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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으로 사망한 관거의 노모가 장쩌민 고소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랴오닝성 선양(瀋陽)시 싼자진(三家鎭)의 농촌 여성 후화융(胡華勇)은 지난 8월 21일에 최고인민검찰원에 ‘형사고소장’을보내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를 발동했고 이로 인해 그녀의 33세 딸 관거(管戈)가 고문으로 사망했다며 고소했다. 후화융은 최고인민법원이 장쩌민의 형사적 책임을 추궁해 세인들이 이번 박해를 똑똑히 분별하기를 희망했다.

당시 한창 나이였던 관거는 정저우(鄭州) 스바리허(十八里河) 여자노동교양소에서 박해로 사망해 밍후이왕의 3,888건의 박해 사망사례에 포함됐다. 지금 74세인 후화융은 딸 관거가 박해를 당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管戈

관거(管戈)

나의 딸 관거는 1970년 10월 16일에 출생했고 랴오닝성 선양시 사람이며 지린(吉林) 대학 법률계 본과를 졸업했다. 1994년 7월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관거는 연공하고 심성을 닦아 각종 잔병이 전부 다 나아져 특별히 건강했다. 그리고더욱 너그럽고 선량해져 일을 함에 예의가 바르고 밝게 양보했으며 다른 사람 돕기를 특별히 즐겼다.

1998년 12월, 관거는 베이징 중국과학원에서 박사 공부 중인 겅싸(耿颯)와 결혼했다. 결혼 후 베이징 샹산(香山)에 사진관을 차렸는데 장사가 매우 잘됐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은 파룬궁 박해 운동을 일으켰다. 관거와 수련생들은 늘 천안문으로 가서 공정한 말을 하고 박해에 반대했다. 4.25와 7.20 청원 대열에는 모두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1999년 12월 24일, 관거와 몇 명 수련생들은 베이징 식물원에서 파룬궁을 연마했다가 워푸사(臥佛寺) 파출소에 의해 불법 납치를 당했다. 당시 사진관은 폐쇄됐고 관거는 베이징 칭허(淸河) 구치소로 보내져 1개월 동안 박해를 당했다. 석방할 때 경찰은 그녀에게 서명을 강요했으나 관거는 서명하지 않았다.

2000년 5월, 관거 두 부부와 아일랜드 유학생 자오밍(趙明), 89605부대의 진샹쥔(金向軍), 그리고 이 외의 수련생 두 명은 베이징 난즈(南植)에서 함께 불법 납치를 당했다. 당시 샹산 파출소 소장은 가오링(高嶺)이라고 불렀다. 관거는 24시간 동안 불법 감금당하고 석방돼 돌아왔다. 남편 겅싸는 베이징 칭허 구치소로 보내져 1개월 동안 불법 감금당했다.

2000년, 겅싸가 졸업할 때 지도교사는 “자네는 학력을 원하는가, 아니면 파룬궁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다. 겅싸는 “저는 파룬궁을 원합니다”라고말했다. 이렇게 되어 학교는 그에게 학력을 주지 않았고 직업을 배치해 주지 않았으며 출국해 박사후 공부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1년 5월 29일 저녁 9시가 넘어서 허난성 신샹(新鄉)시 훙치(紅旗) 공안분국 경찰이 갑자기 방안에 들이닥쳐 관거를 납치했다. 당시 관거는 설사를 했다. 리 과장이라 부르는 늙은 경찰은 관거의 팔을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으며 관거가 화장실로 가려 해도 따라 가려 했다. 당시 방안에 7,8명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구(賈) 과장이라고 불렀고 두 여성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두(杜)씨였다. 그 후 또 형사 경찰대 젊은이 두 명을 파견해 왔다. 그들은 관거를 바닥에 눌러 넘어뜨리고 손을 등 뒤로 결박해 납치한 후 신샹시의 다른 한 구치소로 보내 불법 감금박해를 진행했다. 감금 기간에 그녀의 부친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관거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관거는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대략 같은 해 9월, 훙치 분국에서는 관거에 대해 3년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내렸다. 리 과장, 구 과장, 쉬(徐) 과장이 관거를 허난성 정저우 스바리허 여자노동교양소로 압송했는데 이 악도들은 음식점에 간 돈마저 겅싸에게 내도록 했다.

노동교양소 안에서 관거는 각종 고문 학대를 당했는데 그중 두 차례는 ‘끈으로 묶기’ 고문을 당했다.

中共酷刑示意图:“上绳”

중국공산당 고문 설명도: ‘끈으로 묶기’ 고문

관거는 허난성 스바리허 여자노동교양소 안에서 2년 넘게 시달림을 당했다. 그녀는 전화에서 나에게 말하기를, 교도관이 확고한 대법제자 8명을 3대대에 가뒀는데 각각 마약범에게 감시를 당하고 다른 사람과 말하지 못했으며 화장실로 가는 것마저 제한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곳의 하루가 일 년 같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밤낮사랑하는 딸을 그리며 그녀가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뜻밖에 사망 통지 전화를 받았다. 2003년 6월 4일, 관거는 허난 스바리허 여자노동교양소 안에서 악인에게 고문 학대를 받아 비참하게 사망했다.

우리가 정저우 제2병원으로 갔을 때 냉동실 안에서 관거의 시신 위에 아주 많은 상처가 있고 눈을 뜨고 있음을 발견했다. 냉동상자 밖에는 또 응고된 피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관거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왜냐하면 그녀의 머리 부위는 구타로 아주 많이 부어올랐기 때문이다.

장의사에 도착해 시신에 옷을 입힐 때 관거의 머리 부위에 부어오른 커다란 혹과 몇 개의 작은 혹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두정골에는 1.5센티미터의 깊이로 푹 파인 곳이 있었고 귀는 구타로 내려앉았으며, 왼쪽 팔은 한 덩이의 살이 모자랐고 목 뒤에는 부어오른 커다란 혹이 있었으며, 또 허리 부위에는 3센티미터의 검은 색 상처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왼쪽 다리 전체는 모두 청록색을 띠었고 두 손은 꼭 주먹을 잡고 있었는데 두 엄지손가락 손톱은 잡아서 새까맣게 되었으며 손바닥에는 홍색 반점이 나타났다. 이런 흔적으로 짐작하면 내 딸은 이를 악물며 참기 어려운 고문 학대를 견뎠을 것이다.

우리가 관거 시신에 있는 상처 흔적을 찍으려 했다가 대학 보위처의 악독한 여자 옌(閆)씨에게 밀고를 당해 핸드폰, 사진기를 빼앗겼다. 모두 사복 경찰 장씨의 손에 있었는데 여태껏 돌려주지 않았다.

사복 경찰 장씨는 예전에 내 아들에게 “6월 4일 아침에 다른 사람은 모두 체조를 했는데 관거는 파룬궁을 연마했소”라고 말했다. 아들이 “그래서 당신들이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까? 그런가요?”고 말하자 장씨는침묵했다. 장씨는 또 아들에게 “당신이 인터넷에 올렸나? 인터넷에 올렸다면 우리들은 전부 끝장이야”라고 말했다.

우리가 요구한 조건에 모두 합리적인 답변을 주지 않은 채, 경찰은 곧 관거의 시신을 강제로 화장했다. 사위 겅싸는 대학에서 아주 난처함을 당했는데 월급을 올려주지 않았고 본직 업무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각 방면에서 차별을 당했다. 이런 핍박 하에 겅싸는 중국을 떠나 해외로 갔다.

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재난은 모두 장쩌민이 혼자 제조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박해로 사망한 딸 관거를 위해 최고인민법원에 고소를 제기해 장쩌민 이 주모자를 고소하며 하루 빨리 그것을 법률에 근거해 역사의 심판대에 올리기를 바란다. 나의 사부님의 결백을 되찾아 달라! 파룬따파의 결백을되찾아 달라! 박해당한 천백만 대법제자에 대해 정의, 공정함과 양심을되찾아 달라!

문장분류: 2015년 9월 1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12/3155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