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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부터 나는 공포와 차별 대우에서 자랐다’

-산둥 여대생 장후이제가 원흉 장쩌민 고소

[밍후이왕] 산둥성 서우광(壽光)시 성청가도(聖城街道) 허우푸리촌(後朴里村)의 장후이제(張慧傑)는 올해 21세이고 대학생이다. 2015년 8월 29일 최고검찰원에 ‘형사고소장’을 발송해 파룬궁 박해를 발동한 원흉 장쩌민을 고소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박해를 당해 불구자가 됐고 어머니는 두 차례 박해당해 반신불수가 됐다. 그녀는 7살부터 공포스럽고 고달픈 생활을 보냈으며 차별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

아래는 장후이제가 ‘형사고소장’에 서술한 박해받은 사실이다.

아버지 성함은 장커제(張克亮)이고 어머니는 왕중윈(王中雲)이다. 부모님은 1996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어려서 나는 줄곧 ‘진선인(眞善忍)’의 법광에 젖어 자랐다. 2살 때부터 나는 주사를 맞은 적이 없고 약도 먹지 않았는데 줄곧 건강했다. 부모님은 자주 ‘진선인’ 법리로 나를 가르쳐주셔서 스스로 엄격히 자신을 요구했다. 일을 해도 먼저 다른 사람을 고려했다. 아파트 복도에 몇 가구 문 앞에 쓰레기가 있으면 부모님은내려갈 때 함께 가져가 쓰레기통에 넣으라고 가르치셨다. 학교에서 나는 선생님이 인정하는 좋은 학생이고 친척과 이웃은 모두 내가 좋은 아이라고 했다.

1999년 7월 20일 이후 전 국가주석 장쩌민은 파룬궁 박해를 발동했고 우리 집도 화를 면치 못했다.

최초의이별-세뇌반에 감금된 부모님

2002년 9월 3일 저녁,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대법진상 표어를 붙이실 때 갑자기 길옆에서 몇 명 경찰이 뛰쳐나와 우리를 파출소에 붙잡아 갔다. 경찰은 부모님을 불법 심문을 했고 나와 한 방에 가두었다. 경찰 세 명이 우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경찰이 침대로 문을 막고 잤다. 다음 날 경찰 몇 명은 나와 어머니를 납치해 고향에 가서 재산을 몰수했다. 나는 할머니 집에 남게 됐고 경찰은 어머니를 강제로 데려갔다. 당시 ‘610’은 부모님을 서우광시 세뇌반으로 납치해 박해했다.

그해 나는 7살이었고 이렇게 부모님과 헤어졌다. 나는 부모님이 왜 붙잡혀 갔는지 똑똑히 모른다. 하지만 모든 친척은 부모님에게 화살을 겨눴다. 그들은내 앞에서 부모님을 욕하고 모욕하며 비웃었다. 그때 모든 친척은 우리와 관계를 끊으려 했다. 부모님이 몇 차례 불법 감금됐던 나날에 누구도 나를 떠맡아 주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80세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이후에 큰어머니가 나를 받아들이셨다. 하지만 고모가 질책하자 큰어머니는 각 방면 압력에 못 견뎌 나를 쫓아냈다. 따뜻한 집, 즐거운 어린 시절은 존재하지 않았고 매일 친척들의비난과 모욕을 들어야 했다. 나는 부모님을 그리워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부유한 생활을 부러워하지 않고 단지 부모님과 편안하게 살기만을 바랐다. 이런 작은 소원도 박해로 실현될 수 없었다.

부모님은 세뇌반에서 나오신 후 아버지는 직장에서 해고됐고어머니도 무급여 휴직됐다. 할머니 집안은 이미 어머니와 관계를 끊었다.

밤에 문을 세게 두드리다-아버지가 박해당해 불구가 되시다

이후 부모님이 석방돼 악몽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시작이었다. 2001년 11월 어머니는 직장에서 붙잡혔고 며칠 후 밤에 한 무리 경찰이 우리 집 문을 ‘쾅쾅’ 두드렸다. 나는 갑자기 발로 문을 차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그날 밤 마침 전기가 나가 경찰은 밖에서 끊임없이 욕하고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경찰에 붙잡히는 것이 두려워 2층에서 뛰어내려 도망치셨다. 이후에 그들은 문을 부수고 들어와 아버지가 도망간 것을 보고 욕을 하며 뒤쫓아 갔다. 당시 나는 너무 놀라서 울지도 못했다. 이 광경은 내 일생동안 잊지 못할 악몽이다. 지금까지 여전히 이런 악몽에 놀라 깨어나곤 한다.

아버지는 결국 붙잡혀 서우광시 원자(文家) 파출소 경찰에게 구타당해 허리가 부러지셨다.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셨고 어머니는 석방돼 병원에 아버지를 보러 가셨다. 고모는 어머니를 비웃으며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게 하고 협박해 아버지와 이혼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두 분은 서로 존경하고 함께 대법을 확고히 수련하셨으며 전혀 친척들의 태도에 영향 받지 않았다. 이후에 아버지는 법공부와 연공을 해 신체가 많이 회복되셨지만 척추는 불구가 돼 평생 고통으로 남았다.

할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다-부모님 따라 떠돌이 생활

우리 집안이 이렇게 박해받은 후에도 경찰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들은 자주 우리 집에 와서 소란을 피웠다. 부모님은 할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셨다. 한동안 나는 큰어머니 집에서 살았다. 경찰은 부모님을 체포하려고 매일 집에서 학교, 학교에서 집까지 나를 미행했다. 내가 친구 집에 가서 숙제를 해도 경찰은 나를 미행했다. 밤에 큰 눈이 내려도 차량번호가 없는 차가 할머니와 큰어머니 집을 맴돈다. 경찰들이 만든 공포, 게다가 매일 부모님을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나는 가족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집에서 울지 않았고 몰래 숨어서 울었다. 3학년 2학기에 경찰의 끊임없는 소란과 각 방면의 압력으로 나도 학교를 그만 두고 부모님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다.

떠돌이 생활은 아주 고생스럽다. 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있어서 나는 만족했다.

슬픈 새해-부모님 재차 납치돼

4학년 개학 때 박해도 당하고 직장에서 제명된 대법제자 아주머니께서 나를 받아들이셨다. 그녀는 나에게 전학을 시켰고 계속 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녀는 나에게 잘 대해주고 우리 온 가족은 모두 그 아주머니에게 감사했다.

학기말 시험을 보고 겨울방학 후 집에 돌아가 설을 쉴 때 나와 부모님이 할머니 집에 들어서서 할머니에게 사드린 연화(年畫)를 붙이기도 전에 경찰차가 온 것을 들었다. 이어서 마당에 한 무리 경찰이 들어왔다. 부모님은 숨으셨고 나는 침착하게 그들을 대면했다. 그들은 부모님이 어디에 갔냐고 물었다. 나는 그들과 대응하며 알려주지 않았다. 키 작은 경찰이 나를 때려 휘청했으며 넘어질 뻔했다.

경찰은 또 이웃에 가서 수사하며 온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80세 할머니는 놀라 벌벌 떨고 있었다.결국 그들은 부모님을 붙잡았다. 그들은 부모님에게 수갑을 채우고 강제로 경찰차에 밀어 넣었다. 내가 부르는 울음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작은 눈이 내렸다.

그날 사촌 오빠는 나를 외가에 데려다 줬다. 길에서 차량 번호가 없는 검은 차가 우리를 미행했다. 오빠는 차를 이리저리 몰면서 그들을 떨어뜨렸다. 외할머니는 부모님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괴로워하셨다. 외할아버지가 사망한 지 1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날 밤에 나와 외할머니는 밤늦게까지 울었다.

또 며칠이 지나 섣달 28일은 내 생일이었다. 가족마다 새해 분위기에 젖어 있었지만 나와 외할머니는 그리움과 고통에서 평생 잊지 못할 하루를 지냈다.

그해 새해는 슬픈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모님은 구치소에서 지내셨고 나와 외할머니는 근심하고 두려움 마음도 있었다. 부모님이 이번에 또 어떤 박해를 받을 지 걱정했다.

그리운 부모님-박해로 불구가 되시다

외숙모는 내가 외삼촌과 오빠의 앞날에 영향을 미칠까봐 외할머니 집에서 감히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나는 또 할머니 집에 가서 학교를 다녔다.

나는 매일 거리에 서서 부모님이 일찍 나타나기를 바랐다. 매일 마을 입구에 가서 바라보고 때로 슬프면 마을 밭에 가서 몰래 울었다.

하지만 생각밖에 내가 어머니를 다시 만났을 때 어머니는 이미 반신불수가 되셨다. 이미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어떤 박해를 당했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왜 이렇게 잔혹한가? 나와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돌봤다. 부모님이 모두 직장을 잃어 생활이 아주 어려웠다. 나는 매번 마트에 가서 세일하는 채소를 샀다. 내가 10살이라 마트 아주머니도 나를 알고 있었다. 나는 매일 10리길을 오가며 학교에 다녔다.

한동안 지난 후 아버지가 석방되셨다. 전에 부러졌던 허리가 구타당해 또 부러지셨고 스스로 생활이 불가능하셨다. 이후에 연공을 통해 겨우 많이 회복되셨지만 장애가 남으셨다.

어머니도 법공부를 하고 연공해 신체가 회복되셨다. 나는 대법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그 후 나는 마침내 부모님과 2,3년을 함께 생활했다. 이 사이에 부모님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많은 힘든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무더운 여름에 풀을 뽑고 밭을 가셨으며 아버지는 경비도 하시고 기계공도 하셨다. 본래 아버지는 사무실 직원인데 박해를 당해 이렇게 많은 시련을 겪으셔야 했다.

두려움에 떨다-또 납치된 부모님

2008년 5월 28일, 내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큰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셔서 부모님이 재차 납치됐다고 알려주셨다. 이후에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출근길에 차량번호가 없는 검은 차가 뒤에서 따라와 한쪽 모퉁이로 몰아넣고 경찰 몇 명이 어머니를 차에 밀어넣었다고 했다. 그들은 또 집 열쇠를 가져가 아버지를 붙잡으러 갔다. 아버지는 문을 안에서 잠그고 경찰 궈훙탕(郭洪堂)은 소방차를 이동시켜 승강기로 5층 창문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납치했다. 우리 집 온 재산은 약탈당했다. 그들은 부모님을 박해하려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경찰이우리집 열쇠를 열쇠구멍에 넣다 부러져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큰아버지 집에 살게 됐다. 옷이 없어 둘째 언니가 입지 않는 옷을 입고 학비를 내지 못해 먼 길을 가서 둘째아버지 가게에서 돈을 빌려 냈다. 매일 저녁 나는 더욱 부모님이 그리웠다. 나는 울며 종이학을 접으며 부모님이 하루 일찍 오기를 바랐고 온 가족이 만났으면 했다. 그해 나는 중학교 1학년에 다녔다.

구치소에서 어머니는 박해로 다리가 변형돼 스스로 생활할 수 없으셨고 매일 누워계셔야 했다. 어머니는 반신불수 증세로 노동교양을 당하지는 않으셨다. 아버지는 허리 장애로 노동교양소가 거절해 석방되셨다. 아버지는 장기간 구치소에서 강제로 십 몇 시간 동안 마늘이 잠겨있는 독물에서 마늘을 까는 노역을 하셨기에 발바닥이 전부 새까맣게 됐고 껍질이 몇 층 벗겨졌으며 발톱은 모두 떨어졌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경찰은 죄수를 시켜 매일 신발바닥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때리는 등등 박해를 가했다.

2008년 7월 27일 저녁 9시경, 아버지는 서우광시 성청파출소 경찰들에 의해 서우완 탄약 창고 세뇌반에 감금돼 2개월간 박해를 당하셨다. 나와 어머니는 집에서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2009년 3월 3일 밤, 아버지 직장 보안과 및 파출소 몇 명 사람이 우리 집 문을 세게 두드렸다. 노기등등하며 ‘쾅쾅’ 끊임없이 문을 세게 두드렸다. 아버지는 더는 마수에 잡혀들어 가기 싫어 5층 하수관을 따라 1층까지 내려가셨다. 뛰어내릴 때 왼쪽 발이 심하게 다쳐 불구가 되셨다. 어머니와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줄곧 문을 세게 두드렸고 줄곧 욕을 했으며 떠나지 않았다. 나는 다음 날에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2015년 1월 22일 오후 6시쯤 아버지가 아파트 입구에서 내리자 서우광시 성청파출소 류루이둥(劉瑞東) 등 6,7명 경찰에게 납치되셨다. 이어서 그들은 불법적으로 재산을 몰수하고 현금 9600위안을 빼앗아 갔다. 우편 수집 책자 24세트, 노트북 3대, PDA 한 대 , 프린터 한 대, MP5 두 개, MP3 두 개, 플레이어 5개, 외장 하드디스크, 경태람(景泰藍) 벽화 한 폭, 기념패, 사부님 사진 9장, 모든 대법서적, 핸드폰 11개 등 개인 물품을 빼앗아 갔다. 집은 어수선하게 됐고 오토바이도 가져갔다. 그들이 불법적으로 빼앗아 간 물품은 지금껏 압류전표를 남기지 않았다. 여러 번 가서 반납을 요구해도 거절당했다.

다음 날, 나는 겨울 방학 집에 가지도 못했는데 아버지가 붙잡힌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어머니를 붙잡는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나와 어머니는 집에 가지 못하고 줄곧 밖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구치소에 감금돼 23일 박해를 당하셨다. 이번에 아버지는 가족의 적극적인 구출과 변호사의 구원 하에 인적보증으로 풀려나셨다. 이후에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성청파출소에 붙잡힌 후 경찰 궈훙탕은 연속 6,7차례 아버지의 머리를 주먹으로 호되게 때렸다고 했다.

지난날 돌이켜 보기 힘들어-공포와 차별 대우에서 자라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담임선생님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선생님은 듣지 않고 오히려 내 친한 친구 어머니에게 알려줘 친구는 나에게 “우리 어머니가 너하고 놀지 말래. 너희 어머니가 파룬궁을 수련해서”라고 말했다. 나는 당시 듣고 아주 고통스러웠다.

긴 세월 동안 나는 집안에서 오는 모욕과 몰이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강제로 이혼하게 하는 고통 등을 겪어야 했다.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줄곧 태도가 좋지 않았고 나에게도 좋지 않았으며 부모님이 붙잡혔을 때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간식을 얻어먹지 못했다. 할머니는 부모님이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원망하기에 나에게 물건을 주는 것을 아까워 하셨다. 때로 나와 사촌 언니를 데리고 야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 집에 돌아올 때도 할머니는 내 손에서 물건을 빼앗아 사촌 언니에게 주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친척을 원망하지 않고 늘 ‘진선인’의 표준에 따라 대하고 그들을 감화시켰다. 할머니가 병에 걸리면 어머니는 원망도 없이 할머니를 돌봐주고 빨래도 하고 밥도 지어주셨다. 할머니는 자녀가 5명이나 있었지만 줄곧 우리 집에서 살고 계신다. 비록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태도가 좋지 않지만 어머니는 여태 할머니를 싫어한 적이 없고 최선을 다해돌봐드렸다. 할머니는 마침내 어머니만이 자신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마지막에 모든 친척은 진상을 알게 됐고 태도를 개변했으며 부모님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경찰이 거듭 부모님을 납치해 나는 심신에 극히 큰 상처를 입었다. 지금도 부모님이 붙잡히는 꿈을 꾸며 울면서 깨어난다. 걸을 때 늘 뒤돌아보며 누가 미행하는지 의심한다. 나는 본래 활달한 성격인데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이번 박해로 초등학교에서 3차례 학교를 그만두게 됐고 자주 다른 학생들의 이상한 눈총을 받아야 했다.

언젠가 우리를 박해한 원흉을 사법 처리할 것을 희망한다. 하지만 어떤 보상으로도 나의 즐거운 어린 시절을 바꿀 수 있는가? 아버지의 곧은 허리와 바꿀 수 있는가? 어떤 보상이 부모님이 받은 고통을 상쇄시킬 수 있는가?

문장발표: 2015년 12월 2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2/21/32075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