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관윈화(關雲華, 48)는 헤이룽장성 우창(五常)시 라린(拉林) 만족진(滿族鎭) 시황치촌(西黃旗村) 시황치툰(西黃旗屯) 4툰의 사람으로, 일가족 세 식구는 98년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장쩌민은 ‘구타해 죽여도 상관없다. 그러면 자살로 친다.’며 파룬궁을 소멸하려 했는데, 이런 박해 속에서 그녀의 남편은 하얼빈 공안7처로 납치됐다. 그는 이틀도 되지 않아 무참하게 구타로 사망했는데 그들은 한쪽 안구와 장기를 적출해갔다. 잇달아 그녀 역시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지금 관윈화는 이번 박해를 발동한 원흉에 대해 고소를 제기했다.
다음은 관윈화가 고소장 중에서 제기한 자세한 박해 상황이다.
1998년 3월, 우리 일가족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연공 전, 나는 다리와 허리가 아픈 병에 걸렸는데 다리와 허리가 심각하게 아플 때면 걷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숨이 가쁜 증상, 등이 아픈 증상, 목이 아픈 증상, 중이염에 걸려 돈을 적잖게 써도 치료되지 않아 정신적인 부담이 매우 컸다.
파룬따파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이치를 깨닫게 했다. 나는 ‘진선인(眞ㆍ善ㆍ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해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해 가정이 화목해졌다. 그리고 각종 질병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몸이 건강해지고 생활 조건이 개선됐다. 병이 없어지자 온몸이 가벼워졌고 마음은 늘 여유로웠다. 일가족 세 식구는 대법의 홍은(洪恩) 속에 푹 빠졌다.
99년 7.20 중국공산당의 박해가 시작된 후 우리는 법공부 하고 연공하는 환경을 잃었다. 2000년 겨울, 남편 장옌차오(張延超, 파룬궁수련생)는 베이징으로 대법을 실증하러 갔다가 납치돼 라린진(拉林鎭) 정부 추이얼(崔二, 이미 사망했음)에 의해 200위안을 갈취당했다. 라린 파출소 경찰은 베이징으로 가서 우창(五常) 유치장으로 압송해갔다. 남편은 우창 정보과에 의해 1000위안을 갈취당했고 2개월 쯤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뒤 현지 경찰, 정부 관계자는 늘 집으로 찾아와 우리를 괴롭혔다.
2002년 4월, 남편 장옌차오는 외출해 종자를 사러 갔는데 며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행방불명이 되자 나는 그의 행적을 도처에 문의했다. 이 기간에 라린 파출소 경찰은 우리 집에 사람이 없을 때 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대법 서적을 압수해갔다.
장옌차오(張延超)
라린 불법 요원은 전화를 걸어 나를 속였다. 그리고 또 나를 라린 파출소로 납치했는데 그날에 나는 우창감옥으로 이송되었다.(그 후 남편은 그들에 의해 하얼빈 공안7처로 납치돼 이틀도 되지 않아 무참하게 구타로 사망했음. 시신은 참혹해 차마 볼 수 없었고 한쪽 안구와 장기를 적출해 감).
우창 형사경찰대대에서 그들은 나에게 서명(남편이 유죄임을 자백하도록)하라고 했다. 내가 서명하지 않자 그들은 내 머리를 잡고 구타했다. 나는 구타당해 시멘트 바닥 위에 넘어져 사지에 경련을 일으켰다. 몇 시간 후 그들은 한 노인을 고용해 나를 부축해 아래층으로 내려가게 했다. 그들은 또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내가 파룬궁을 연마해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모함했다. 그 후 내가 며칠 동안 단식을 진행하자 그들은 강제로 음식물 주입 박해를 자행했다.
고문 재연: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2002년 9월, 나는 또 완자(萬家) 노동교양소로 납치됐다. 그들은 그날 몸수색을 진행했고 또 머리를 짧게 깎였다. 그리고 또 나에게 독극물 주사를 한 대 놓았는데 왼쪽 다리에 몇 시간 동안 감각이 없었다.
집중훈련대에서 자오쉬칭(趙余慶), 야오푸창(姚福昌)을 우두머리로 한 경찰은 나에게 수련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테이프로 내 입을 막고 나를 ‘큰 괘에 올리기 고문(上大掛)’을 자행했다. 끈으로 침대에 매달아 발을 땅에 닿게 했는데, 수갑의 톱니는 마치 호랑이가 손목을 꽉 물고 있는 것처럼 조여 왔다. 옆에 있던 다른 죄수가 당시 내 손은 이미 피가 통하지 않아 검게 변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들은 전기봉으로 내 목 부위에 전기충격을 가했는데 목을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후 의사가 와서 심장을 검사를 하고 나서야 나를 풀어주었다. 이런 고문으로 나는 오른팔이 마비되는 증상(오래 동안 움직일 수 없었음)이 생겼다. 이때 형사 죄수는 내 손을 잡아당겨 이미 다 써놓은 ‘삼서’ 위에 강제로 지장을 찍었다. 이후에도 쇠의자에 앉히기, 삼복날에 밖에서 곧게 걷게 하기, 기마자세(碼坐, 아침 5시부터 밤 12시까지) 등의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강제노동을 했는데(아침 5시에 일어나 저녁 9~10시에 일을 끝냈음), 식사 때마다 옥수수떡과 기름기 없는 언 배춧국을 먹었다. 20개월 동안 박해를 당하고 나서야, 나는 석방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 고문 설명도: 매달기 고문(吊銬)
내가 불법 감금을 당한 기간, 그들은 우리 아이들마저 가만 두지 않았다. 경찰은 여러 차례 아이를 찾아갔는데 가족들은 아이가 박해당할까 두려웠다. 결국 아이는 그들의 핍박으로 학업을 그만두게 되었고, 연로하신 할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유랑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도 봄에 신던 신을 신었으며, 10살 남짓인 아이는 그 나이에 일하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다른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충격을 당했으며 어린 영혼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일 모두가 우리가 ‘진선인(眞ㆍ善ㆍ忍)’을 믿어 좋은 사람이 되려 한 것 때문이었다.
2010년 3월 19일, 우창시 ‘610’ 모전산(莫振山)과 국가보안대대의 잔즈강(佔志剛)은 라린 파출소의 리훙위(李洪宇), 쉬안리즈(玄立志) 등과 결탁해 나의 거처에 들이닥쳐 진상 카드 몇 장을 가져갔다. 그리고 나를 우창 세뇌반으로 납치해 강제로 세뇌 프로그램을 보게 했고 ‘삼서’를 쓰도록 했다. 일거일동마저 다른 사람에게 감시당했으며 심지어 화장실로 가는 것마저 사람을 따라 붙였다. 나의 심신은 극심한 상처를 입었고 다리가 아파서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었다. 그 후 2개월이 지나서야 풀려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안절부절 못하며 나날을 두려움 속에서 지냈다. 또한 부모님과 시어머니는 가족을 잃는 극심한 고통을 감당해야만 했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 아버지마저 교통사고를 당해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 일로 말미암아 가족은 또다시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고통을 겪었다.
문장발표: 2015년 9월 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8/3153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