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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 저우커우시 수련생 양즈,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허난보도) 허난성 저우커우(周口)시 단청현(鄲城縣) 우타이진(吳台鎭) 양라오자촌(楊老家村) 파룬궁수련생 양즈(楊志)는 5차례 납치돼 2년 불법 노동교양처분, 10년 형 판결을 당했다. 허난 신미(新密)감옥 등지에서 각종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해 돌아온 뒤 줄곧 몸이 허약했는데 결국 2016년 정월 4일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향년 61세였다.

다음은 양즈 본인이 2015년 5월 30일에 장쩌민(江澤民)에 대한 형사고소장을 쓴 일부 내용으로 그가 잔혹한 박해를 당한 과정을 밝혔다.

1999년 7월부터 무고한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이유 없는 박해 중, 고소인은 피해를 많이 입었다. 예전에 5차례 납치, 2년 노동교양처분, 11년 형 판결을 당한 적이 있는데, 구치소와 노동교양소에서 비인간적인 생활을 보내 심신에 극심한 손상과 상처를 입었다. 지금까지 여전히 손이 떨리고 배가 아프며 반응이 느리고 기억력이 감퇴되며 시력이 심각하게 떨어지고 늑골이 구타로 부러진 후유증 등이 있다. 고소인 가족과 친척도 연좌를 당했다. 큰 아들이 학교에 입학해도 정치 심사를 해주지 않았고 또 근 1년 동안 구치소로 납치됐으며, 막내아들은 겨우 13세인데 핍박에 못 이겨 이곳저곳에 숨었고 그도 1년 동안 구치소로 납치돼 감금됐다.

어느 한 번은 우타이진 파출소 소장 돤잉산(段應山)이 7~8명 악당을 거느리고 고소인을 납치할 때, 15세인 둘째 아들이 충격을 당해 목 놓아 울었다. 그중 한 악당은 그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는데 당시 촌 지부서기도 현장에 있었다. 파출소장은 사람을 거느리고 늘 한밤중이면 담장을 뛰어넘어 우리 집을 샅샅이 뒤지고 철저하게 조사하는 등 불법적인 가택 수색을 진행해 서적 등 물건을 강탈했다. 아내는 충격을 당해 거의 정신이 붕괴될 뻔 했다. 모든 친척은 연좌제를 당할까 두려워 왕래를 끊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모두 여러 정도로 벌금을 부과당하고 불법적인 소란을 당했다. 아들과 딸은 중학교 공부도 다 끝내지 못한 채 핍박에 못 이겨 중도에서 학업을 그만뒀다. 이후 아들과 딸들의 혼인도 극심한 방해를 받아 30세 쯤 되어도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연애하던 상대는 아버지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헤어졌다. 고소인의 멀쩡하던 가정이 박해를 당해 집 같지가 않았고 생활은 위기에 빠졌다. 고소인은 15년 동안이나 가족과 단란히 모여 앉을 수 없었다.

고소인(아래에 나라고 부름)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에 성질이 무척 급해 늘 아내와 다퉜으며 세금, 빚을 질질 끌며 미루었다. 1996년에 기쁘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얻었는데 대법의 법리는 나를 마음에서 따르게 했다. 이로부터 나는 진선인(眞善忍) 원칙에 따라 일을 하고 좋은 사람으로 됐으며 예전의 견관절주위염, 부비강염은 연공을 거쳐 얼마 되지 않아 모두 나았고 무척 급하던 성질도 철저히 고쳐버렸다. 집안일, 밭일, 불을 지피고 밥을 지으며 빨래도 아내와 앞 다투어 했다. 가정은 화목하게 됐고 이웃과도 화목했으며 세금, 빚도 모두 첫 번째로 냈다.

특히 1997년에 장마가 지자 햇밀을 미처 말리지 못해 싹이 돋게 되어 나는 묵은 곡식을 보냈다. 그런데 촌 지부서기마저 “이렇게 좋은 밀을보낸 집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1998년 밀이 한창 자랄 때 큰바람과 큰비를 만나 전부 쭉정이로 되어 나는 밀 종자를 보냈다. 한 촌 간부마저 “당신은 전 향에서 이렇게 좋은 밀을 보낸 유일한 한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촌 지부서기는 공사 서기에게 파룬궁 수련한 후 나의 변화에 대해 보고하고 다음 가을에 관리비 1만 위안을 더 거둬야 하는데 가장이 파룬궁을 수련하는 집은 관리비를 면제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언약을 미처 실행하지도 못했는데 1999년 9월 20일에 장쩌민(江澤民)이 수중의 권력을 이용해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잔혹한 박해를 시작했다.

1999년 7월에 시작된 이번 파룬궁 박해는 완전히 이유 없이 거짓말을 날조하고 먹칠하는 기초 위에 세워졌다. 대략 1999년 12월, 나는 정부에 대한 믿음을 품고 베이징 민원사무실로자문하러 갔다. 차에서 내린 뒤 한 행인과 마주쳐 물었는데 역시 민원사무실로 간다고 했다. 그러나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민원사무실은 이미 공안부에서 전부 인수해 관할하므로 당신이 가도 소용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여관을 찾아 머물려 했다. 등록할 때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므로 당신에게 번거로움을 가져다주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나를 신고했다.

이렇게 나는 첸먼(前門) 파출소로 납치돼 쇠의자 다리 위에 채워졌다. 한 경찰이 나에게 무차별폭력을 가하고 뺨을 때렸는데 대략 밤중 1시까지 시달리게 했다. 나는 또 셴우구(宣武區) 구치소로 보내져 일주일 동안 불법 감금됐다. 하지만 단청현(鄲城縣) 공안국에서는 나를 압송해 돌아와 단청현 구치소에 감금했는데 근 1년이 지난 뒤에야 석방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매일 우타이진 파출소, 촌지부서기 수싼(書三)에게 보고했다.

나는 사회에 대해, 타인에 대해 모두 어떠한 상처도 없고 단지 좋은 사람으로 되려 했는데 이러한 박해를 받자 어떻게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답안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나는 정부를 믿는 심태를 품고 연말에 또 한 차례 베이징으로 갔다. 막 톈안먼 광장에 들어서자 곧 한 무리 사복 경찰이 강제로 납치해 차 안에 밀어 넣었다. 입은 구타로 피가 흘렀고 늑골을 구타로 부러졌다. 그런 다음 나를 광장 치안실에 가뒀는데 안에는 파룬궁수련생으로 꽉 찼다. 우리는 잇달아 차 한 대안으로 밀려들어갔고 나는 다싱현(大興縣) 반비뎬(半壁店) 형사경찰대로 납치됐다.

그곳에서 나는 옷을 기웠다. 당시 베이징 온도는 영하 17~18도였는데 나는 단지 보온 속옷 상의만 입고 맨 발로 정원 안 한 나무 위에 채워져 눈 더미 위에 서서 식사나 음료수, 대소변마저도 허락받지 못했다. 꼬박 5박 5일 동안 채워졌는데 쇠고랑을 풀었을 때 나는 이미 지각을 잃었다. 대략 이른 아침 1시 쯤, 그들은 나를 야외로 끌고 가서 온통 끝없이 하얀 눈밭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게 했다. 그중 한 경찰은 “구덩이를 파서 당신을 생매장해 버려도 누구도 알지 못할 거야”라고 말했다. 맨 마지막에 나를 다싱현 구치소로 끌고 가서 꼬박 6일 동안 불법 감금했다.

나는 또 단청현 공안국에 의해 현 구치소에 갇혔다(압송해 돌아오는 길에서 또 향 책임자에게 욕설과 구타를 당했는데 말로는 자신들이 나 때문에 설을 잘 쇠지 못한다고 말했음). 단청현 구치소에서 나는 18일 동안 단식으로 항의했다. 단청현 공안국 정보대대 교도원 탄후이링(譚慧玲)은 내가 눈도 움직이지 못하고 숨도 내쉬지 못함을 보고는 우타이(吳台) 파출소 소장 돤잉산(段應山)과 상의해 내가 이미 위독해졌고 여러 질병이 있으므로 가족에게 데려가도록 통지를 내렸다. 대략 밤 12시 경이 되어 가족은 나를 집으로 데려왔다. 아내는 나에게 체중을 달았는데(이불과 함께 달았음) 25kg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타이 파출소장 돤잉산은 7~8명의 악당을 거느리고 주야를 가리지 않고 우리 집으로 와서 소란을 피웠는데 5일에 6차례나 왔다갔다. 전 가족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매우 심했고 늘 고도의 긴장과 공포 속에서 온종일 안절부절못했다. 막 설을 쇠고 몸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은 또 나를 단청현 구치소로 납치해 쉬창(許昌) 제3구치소로 보내 2년 노동교양처분을 내렸다.

노동교양처분이 끝난 뒤 나는 집에 있지 못하고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 12월 24일, 나는 또 루이(鹿邑) 공안국 경찰에게 루이 구치소로 납치됐다. 그들은 내 새 자전거와 기타 물품을 강탈하고도 어떠한 영수증도 주지 않았다. 루이구치소에서 1년 6개월 동안 감금됐다. 2005년 6월, 나는 루이현 법원에 의해 11년 불법 징역 판결을 당했다.

중국에는 하루가 일 년 같다는 한 마디 말이 있다. 내가 구치소, 노동교양소, 감옥에서 직접 경험한 체험은 ‘하루가 일 년 같다’를 사용함이 딱 맞다. 감옥에 들어간 첫 날, 나는 이른바 개인 물품을 강탈당했고 곰팡이가 핀 몸에 맞지도 않는 더러운 노동복으로 갈아입게 됐다. 그런 다음 매일 24시간 동안 세워두기 고문, 앉히기 고문, 쭈그려 앉히기 고문, 먹고 마실 수 없게 하는 학대를 시작했다. 당시 그들은 나를 학대했는데 두 발, 두 다리마저 없어지는 것 같아 기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잔혹한 시달림 하에 나는 마음을 어기고 4서(수련 포기각서 따위)를 썼다. 잇달아 박해 상황은 조금 호전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3~5명의 바오자(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자)는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사람과도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고 세수하고 그릇을 씻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화장실로 가는 것까지 따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 밖에 또 38조목의 금지령이 있었다. 나는 매일 공포적인 분위기 중에 처해 비인간적인 생활을 보냈다.

감옥 생활이 떠오르기만 하면 나는 멍해지고 온몸이 떨렸다. 그곳 교도원 및 핵심(이른바 교도원의 졸개로 모두 돈으로 사 온 사람들)은 모두 흉악하고 잔인하며 인성이 없었다. 한 감구역장은 3~4명이 죽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말했다. 어떤 교도관은 성(省) 안의 ‘우수 모범’이었는데, 그는 200여 명이 있는 회의에서 “나는 먼저 당신의 첫 층 껍질을 한 층 벗긴 다음 방으로 보내 당신의 두 번째 껍질을 벗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어느 한 생산대대장은 회의에서 “당신을 괴롭혀 죽여도 당신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타해 죽이고 구타로 불구로 된 사건은 늘 발생했다. 매일 과부하 노동을 했고 개돼지도 먹지 못할 밥과 반찬을 먹었다.

고소인은 단지 파룬궁을 수련하고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 되려 노력한 것 때문에 이러한 비참하기 그지없는 학대를 당했다.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한 것은 인류의 정의와 양심에 대한 파괴다.

거처에서 파룬궁 자료를 수색해 낸 것 때문에 양즈는 2005년에 루이 법원에 의해 11년 무거운 판결을 당해 허난 신미 감옥 등지에서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줄곧 몸이 허약했다. 2016년 1월 4일에 단청 중의원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낸지 10분 만에 억울하게 사망했다.

문장발표: 2016년 1월 20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0/3224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