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하얼빈시(哈爾濱市) 파룬궁수련생 쿵판저(孔繁哲)는 2003년 2월 21일 거듭 불법 체포당했다. 24일 가족은 시신을 보라는 통지를 받았는데, 21일 사망했다고 알려주었다. 시신은 장기가 제거되고 머리 뒷면에는 구멍이 있었는데,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다. 쿵판저는 당시 겨우 33세였다.
쿵판저(미혼)는 상업기술학교를 졸업하고 하얼빈 추린(秋林)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으며, 하얼빈시 타이핑구(太平區) 수이니둥로(水泥東路)에서 거주했다. 1996년 봄, 26세인 쿵판저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진선인(真善忍)의 수련원칙을 마음속 깊이 새겼고 예전의 직장 추린회사에서는 포상도 받았다. 동료와 고객, 특히 구소련에서 관광 온 고객들은 그의 열성적인 러시아어 번역과 여러 방면에서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선량한 행위에 대해 매우 인정했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江澤民)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쿵판저는 세 차례나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첫 번째로 베이징을 향해 나섰을 때 쿵판저는 톈진에 도착해서 곧 경찰에게 납치됐고 수용소에 갇혀 악인에게 심각한 구타를 당했다. 그는 끝까지 확고하게 자신의 믿음을 견지했으며 고향 하얼빈으로 돌아와서도 쇠의자에 채워지는 등의 박해를 당했다. 쿵판저는 국민이 국가책임자 혹은 관련 부서를 찾아 상황을 반영함은 잘못이 없다며, 이것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2002년, 쿵판저는 진상을 알렸다는 이유로 하얼빈시 난강(南崗)공안 분국 경찰에게 납치됐다.
2003년 2월 21일(경찰이 통지한 시간), 하얼빈시 난강 공안 분국 국가보안대대의 수십 명 경찰은 난강구 화위안가(花園街)에 그가 세 들어 사는 층집을 포위했다. 그런 다음 문을 부수고 쿵판저를 4층으로 납치했다. 컴퓨터 몇 대, 프린터, 종이 및 기타 소모품, 약간의 진상자료, 옷과 일상용품, 이불 등을 한 차나 끌어갔다.
24일, 쿵판저 가족은 통지를 받고 난강구 공안 분국으로 갔다. 가족은 쿵판저가 이미 그들에게 체포당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가족이 면회를 요구하자, 그들은 쿵씨 모친 등 사람을 다오리구(道裏區)의 한 외지고 황량한 곳으로 데리고 갔는데, 개울가라고 부른다고 했다. 오래된 허름한 단층집 안에서 가족은 끌어내온 관 속에 쿵판저의 차디찬 전라의 시신이 있음을 보았다. 쿵씨 모친은 깜짝 놀라 거의 기절할 뻔해 갑자기 말과 사유 능력을 잃었다. 경찰은, 어떤 사람이 사건을 신고해서 21일 쿵판저를 체포했으며 경찰이 방안에 들어섰을 때 쿵 씨는 이미 건물에서 뛰어내렸다고 말했다.
쿵 씨 모친은 헤어진 지 막 며칠 된 아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들의 얼굴에는 매우 두꺼운 피로 얼룩진 얼룩점이 아주 많았다. 그 얼룩은 흘러나와 응고된 것이 아니라 뿌려진 것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튀어 올라온 얼룩을 벗겨냈는데, 얼룩이 매우 두꺼워 벗겨낼 수 없었고 견고하게 얼어붙었으며 얼굴엔 또 긁힌 흔적이 있음을 발견했다. 아래턱에서 치골 부위까지 커다랗게 베인 곳은 나일론 끈을 사용해 큰 바늘로 꿰맸는데, 어떤 곳은 꿰맨 곳에 응어리가 졌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어찌 돼 핏속에 푹 담가진 것처럼 온몸이 피투성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족이 쿵판저에게 옷을 입힐 때 쿵 씨의 팔과 두 다리는 모두 부러졌고 머리 뒤쪽에는 구멍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직 피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두 손은 모두 검붉었고 전신은 물로 씻은 흔적이 있었으나, 시신에는 그래도 온통 피가 있었다. 몸에는 여러 곳이 청자색의 흉터가 있었고 여러 곳이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쿵판저는 눈을 뜨고 있었는데 눈은 조금의 광택도 없이 희뿌옇게 있었다.
가족은 경찰에게 가족이 서명하지 않은, 검찰원이 참여한 사체검안보고서, 사체검안 화학분석표와 사망증명서를 요구했으나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쿵판저가 시체 안치실로 보내질 때,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 어디가 어디인지를 확실히 분간하지 못했고 온통 피로 덮여 있었다고 했다. 피부는 조금도 본래의 모습이 없었고 피는 계속 흘러 시신을 냉동하는 관에 넣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다만 수돗물로 장시간 씻어서야 표면의 피 흔적을 씻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며칠 후 시신은 강제로 화장당했다.
쿵판저의 모친은 다른 가족과 함께 고소하려 했으나 결국 제지당했다. 경찰에 의해 강탈당한 1천 2백(약 20만 원)여 위안의 돈과 쿵판저가 세를 낼 때 사용한 신분증은 끝까지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쿵판저의 연로하신 부모님은 억울하게 사망한 아들과 그 억울함을 밝혀낼 곳이 없었던 까닭에 정신적으로 오랫동안 극도의 답답한 상태에 처해 갈수록 허약해졌다. 특별히 부친은 심장에 일곱 개의 스탠트삽입술을 받았는데, 그들은 이미 어떠한 충격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이 박해로 사망한 억울함을 살아있는 동안에 씻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문장발표: 2016년 7월 20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7/20/3316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