런 다음 나를 물건과 함께 사진 찍은 후 모든 물건들을 가져갔다. 그리고 또 “당신 집에는 이렇게 많은 물건이 있군”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것은 모두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곧 내 머리에 포대를 씌웠다. 겉옷도 입지 않고 단지 속옷 한 벌만 입고 한 쪽 양말만 신은 나를 그들은 들어서 아래층 차 안으로 들고 갔다. 밖에서는 줄곧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를 드는 과정 중, 나는 줄곧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다. 그들은 직접 나를 룽탄구 분국 심문실로 끌어다가 쇠의자에 채워두었다. 형사경찰대대의 어느 한 대대장은 나에게 “당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형사경찰대의 지독함을 들은 적이 있지?”라고 말했다. 나는 곧 그들에게 “당신은 이렇게 하지 마세요. 당신 가족에 대해 좋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네 명이 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에게 이름, 주소, 어디 사람인지 등을 물었다. 나는 줄곧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고 지금 형세를 말했다. 저우융캉(周永康), 쉬차이허우(徐才厚), 리둥성(李東生), 보시라이(薄熙來), 왕리쥔(王立軍) 등은 장쩌민(江澤民)을 바싹 뒤따르다 모두 붙잡혔고 또 징역 판결을 당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우리는 임무를 집행하는 거야. 이것은 우리 업무야”라고 말했다. 그들은 나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떠났다.

저녁이 되어 또 당직을 서는 두 사람이 와서 나에게 마찬가지 문제를 물었다.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그들에게 마찬가지로 진상을 알렸다. 그들에게 현재의 형세를 알려주었고, 또 ‘장자석(藏字石)’을 말했다. 그들은 당시 곧 인터넷에 접속해 보고는 ‘망(亡)’자가 똑똑하지 않게 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또 지금 직면한 생존 환경, 장쩌민이 파룬궁수련생의 장기를 생체로 적출한 것을 말했는데 그들은 모두 믿지 않았다. 나는 “장쩌민이 한 일을 당신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장쩌민과 한 무리이므로 장래 장쩌민이 심판을 당할 때 희생양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다 들은 후 “장쩌민이 생체로 장기를 적출하는 걸 당신들은 보았소? 증거를 꺼내놓으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말하지 않아도 필요 없어. 당신 집안의 이 물건들을 봐. 당신을 10년, 8년 판결하기에는 충분하지”라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사람으로 되려 했을 뿐입니다. 공안부 문서에서 선포한 14종류의 사교에는 파룬궁이 전혀 없습니다. 1999년 10월 26일의 신문에서 실었는데, 장쩌민은 프랑스 ‘르 피가로’의 취재를 받고 파룬궁을 ×교로 모독했습니다. 장쩌민이 말한 말은 법률이 아니므로 처벌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상을 사람에게 알려주었을 뿐 우리는 어떠한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튿날 5월 13일 점심, 그들은 나를 지린시 룽탄구 신안(新安) 파출소로 보내 또 쇠창살에 가두고 쇠의자 위에 앉혀 놓았다. 또 한 사람은 나에게 이름을 물었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를 승합차 위로 끌어갔다. 그들은 나에게 뒷짐결박으로 채웠다. 채울 때 소장은 단단히 조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차에 앉아 전화를 걸 때 수란(舒蘭) 세뇌반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세뇌반 책임자는 우타오(吳濤)라고 불렀다. 같이 간 난닝(南寧) 지역사회 남자 두 사람을 맞이한 사람이 나를 1층의 한 방안에 가뒀다.

5월 14일 아침 8~9시에 두 명의 유다(배신자)가 와서 “당신 물건은 그렇게 많은데 만약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몇 년을 판결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리둥성 그리고 저우융캉은 파룬궁을 박해했기에 인과응보를 받아 모두 붙잡혔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다시는 나쁜 일을 하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당신도 붙잡히지 않았어? 당신도 지금 자유를 잃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나는 “이것은 나에 대한 박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잠시 말하다가 떠났다.

5월 16일 아침, 판(潘)씨라는 남자가 왔는데 매일 세뇌를 시켰다. 오전 8~11시까지, 오후 1시~5시까지, 저녁 6시 30분~8시 30분까지 세뇌를 진행했다. 23일에 이르러 저녁 5시가 넘어 신안파출소에서 사람이 왔는데 구류증을 꺼내 나에게 서명하도록 했다. 내가 서명하지 않자 그들은 나를 차로 끌어올렸고 한 길에서 영상을 찍었다. 지린시 장난(江南) 465부대병원으로 끌어다가 혈압, X레이, 심전도 등 신체검사를 했다. 혈압을 잴 때 혈압이 245에 달해 의사는 잠시 후 다시 한 번 재겠다고 말했다. 모든 검사를 모두 끝내고 아래층으로 가서 혈압을 쟀으나 여전히 245에 달했다. 신안 파출소의 네 사람은 나를 직접 지린시 구치소로 끌어갔다. 구치소에 도착해 또 혈압을 쟀는데 혈압이 245에 달했다. 구치소 의사는 약 한 알을 나에게 주었다. 내가 약을 먹지 않겠다고 하자 파출소 사람은 강제로 입안에 약을 밀어넣었다. 내가 약을 뱉어내자 그들은 나를 의자 위에 눌러 잠깐 앉혀 놓았다. 그들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 나를 구치소 안에서 끌어내 차에 앉혔다. 그들은 또 나를 룽탄구 공안분국으로 끌어가서 또 쇠의자에 앉혔다. 한 국가보안대대 사람이 오더니 나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나는 말하지도 않고 곧 진상을 알렸다. 파출소 사람이 “가족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래야 우리가 그들과 연계하기 쉽지요. 가족에게 당신을 마중해 가게 하겠습니다.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나는 “필요 없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석방하시오. 열쇠를 주면 스스로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고 말했다. 대장은 “당신은 내일 신안파출소로 와서 도착 보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내 돈은 나에게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그것은 보증금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석방해 집으로 돌려보내도 당신은 떠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 나에게 그들에게 협력해 사진을 찍고, 지장을 누르며, 기록을 만들게 했으며, 또 내 거주지를 감시하려 했다. “당신이 집에서 연마하는 것을 우리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밖에 나가서 말하고 소책자를 배포하면 우리는 상관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말한 것은 장쩌민이 우리를 박해한 것이고, 장쩌민이 말한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진상을 세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사람으로 되려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서명을 다 하자 그들은 곧 차를 몰고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파룬궁은 나를 건강하게 했고 더욱 선량하고, 너그러우며, 도덕이 고상해지게 했다. 장쩌민이 질투에서 마음을 주채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 한 사람을 박해해 사람들에게 건강한 몸이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톈안먼 가짜 분신자살 사건을 조작해 파룬궁에게 덮어씌우고, 파룬궁수련생의 장기를 생체로 적출했는데 이 지구상에서 유례없는 죄악이다. 현재 중국 대륙에서 이미 20여만 명이 실명으로 장쩌민을 고소했다. 나는 2015년 7월 말에 장쩌민을 고소한 고소장을 중국 최고인민검찰원에 보내 파룬궁을 박해한 원흉 장쩌민을 법에 따라 처벌하며, 파룬따파와 사부님의 결백함을 회복시키고 박해를 끝낼 것을 요구했다.

문장발표: 2016년 7월 2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7/28/3319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