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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명 파룬궁수련생이 선양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2)

사례 1

쑨훙옌(孫宏豔), 여, 나이 미상. 랴오닝성 선양시 랴오중(遼中)현 대법제자. 2001년 3월말 박해 사망했다.

孙宏艳

쑨훙옌

2000년 7월말 쑨훙옌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경찰에 납치돼 불법으로 선양룽산(龍山 ) 교양원에 감금됐고, 선양룽산 교양원에서 단식 항의하다가 욕설과 구타를 당했다. 신발 바닥으로 마구 구타했다, 음식물 강제주입으로 피를 토했고, 2000년 11월 독방에 감금 후 강제 세뇌했다.

2001년 2월 중 선양다베이(大北) 감옥병원 독방에 감금 후 구타당했고, 장(張), 웨이(魏) 등 2명의 과장이 고문 협박을 가하며 파룬궁(法輪功)을 비방하는 문서에 서명 날인하라고 강요했으나 쑨훙예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들은 강제로 약명 미상의 독극물을 강제로 주입했다. 가족이 그동안 몇 차례 면회했는데 이미 쑨훙예의 몸은 고문 박해로 훼손된 상태였다. 앉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고, 몸은 마비상태였는데, 면회 때마다 독방 지하실에서 끌려 나왔다.

2001년 3월 중순, 가족이 쑹후옌을 집에 데려올 때 이미 숨이 넘어가는 중이었는데, 온몸이 썩어갔다. 가족이 응급 처치를 시키고 세심하게 보살폈지만, 쑨훙옌은 10여 일 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사망하기 전 극히 힘겨워하며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1. 자신이 고문 박해로 죽었음을 밍후이왕(明慧網)에 보도. 2. 엄정성명 발표(수련생이 대필).

엄정성명:

다이베이 감옥에서 나를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방에 감금했을 때, 내가 잠든 사이 대법을 비방하는 문서에 내 지장을 찍었다. 나는 괴롭고 힘들어서 일어나지 못했는데, 죽어도 그것을 승인하지 않음을 밝히는 바이다.

랴오닝 선양시 랴오중현 대법제자: 쑨훙옌2001년 3월 20일

사례 2

류리윈, 여, 44세, 랴오닝(遼寧)성 후루다오(葫蘆島)시 양자장쯔(楊家杖子) 경제개발구 지역에 거주, 2002년 7월 23일 랴오닝성 여자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刘丽云

류리윈

2001년 12월, 류리윈은 텐진에서 납치됐다. 2001년 12월 6일 불법으로 4년 형을 선고 받았다.

랴오닝성 여자감옥 7대대에 감금됐는데, 손발이 족쇄에 채워져 ‘샤오하오(小號-사람이 움츠리고 앉을만한 작은 감방)’에 단독 감금되어 한 끼에 작은 옥수수 범벅 1개로 연명했으며,때로는 그것조차 주지 않았고, 물조차 주지 않아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고. 수시로 고문 학대를 가했는데, 전기봉 등 고문 기구로 혹독한 고문을 학대를 가해 코와 입에서 피를 흘렸다. 사악한 교도관은 죄수를 시켜 그녀를 벽 모퉁이 시멘트 바닥에 앉힌 후 두 손을 뒤로 묶어매달아 두 다리는 벌려 대자로 고정시키는 고문을 가했으며, 눈을 감거나 머리를 숙이면 사정없이 구타했다. 류리윈은 온갖 혹독한 고문 악행을 당하다가 감금된 지 4일 만에 사망했다.

감옥 측은 류리윈의 부친을 속여 서명하게 하여 어두운 골방에서 시체의 머리만 보여줬지만, 가족은 머리 부분이 심하게 부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 시체를 강제로 화장시켜 사인을 감추려고 했다.

사례 3

린즈핑(藺志平), 남, 60세, 랴오닝성 젠핑(建平)현 주루커샹(珠科鄉) 샤잉쯔(下營子)촌 파룬궁수련생. 11월 25일 악독한 교도관의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蔺志平

린즈핑

린즈핑은 법을 얻기 전 차오양(朝陽)시 병원에서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1999년 4월 운 좋게 대법을 얻어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간암 증세가 사라졌으므로 그는 더욱 대법을확신하게 됐다.

2002년 4월 대법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중공에 납치되어, 2002년 9월 21일 불법적인 3년 형을 선고받고, 2002년 10월 11일 선양 다베이 감옥에 수감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같은 해 11월 25일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가 고문 중에 사망당한 내막을 아는 사람의 말로는 “린즈핑은 구타로 두개골 골절과 어깨뼈 골절상을 당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감옥 측에서는 가족을 시체가 있는 방 입구에 서서 한 번 보게 한 후 즉시 화장시켰다. 시신은 화장될 때도 여전히 다베이 감옥의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사례 4

리중민, 남, 31세, 랴오닝성 다롄(大連)시 파룬궁 수련생. 거주지는 와팡덴(瓦房店)시 만자링진(萬家嶺鎮) 탕툰(唐屯)촌 리자툰(李家屯) 64호이며 직장은 다롄개발구 후파(浮法)유리 유한회사이고 2003년 3월 4일 선양 다베이 감옥에서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李忠民

리중민

2002년 1월 12일 리중민은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불법으로 중공에 납치돼, 비밀재판에 회부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은 후, 2003년 1월 17일 선양 제4감옥에 수감되어 혹형에시달려 뼈만 앙상했는데, 30대 건장했던 젊은이가 60대로 변했다. 사악한 교도관은 그에게 형구를 채워 대자로 고정해놓고 음식물 강제주입을 시키는 등 온갖 고문을 가했다.

2003년 3월 4일 리중민은 선양다베이 감옥에서 고문 박해를 받다가 현장에서 사망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리중민의 사체 온몸에는 심한 상처가 있었으며, 머리 뒤에 피가 엉겨있었고, 허벅지 안쪽에는 심한 상처와 피멍이 들어 있었고, 등에도 여러 곳에 붉은 반점이 있었으며, 눈은 움푹 패어 들어가 있었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외손자 리중민의 박해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상심하다가 얼마 후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리중민은 박해치사되기 전 다롄시 공안국에 ‘요시인물’로 지정되어, 미행 감시당하다가 수차례 납치되고 감금되어 고문당했다.

李忠民被大连开发区恶警毒打的证据

리중민 다롄개발구 악경이 구타한 증거

사례 5

쑨위화(孫玉華), 여, 37세, 거주지는 안산(鞍山)시 톄둥취(鐵東區) 제팡(解放) 사무소 우진웨이(五金委). 2003년 4월 11일 수감 중에, 악경이 죄수를 시켜 구타하던 중 현장에서 사망했다.

孙玉华

쑨위화 일가족

쑹위화는 중공의 학대를 피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2002년 6월 납치당했다. 2003년 3월랴오닝성 여자 감옥 2대대 2소대에 감금돼 고문 박해를 당했다. 악경은 죄수 쑨리제(孫麗傑) 등을 시켜 쑨위화를 사정없이 구타하며 구박했다. 낮에 중노동 시킨 후 밥도 먹지 못하게 했으며, 밤이면 침대 옆에 쭈그려 앉힌 후 수시로 구타했다. 어떤 때는 대변을 입안으로 쑤셔 넣기도 했다. 쑨위화는 감옥에 온 지 1개월도 되지 않은 2003년 4월 11일 오전 구타당하다가 현장에서 사망했다. 살인자 중의 한사람인 쑨리화는 살인범죄수로 푸순(撫順) 사람이다.

사례 6

쩌우칭위(鄒清雨), 여, 63세, 거주지는 랴오닝성 선양시 뎨시취(鐵西區) 궁런춘(工人村).2003년 4월 17일 새벽 다베이 여자감옥에서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2002년 1월 4일 납치되어, 2003년 4월 4일 불법적인 중형을 선고받고, 다베이 감옥에 감금됐다. 감옥에서 음식물 강제주입을 당했고, ‘호랑이 의자(老虎凳-형벌기구)’에 묶여 잠을 자지 못하게 몽둥이로 때리고, 전기 충격기로 전기 고문을 가했다. 낮이면 강제 노역에 투입돼 혹사돼 손에 상처가 화농 됐어도, 링거를 맞게 하여 장기간 노역에 투입됐다.

2003년 4월 16일 고문 박해로 두통, 목 마비, 손 떨림 증상이 나타났다. 감옥이 치료를 해주지 않아 병이 악화된 후 나중에 병원에 실려 갔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였다. 2003년 4월 17일 새벽 추칭위는 선양 다베이 여자감옥에서 모진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감옥 측에서는 고문치사 사실을 감추기 위해, 3명의 형사 죄수들에게 3개월 감형시켜준다고 조건으로 설득해증거를 조작했다.

사례 7

우위안(吳元), 남, 44세, 랴오닝성 링위안(淩源)시 파룬궁수련생. 링위안시 베이루(北爐 ) 중학교사. 2003년 12월 10일 선양 다베이 제2감옥에서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吴元

우위안

2002년 8월 14일 납치당했다. 84세 모친은 병환으로 링거를 맞던 중 눈앞에서 아들이 납치당하는 모습을 보고 상심이 커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우위안은 불법으로 4년 형을 선고받고 선양 제2감옥에 수감돼 고문 박해를 당했다. 2003년 12월 8일 감옥 측이 가족에게 “우위안이 ‘식도암 말기’”라는 통지를 했다. 12월 10일 가족들이 감옥으로 면회를 갔을 때 우위안은 고문 박해로 뼈만 앙상한 채 침대에 움츠리고 있었는데, 이미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었다. 아내가 “당신이 우위안 맞느냐?”라고 묻자, 머리만 끄덕였다. 아내는 우위안을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면회시간은 단 30분간이었다. 당일 오후6시 우위안이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장례식장에서 화장할 때 아내가 시체를 보았는데, 가슴을 만지니 아직 따뜻했다. 아랫배 부위는 시퍼렇게 멍들었고 등에는 빨간 반점이 가득했으며, 귀와 코는 솜으로 막혀 있었다.경찰에게 왜 솜으로 막았느냐고 묻자, 경찰은 화장할 때 규칙이라고 했다. 가족들이 부검과 자세한 병력, 사인을 요구했지만, 감옥에서 거절했다. 가족들은 지금도 극도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사례 8

리광전(李廣珍), 여, 52세, 랴오닝성 젠핑(建平)현 마창샹(馬廠鄉) 중심 초등학교 우수교사,2004년 6월 18일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李广珍

리광전

리광전은 1994년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수련했는데, 얼마 안 돼서 결핵성 흉막염, 복막염, 부건염, 자궁외 임신 수술 후유증, 결핵 등 그동안 장기간 고통을 주었던 각종 질병이 모두 사라졌다. 남편 저우시룽(周喜榮)은 마창전은 중학교 영어교사다. 부부는 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하면서 여러 차례 중공 불한당들에게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감금되고, 구타당하고, 거기다가 벌금 형식으로 갈취당했다.

2002년 10월 부부는 또 납치됐다. 2003년 3월 부부는 각각 불법적인 3년 형을 선고받고,리광전은 선양 다베이 감옥에 감금됐다 선양 감옥에서 악인 교도관으로부터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했는데, 열 몇 명의 죄수들을 시켜 이불을 덮어씌우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무지막지한 구타를 가했다. 그러면서도 낮이면 강제노역에 투입시켰다. 고문과 강제노역의 장기화로 심신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구토가 심했다. 나중에 검사한 결과 자궁근육, 방광비대, 고혈압(190), 심장병이 심했다. 그렇지만 강제노역은 매일 계속 됐다. 결국, 고문 박해로 시달림을 받던 몸은 견디지 못하고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체중이 51kg에서 40kg으로 줄었는데, 2003년 보석형식으로 출소해 치료를 받던 중 2004년 6월 18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례 9

관원장(關文江), 남, 33세, 선양 신민(新民)시 다민툰(大民屯)진 둥자팡춘(佟家房村) 사람, 2002년 8월 5일 선양 제2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关文江

관원장

1999년 7월 20일 중공사당(中共邪黨)이 대법을 박해하며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관원장은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랴오양(遼陽)에서 떠돌다가 납치됐다. 심한 구타로 왼쪽 귀는 청력을 잃었으며, 불법적인 13년 형을 선고 받았다. 선양 제2감옥에 수감되어 고문 박해를 당했고,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2004년 3월 간암 진단을 받았지만, 박해가 계속되어 2004년 8월 5일 선양 제2감옥에서 사망했다. 감옥측은 간경화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관원장 시체의 여러 곳에 핏자국이 있었고, 앞가슴 3곳에는 옥수수 크기만 한 종양이 있었고, 귀는 맞아서 일그러져 있었다.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하면 관원장에게 내장을 파괴하는 약물을 주입해죽게 했다고 했다. 감옥에서는 관원장의 부친을 협박했다. “당신 아들이 무슨 범죄자인지 아는가? 국가를 뒤엎으려고 한 중죄자다.” 순박한 농민인 관원장 부친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시체를 화장했다

사례 10

줘쯔, 남 40세, 대졸, 본시(本溪)시 강철계기제어(本鋼計控) 공장 엔지니어, 2004년 8월 16일 선양 제2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周智生前和儿子的合影

저우즈 생전의 아들과의 모습

2003년 5월 불법으로 납치된 후, 2003년 11월 법원의 비밀 재판에서 11년 형을 선고받았다. 저우즈는 선양 제2감옥에서 각종 고문 박해에 단식으로 항의함에 따라 장기간 음식물 강제 주입을 당하는 등 온갖 박해를 당했다.

2004년 4월 가족들이 저우즈를 면회했을 때 고문박해로 몸은 피골이 상접했다. 2004년 6월 초 가족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생명이 위급한 상태였다. 가족들이 여러 차례 병보석으로 치료받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8월 16일 저우즈의 정신은 이미 혼미해진 상태였는데, 729병원에서 당일 밤 9시경 심장이 멈췄다.

사례 11

위펑화(於鳳華), 여, 57세, 단둥(丹東) 펑청(鳳城) 파룬궁수련생으로, 펑청 한뭐(翰墨) 초등학교 음악교사였다.

2004년 5월 10일 저녁 6시쯤 선양 다베이 감옥에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于凤华

위펑화

위펑화는 1997년 법을 얻어 수련하여 몸이 건강해졌다. 2001년 1월 어느날 밤 중공악당들에게 납치되어 불법적인 8년 형을 선고받고, 선양 다베이 감옥으로 이송되어 더욱 가혹한고문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위펑화는 시종일관 수련에 대한 믿음을 견지했으며, 사악의 어떤 위협과 기만에도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았다. 2004년 5월 5일 다베이 감옥에서 가족에게 사람을 데려가라는 통지를 했다. 당시 위펑화는 이미 목숨이 경각에 이른 때였다. 위펑화는 들것에 실려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5일 후인 5월 10일 오후 6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례 12

한리궈(韓立國), 남, 48세, 링위안(淩源)시 파룬궁 수련생, 링위언 강철회사 직원, 2004년 8월 23일 새벽 3시 선양 제2감옥에서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한리궈는 직장에서 일하다가 뜨거운 쇳물에 큰 화상을 입어 상태가 심했는데, 파룬궁을 수련한 지 반년 만에 완쾌됐다. 공장으로 볼 때 수만 위안의 의료비를 절약한 것이다. 한리궈와 아내 리춘링(李春玲)은 2001년 10월 22일에 불법으로 중공에 납치되어, 6년 형을 선고받았다. 한리궈는 감옥에 수감돼 고문 박해를 받았는데, 발에는 10kg의 무거운 족쇄를 채워놓고 각종 혹독한 방법으로 수갑을 채워 고통을 주었다. 40여 도의 폭염아래 묶어놓고 대소변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했고, 샤워장 근처도 못 가게 했다. 일명 ‘호랑이 의자’라는 고문 틀에 앉혀놓고 전기고문을 했고, 낮이면 중노동에 투입했는데, 피부는 벗겨져 피가 흘렀고, 뼈만 앙상했다.

2004년 7월 초 토요일 오전 6시 한리궈는 감옥대장 리젠궈(李建國 대단히 사악한자임)에게 불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2004년 8월 23일 새벽 3시 또다시 고문당하던 중에 사망했다(구체적인 사망원인 모름). 온가족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사례 13

가오롄이(高連義), 남, 34세, 랴오닝성 선양시 테시구 파룬궁수련생, 2004년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으며 선양 감옥 내 랴오닝성 감시병원에서 고문박해를 받다 치사 됐다.

가오롄이는 1999년 10월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현지 ‘610’과 공안에 납치돼 벌금형식으로 갈취당하고, 시달림을 당하고 감시당했다. 여러 번 감금되었고, 감옥을 전전하며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다.

2002녀 2월 말 납치되어, 비밀리에 중형을 선고받고, 선양 감옥에 수감됐고 감옥 관리병원정법위는 “단식해서 죽어도 석방하지 않는다.”라는 악행을 고수하며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아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가우롄이, 저우즈(周智)와 유사한 환자가 병실에는 많았다. 이런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이것은 중공이 파룬궁에 대해 너무 심하다. 사람이 이지경인데 상관하지 않는다니!” 가오롄이가 사망 후 많은 사람이 말했다. “이게 무슨 박해냐? 그건 분명암살이다!”

사례 14

리훙쩡(李洪增)을 아는 한 죄수가 은밀히 폭로했다. “리훙쩡이라는 파룬궁수련생은, 30대로예쁘고 청순했다. 2003년 6월경 랴오닝 여자감옥에 감금된 후 일주일도 안 돼 고문 박해 중에 치사 됐다. 감옥에서 고문 박해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치사 사실을 통제하기 때문에 아직 그녀가 고문당하다가 죽은 걸 모르고 있다. 리훙쩡 사망원인을 아는 수련생과 가족이 그녀의 박해 과정을 써서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기 바란다.”

사례 15

리링(李淩.玲), 여, 51세. 전 진저우(錦州)시 구타(古塔)구 노동국장, 난방회사 부사장을 역임했다. 2004년 11월 어느 날 새벽 2시 넘어 여자감옥에서 교도관의 사주를 받은 죄수 장춘어(張春娥)가 이불로 머리를 감싸 질식시켜 살해됐다.

李凌

리링

1994년 4월 5일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이 진저우에서 공을 전하고 설법하셨다. 리링은 그때부터 파룬궁을 수련해 몸의 질병이 모두 사라졌다. ‘진선인(真善忍)’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여동료들과 상사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리링은 1999년과 2002년에 두 번에 걸쳐 중공에 납치되어 형을 선고받아, 랴오닝(遼寧)성 여자감옥에 감금되어 신체적 정신적으로 혹심한 고문 학대를 받다가 끝내 사망했다.

1999년 10월 26일 첫 번째 납치당해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선양 다베이 감옥에 감금됐다. 이때 현혹되어 소위 ‘삼서’라는 것을 썼다. 그러나 깨달은 후 “삼서를 철회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 때문에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독극물을 주입 당한 후 옷이 모두 벗겨진 채 작은 독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을 당하는 등 온갖 고문을 당했다. 2001년 4월 26일 만기 출소하여 집에 돌아갈 때 뼈만 앙상한 몸에는 옴이 가득 올라 있었다.

2005년 5월 28일 저녁 리링은 또 납치되어 4년 형을 선고받고, 재차 랴오닝 여자감옥에 수감됐는데, 전과 같이 3대대 3소대에 감금됐다. 리링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를 외쳤다. 고문 박해를 가할 때 그녀는 단식으로 항의하자, 음식물 강제주입 등의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랴오닝성 여자감옥 목격자에 의하면, 2004년 11월의 어느 날 새벽 2시 넘어 악인 장춘어가리링을 침대에 엎어놓고 큰 이불로 머리를 덮은 후 위에 베개를 놓고 두 손으로 힘을 다해 눌러 질식시켜 살해했는데, 새벽 3, 4경이었다고 했으며, 죽은 리링을 단둥의 한 여자수감자가 업고 나가게 했다고 했고, 가족에게는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라고 거짓 통보를 했다고 말했다.

사례 16

니수친(倪淑芹), 여, 65세, 랴오닝성 링위안(淩源)시 허칸쯔샹(河坎子鄉) 허칸쯔춘 파룬궁수련생, 선양 다베이 감옥에서 엄중한 박해를 받다가 3월 13일 억울하게 사망했다.

니수친은 여러 차례 납치당했고, 2002년 불법으로 4년 형을 선고 받았다. 선양 다베이 감옥에서 비인간적인 고통을 받았는데, 그에 대한 구타는 일상적이었고 고문 학대 또한 혹심했다. 또 약명 미상의 독극물을 주입 당해 뼈만 앙상한 채 혈압이 높아졌다. 그런 고문 학대를 받으면서도 그 기간 동안 악당들에게 강탈당한 돈이 1만 위안(약 180만 원)이나 됐다. 감옥대장이 허칸쯔는 파출소 왕복 교통비 조로 500위안(약 9만 원)을 강탈하기도 했다.

2003년 10월 16일 니수친은 박해받아 신체가 극도로 허약한 상황에서 병보석 형식으로 치료받으려고 집으로 왔다. 그러나 치료를 받기도 전에 고문 박해로 쇠진해진 몸이라 2005년 3월 13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례 17

쑨첸(孫倩),남,33세, 랴오닝성 푸순(撫順)시 파룬궁수련생, 선양 감옥 제2감옥에서 혹심한고문 박해를 당해 2005년 3월 22일 억울하게 사망했다.

孙倩

쑨첸

2002년 10월 10일 쑨첸 수련생은 불법 체포되어 9년 형을 선고 받아, 2003년 가을 선양 감옥 제2감옥에 감금됐다. 심신의 혹심한 고문 학대로 강제노역을 거부, 엄관대(嚴管隊) 독방에감금돼 박해받았다. 감옥 측이 신체검사 때 폐에 병증이 있다고 했으나, 쑨첸은 어떤 불편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2004년 감옥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진단하여 병원으로 이송돼 감금됐다. 쑨첸은 불법 감금에 항의했고, 가족들도 여러 번 병보석을 요구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2005년 새해 병이 악화돼 다시 감옥병원으로 이송됐다. 고열이 나고 혼미상태에 빠지면서생명이 위급했다. 그러나 리젠궈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가 죽어갈 때 모친을만나게 했지만, 2005년 3월 22일 억울하게 사망했다.

사례 18

펑겅(彭庚), 남, 31세, 랴오닝성 공안국 경찰관, 판진(盤錦)시 싱룽타이(興隆台)구 사람으로 2005년 7월 14일 고문박 해를 받다가 치사 됐다.

1999년 7.20 후 펑겅은 여러 차례 베이징에 법을 실증하러 갔고, 진상을 알리다가, 성 공안국으로부터 정직 처분을 당했다. 2002년 불법으로 체포되어 그해 연말 13년 형을 선고받고, 선양 감옥에 수감돼 고문 박해를 받았다. 펑컹은 감옥에서도 대법을 믿으며 동요하지 않으면서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다가 고문 박해를 당해 많은 피를 토하면서 생명이 위험해졌다. 선양시 사악한 ‘610’은 “죽어도 사람을 석방하지 않는다.”라고 떠들어댔다. 2005년 7월 14일 펑겅은 고문 박해를 당하던 중에 사망했다.

사례 19

스성잉 (石勝英), 여, 66세, 선양 테시취(鐵西區) 파룬궁수련생, 2005년 8월 25일 저녁 7시, 선양 여자감옥에서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石胜英

스성잉

1991년 어느 날 마음씨 착한 스성잉 부부는 버려진 고아를 데려다 입양했고, 이름을 뤼덴자오(呂天嬌)라고 했다. 부부는 아이를 아주 사랑했다.

石胜英老人收养的孩子:吕天娇

스성잉 노인이 입양한 아이 뤼덴자오 모습

1996년 봄, 스성잉은 교통사고를 당해 척추 7, 8마디가 분쇄성골절로 불구가 되어, 국가로부터 ‘2급 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서 고통스럽게 생활하던 중에 마음씨 착한 한 사람이 그녀에게 파룬궁을 소개해주며 ‘전법륜(轉法輪)’ 책을 주었다. 초등학교3년 수준인 스성잉은 이 책을 며칠 동안 읽은 후 기적처럼 앉을 수 있었다. 2개월 책을 본 후 그녀는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었다. 스성잉의 그런 모습을 본 많은 사람이 파룬따파의 신기함과 초상적인 힘을 믿게 되었다.

1999년 7월 파룬궁이 박해 당하자, 스성잉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불법으로 선양시 여자 자강학교, 선양 룽산(龍山) 교양원, 마싼자(馬三家) 교양원에 감금돼 각종 혹형을 당했다.

2000년, 스성잉은 재차 납치되어 마싼자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어 만기 출소일이 됐지만 두 번씩이나 형기가 연장되면서 고문 혹형에 시달렸다. 벌서기, 침대 위 대자로 수갑 채우기, ‘호랑이 의자’, 더러운 걸레로 입 틀어막기, 테이프로 입 막기, 전기고문, 작은 독방 감금 등의 온갖 혹형으로 온몸에 옴이 생기고, 피부가 짓물러 농양이 됐다. 악경이 머리채를 잡고 벽에 부딪쳐 뇌진탕이 되어 토하게 됐다. 마지막에 혹심한 고문과 혹형으로 몸 상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피가 부족한 상황까지 됐다. 2002년 9월 28일, 가족이 4,000위안(약 72만 원)을 갈취당한 후 숨이 넘어가는 그를 집으로 데려와 간호했다.

2004년 11월 30일, 스성잉은 공원에서 파룬궁 박해 진상을 알리다가 데시취 공안국 국보대장에게 납치되어, 2005년 1월 31일 선양 데시취 법원에서 4년 형을 선고받고, 랴오닝성 여자감옥 3대대에 감금돼 고문 박해 당했다.

2005년 8월 18일, 가족이 성 여자감옥에 면회를 신청했을 때 교도관이 말했다. “스성잉은 죄수복을 입지 않는다고 버텨서 면회가 안 된다.” 8월 25일 저녁, 가족은 사망한 스성잉 몸에 죄수복이 입혀 있는 걸 보았다.

2005년 8월 25일 오후 7시 여자감옥은 스성잉 가족에 통지했다. “스성잉 이미 사망했고, 시체는 선양 739 병원에 있다.” 가족이 739 병원 스성잉 시체에서 상처를 확인했는데,두 눈은 반쯤 뜬 상태에서 눈물이 맺혀있었는데, 구타하면서 질식시켜 죽인 것이 분명했다. 서(徐) 씨 교도관(‘서처’라고 부르며, 30대 여자)을 두목으로 한 4명의 교도관은 “스성잉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라고 했고, “발병은 8월 23일 일으켰다.”라고 했다. 스성잉은 1996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한 후 신체가 건강했고, 지금까지 심근경색 증상은 없었다. 가족은 치료한 병력서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교도관들은, 739 병원의 사망진단서를 보여주었는데, “스성잉은 8월 25일 3시 739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했다.”라고 쓰여 있었다.

가족은 당시 739 병원 책임 의사 후옌(胡豔)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의사 후옌은 “몸 상처는 우리가 낸 것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당시 장(張) 원장이 현장에 있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라고 했다. 그 후 교도관이 사체검안 후 “신체에 확실히 상처가 있다.”라고 인정했다. 당시 가족이 시체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30여 명의 교도관들이 사진기를 빼앗고, 시체도 빼앗아갔다. 그 후 지역관계기관 직원에게 가족을 감시하게 했다. 당시 중년인 리(李) 씨 성의 여자교도관이 명령했다. “가족에게 시체사진을 찍게 하면 안 된다. 인터넷에 올리게 되면 모두 목을 자를 거다!.” 또 가족에게 협박했다. “당신들, 고소하다가 이 일로 또 몇 명 더 들어가지 말아요!“

8월 26일, 아침 9시 가족은 위훙취(於洪區) 장례식장에서 스성잉 죽은 모습을 보았다. 성 여자감옥에서 “소란을 예방한다.”라는 구실로 5대의 차량에 경찰대를 배치했고, 성 여자 감옥교도관들은 전부 평상복차림이었는데 모두 60여 명으로, 그들은 모든 걸 차단하고 방해했다.

사례 20

위리(於力),여, 60여 세, 다롄 전 항만사무국 직원. 전문대학을 졸업, 2005년 9월 억울하게 사망했다.

于力

위리

위리는 1995년 대법수련을 시작했다. 그 후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고, 심각한 질병도 모두 완쾌됐고, 심신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2000년 ‘10.1’ 위리는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사당의 인터넷에 지명수배 된 후, 2001년 5월 납치되어 불법적인 형의 선고를 받고, 다베이 감옥에 감금됐다. 감옥의 사악한 자는 각종 혹형으로 위리를 박해했다. 고무로 감싼 쇠몽둥이로 위리를 구타했고, 각종 혹형은 겉으로 상처가 나지 않게 하면서 오장육부는 모두 상해를 입게 했다. 사악한 자는 60세 된 위리를 매달아 놓고 혼미상태에 빠질 때까지 쇠몽둥이로 때렸다. 실신하면 내려놓고 뜨거운 물을 뿌렸다.

2003년 10월 고문 박해로 생명이 위급해지자, 병보석의 형식으로 집에 돌아왔다. 돌아온 후 몇 차례 피를 토했다. 2005년 9월 말 위리는 재차 피를 토하고는 3일 후 사망했다.

사례 21

판웨이화이(範維淮), 남, 74세, 랴오닝 차오양(朝陽)시 파룬궁수련생. 2005년 12월 12일 선양 다베이 감옥에서 박해로 치사 됐다.

范维淮

판웨이화이

1994년 법을 얻어 수련했고 진선인의 표준으로 좋은 사람이 돼 심신이 건강했다. 판웨이화이 부부는 사당의 박해때문에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2002년 3월 17일 베이퍄오(北票)에 왔으나, 4월 17일 납치되어 4,000위안(약 72만 원)을 갈취 당한 후 부부는 각각 10년 형을 선고받아, 선양 다베이 감옥에 감금되어 박해당하다가 간암에 걸렸다. 감옥 측에 신체검사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교도관은 들어주지 않고 노인의 생명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오히려 위협만 가했다. “전향하지 않으면 신체검사고 뭐고 다 없다.” 줄곧 간암 말기까지 도래했지만, 감옥 측은 사람을 석방하지 않았으므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다 죽어갈 때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속셈으로 석방했다. 이때 판웨이화이 노인의 몸은 앙상하게 뼈만 남았는데, 집에 돌아온 지 6일 만인 2005년 12월 12일 억울하게 사망했다.

(이어서 계속)

문장발표: 2015년 3월 1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박해사망사례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3/11/3060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