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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불구가 된, 허베이 장자커우시 궈정칭 억울하게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베이 보도) 허베이(河北) 장자커우시(張家口市) 쉬안화현(宣化縣) 파룬궁수련생 궈정칭(郭正清)은 2002년 구치소에서의 박해로 신체가 마비되어 스스로 기본적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된 뒤에도 스자좡시(石家莊市) 베이자오(北郊)감옥으로 또 납치돼 계속 박해당했다. 70여 차례의 혹독한 구타와 각종 고문 학대당했는데, 학대로 중병에 걸려 두 손과 팔, 발과 다리에서 전신에 이르기까지 마비되었다. 결국, 2015년 9월 14일 억울하게 사망했는데, 향년 55세였다.

궈정칭, 원적은 쉬안화현 돤자바오향(段家堡鄉) 스후리촌(石湖裏村)이고 예전에 가전제품 수리에 종사한 적이 있다. 1998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해 심령과 몸은 환골탈태의 변화를 얻었다. 그는 진정하게 ‘진ㆍ선ㆍ인(眞ㆍ善ㆍ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고 결심했고 이때부터 그는 광명하고 행복한 반본귀진의 길에 올랐다.

하지만 장쩌민이 발기한 파룬궁 탄압 운동 때문에 파룬궁수련생들은 잔인무도한 박해를 당했다. 2001년 4월 25일, 궈정칭은 베이징으로 갔다. 톈안먼 진수이교(金水橋) 위에서 ‘파룬궁을 연마함은 사람의 권리이다’라는 현수막을 펼쳤는데, 즉시 많은 사람의 환호와 공명을 일으켰다. 경찰은 즉시 덮쳐들어 궈정칭을 경찰차에 붙잡아 들였다. 차 안에서 그는 또 차 문을 열고 높은 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다. 한 경찰은 1m 길이인, 고무를 씌운 나선형 무늬의 강철 막대기로 ‘쿵쿵’ 소리가 나게 그의 머리를 사납게 쳤다. 당시 그의 왼쪽 눈은 구타로 상처를 입었고 머리 부위의 혈관은 갈라져 터졌으며 콧구멍에서는 3일 동안 검은 피가 흘렀다.

酷刑演示:铁椅子

고문 재연:쇠의자 고문(鐵椅子)

베이징 주재 장자커우시 사무실의 악인은 궈정칭을 쉬안화현으로 납치해 가서는 쉬안화구치소에 20여 개월 동안 불법 감금했다. 이 기간에 궈정칭은 뒷짐결박 채우기 고문, 족쇄를 부수기(砸腳鐐), 쇠의자에 앉히기 고문,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고문, 구타 등 여러 가지 고문을 당했다. 쉬안화 구치소의 뒷짐결박 채우기 고문은 매우 잔혹한데 그것은 정상적인 수갑이 아니라 두 개의 U형 쇠고리인데 두 곳의 끝에 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중간은 하나의 쇠막대기로 꿰뚫어 지나가게 하고는 다시 자물쇠로 잠근다. 사람이 이런 수갑을 차게 되면 가장 길어야 두 시간이면 수갑이 살 속으로 깊이 패어 들어가 손이 부어오르게 되고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다. 쇠의자는 일종 강철로 만든 의자인데, 사람이 안에 갇히면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고, 시간이 오래되면 다리가 부어오르며 내려놓아도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다.

이른바 ‘음식물 주입’은 어떠한 것인가? 사람을 강제로 쇠의자에 눌러 앉히고 양쪽에서 강제로 두 손을 뒷짐으로 쇠의자에 채운 다음 힘껏 사람의 머리 부위를 고정해 코를 통해 위 속에 호스를 꽂는다. 음식물 주입을 당하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쉬안의 쑨옌칭(孫豔青)이라는 여성 파룬궁수련생은 바로 쉬안구치소의 강제 음식물 주입으로 사망했다. 당시 악독한 경찰은 필사적으로 진상을 속였다. 궈정칭은 3차례나 강제로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8~9명이 그를 누르며 호스를 그의 콧구멍 안에 꽂았는데, 3차례를 주입하자 그의 온 얼굴은 이미 피범벅이었다. 현장에 있던 간호사마저 차마 볼 수 없어 하며 계속하여 “이렇게 주입하면 안 됩니다! 너무 잔인합니다!”라고 말했다.

확고하게 수련한다는 이유로 구치소에서 파룬궁수련생을 혹독하게 구타하는 일은 매우 빈번하게 있었다. 악독한 경찰은 늘 죄수를 시켜 궈정칭을 구타했는데 어느 한 번, 악독한 경찰은 죄수 19명에게 지시하여 그를 혹독하게 구타하게 했다. 구타로 그는 온몸에 상처를 입었고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구타가 끝나면 경찰은 죄수들에게 담배 한 대씩을 권했고 언젠가 한 번은 궈정칭이 구타로 인해 3시간 동안이나 혼절하기도 했다.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한 기간, 궈정칭은 차례로 악독한 경찰과 죄수에게 50여 차례나 잔학하게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장시기 동안 혹독한 구타와 각종 고문 학대를 당했던 까닭에 그의 뇌혈관 조직은 손상을 입었고 콧구멍에서는 장기간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1년도 되지 않아 궈정칭은 본래 건장하던 몸이 허리도 곧게 펴지 못했고, 다리는 늘 경련이 일어나 전신을 떨었으며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그리고 두 손과 다리는 심각하게 비틀리고 변형되어 손으로 글자를 쓸 수 없었고 물건을 들 수도 없었으며 걷기도 어려웠다. 시력은 1.5에서 0.2로 떨어졌는데, 구치소에서 12개월의 기한을 초과한 감금을 당했을 때 두 눈은 이미 실명했다.

2002년 8월 13일 이르러 궈정칭은 박해로 신체가 마비되어 기본생활조차 스스로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악도는 그에게 카테터를 꽂아 주었는데, 그는 늘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줌에 피가 섞여 있어도 관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되도록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자 궈정칭은 반드시 연공을 견지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참기 어려운 이상한 가려움과 아픔을 참으면서 카테터를 조금씩 잡아당겨 냈는데, 대두만 한 기포와 많은 피가 섞여 나왔다.

궈정칭은 구치소에서 박해로 이 지경이 되었으나, 외부의 가족은 아무것도 몰랐다. 가족이 궈정칭을 보러 갔을 때마다 모두 거절당했고 불법적인 판결을 당해 감옥으로 납치됐을 때도 가족에게 통지하지도 않았다.

2002년 11월, 연공을 거쳐 궈정칭의 몸은 다소 건강을 회복해 일어설 수 있었으나, 이미 박해로 불구가 되어 다만 한 치씩 옮겨 걷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쉬안화 국가보안대대 대대장 장옌쉐는 또 적극 그를 사링쯔(沙嶺子) 감옥과 줘루 다탕완(涿鹿大塘灣)감옥으로 보냈다. 감옥 측은 궈정칭의 몸 상태를 보고는 수감을 거부했다. 맨 마지막에 경찰이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허베이성 스자좡시 베이자오 감옥 측은 뜻밖에도 박해로 심각하게 불구가 된 궈정칭을 수감했다.

스자좡시 베이자오감옥 즉 허베이성 제4감옥은 스자좡시 베이환서로(北環西路) 3호에 있는데 경찰 2천 명, 수감 인원 4천 명이 있다. ‘문명 감옥’이라고 표방하나 실질은 인간지옥과도 비길 수 없는 암흑의 곳이다. 베이자오 감옥은 허베이에서 파룬궁수련생을 가장 심하게 박해한 불법 감옥 중의 하나이다. 감옥 측은 확고한 파룬궁수련생들을 이른바 ‘공견’팀이라는 것을 설립해 매일 끊임없이 거짓말로 꾸민 녹화프로그램을 상영하며 강제로 세뇌를 진행했고, 각종 고문으로 ‘진선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도록 핍박했다. 예컨대, 강제적인 ‘아오잉(熬鷹)’ 고문을 진행해 지속해서 잠을 못 자게 하는데 죄수와 경찰이 윤번으로 지키면서 파룬궁수련생이 잠자는 것을 보기만 하면 마른 수건으로 안구를 닦았다. ‘걸상 다리에 앉히기’ 고문은 허베이성 제4감옥에서 ‘발명’한 것이다. 악도는 걸상을 뒤집어놓고 강제로 파룬궁수련생을 걸상 다리 위에 앉혔는데, 다리를 흩뜨려 펴서 앉히고는 전신의 중량이 걸상 다리 위를 내리누르게 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움직이면 곧 구타했는데 정말 매우 잔인했다. 그리고 또 발로 양쪽 신장 부위를 걷어차기, 담뱃불로 두 발을 태우기, 철편으로 머리 부위 구타하기, 위에 호스를 꽂고 소금물 주입하기, 귀 뺨 때리기, 족쇄를 끌고 다니게 하기, 음식물 먹는 것을 제한하거나 식음 금지, 물을 금지,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을 제한하기 등의 학대가 있었는데, 죄수의 경험에 따르면 이런 고문에서 보통 4일이면 사람은 혈뇨 하기 시작하고 5일이면 정신이 붕괴한다고 했다.

베이자오 감옥의 교도관은 늘 죄수에게 지시를 내려 파룬궁수련생을 혹독하게 구타했다. 살인, 강간, 강탈 따위의 그 폭력 죄수들은 교도관의 조수가 되었다. 만약 모질게 구타하면 공을 세웠다고 기록해 두고 형기를 줄여주었다. 어떤 죄수는 공견팀으로 파견되어 가서 졸개가 되었고, 어떤 이는 그런 잔인함과 피비린내를 견딜 수 없어 하며 형기를 줄이는 기회를 포기할지라도 양심을 버리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교육처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지 가장 악독하고 조금의 인간성도 없는 죄수를 찾아 총으로(총기처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막 감옥에 들어갔을 때, 궈정칭의 다리는 이미 밭장다리가 되었고 두 발은 이미 변형되어 밖으로 벌어져 신발을 신을 수 없었으며 걷기가 어려웠고 손도 심각하게 변형되었다. 그가 확고하게 믿고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해당해 이미 불구가 됐는데도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계속해서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酷刑演示:毒打

고문 재연: 혹독한 구타

2003년 3월, 궈정칭은 제5감구역에 의해 공견팀으로 끌려가 강제 세뇌 ‘전향’ 당했다. 처음에는 ‘아오잉’ 고문을 가해 연속 7박 8일 동안 잠을 못 자게 했다. 3중대 교도원 류루펑(劉汝峰)과 죄수는 밤낮 그를 혹독하게 구타했다. 이로 인해 그는 수차례 기절했고 머리가 구타로 심하게 부어올랐다. 8일째 되는 날, 그의 얼굴과 손, 발은 모두 변형되었다. 하루 저녁에는 혹독한 구타로 혼절했는데 밤중에야 정신을 차렸다.

류루펑의 사주로 형사범 리화(李華)와 스춘성(石春生)은 궈정칭을 감시하는 박해를 했다. 이 두 죄수는 늘 고의로 그에게 트집을 잡았다. 궈정칭을 말하지도 못하게 하고 입을 열기만 하면 죄수 리화가 길이가 한 치 정도 되는 합판으로 궈정칭의 얼굴을 후려쳤다. 판자에 선혈이 가득 묻을 때까지 후려쳤다. 리화는 구타하면서 “이것은 대장의 지시인데, 궈정칭이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큰소리로 외쳐댔다. 어느 하루, 일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죄수 스춘성은 고의로 궈정칭을 3차례나 땅바닥에 밀어 넘어뜨려, 이미 중상을 입었던 오른발은 거듭 중상을 입게 됐고 오른발을 삐어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 심하게 부어올랐던 발등에는 계란만큼 큰 검은 피멍울이 생겼다. 감방으로 들려 들어간 뒤, 스춘성은 또 고소해 하며 크게 웃었다. 그날 저녁 궈정칭은 4차례 화장실에 갔는데, 두 차례는 앉아서 손을 짚고 조금씩 옮기면서 갔고 두 차례는 기어갔다. 그 후 오랫동안 궈정칭은 화장실에 오가는 것도 기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럴지라도 궈정칭은 여전히 수련생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스춘성에게 선의로 선악에는 인과응보가 있다는 도리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스춘성은 믿지 않았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스춘성은 갑자기 심근경색이 도졌는데, 응급처치를 진행한 뒤에도 참기 어려울 정도로 다리가 아팠고 며칠이 지나자 마비되었다. 2개월 치료를 거쳐서야 쌍지팡이를 짚고 병상 신세에서 벗어났다. 그 후 스춘성은 다시는 파룬궁수련생 박해에 참여하지 않았다.

베이자오 감옥에서 3년이 되지 않은 사이에 궈정칭은 70여 차례의 혹독한 구타와 각종 고문 학대당해, 중병에 걸렸고 심각한 불구가 되어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되었다. 오른손은 3년 동안 국자,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그의 두 손과 팔, 발과 다리에서 전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비되었고, 얼굴 부위와 입마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궈정칭은 출소한 뒤, 법 공부를 하고 연공을 거쳐 몸은 기적적으로 많이 회복되었으나, 박해를 너무 심각(특히 머리 부위는 경찰에게 구타로 중상을 입었음)하게 당했던 이유로, 이 몇 해 사이에 완전히 정상적인 사람처럼 근무할 수 없었고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다. 2014년 12월 4일, 궈정칭은 예전에 박해당했던 병세가 가중되어 걸을 수 없고 몸을 뒤척일 수도 없었으며 말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2015년 1월 29일, 가족은 스스로 기본생활을 할 수 없는 궈정칭을 경로원으로 보냈다. 결국, 2015년 9월 14일 궈정칭은 억울하게 사망했다.

문장발표: 2015년 9월 1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박해 사망 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17/3158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