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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후베이 징먼 기술 감독국 국장 리지량, 사악의 우두머리 장쩌민을 고소

[밍후이왕] 86세인 리지량(李繼亮)은 퇴직 전에는 후베이(湖北) 징먼(荊門) 기술 감독국 국장이었다. 그는 최근에 중국 최고인민검찰원에 파룬궁을 박해한 원흉 장쩌민을 고소했다.

리지량은 파룬궁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불법 노동교양, 판결을 당해 유치장, 구치소, 세뇌반에 불법 구금당한 적이 있고 또 경제적 박해를 당했다.

리지량은 고소장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후베이 징먼시 기술 감독국 퇴직 간부로 올해 86세이며 1949년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1991년에 퇴직했고 재직 기간은 42년인데, 그중 39년은 정과급(正科級)이었다. 나는 부지런하게 몇 십 년 동안 근무했다. 60년대에 ‘혁명 간부는 한 무더기의 벽돌로서 필요한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옮긴다.’는 구호가 있었다. 과거의 현에서 시로 옮겼고, 어느 직장에 문제가 많고 어느 업무에 난이도가 있으면 곧 나를 그곳으로 보냈다. 몇 십 년을 옮겨 다니다가 퇴직할 때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여러 가지 질병이 생겼다. 퇴직 후 늘 건강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예컨대 검술, 태극권, 또 몇 가지 기공을 배운 적이 있는데 모두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6년에 이르러 나는 운 좋게 파룬궁을 얻었고, 법공부, 심성 수련 그리고 연공을 해서 기적이 나타났다. 2개월도 되지 않아 전신의 각종 병 증상이 사라졌다. 심신이 건강해져 52.5kg이던 몸무게가 75kg이 되었다. 한 가지 사례만 들겠다. 1960년에 나는 청지구(曾集區)에서 근무했다. 생활상의 이유로 만성 간염에 걸렸는데, 병원에서 몇 십 년 동안 병 치료를 받아도 완쾌되지 않았다. 그런데 1996년에 파룬궁을 연마한 지 2개월도 되지 않아 병이 자취를 감췄다. 차오스(喬石)는 우리나라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면밀한 조사를 거쳐 파룬궁은 국가에 백 가지 이로운 점만 있고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듣지 않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마음을 닦고 선을 행한 일억 명이 넘는 좋은 사람에 대해 자신의 고집대로 강제적인 탄압을 진행했다.

장쩌민이 발동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999년 7월 29일, 이날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공안 부서에서는 고음 나팔을 자동차 위에 세워놓고 도시 구역, 특별히 각 연공장에서 반복적으로 양고(최고 인민법원, 최고 인민 검찰원)의 통고를 틀어놓았고, 도처에 양고의 통고를 부쳐 공포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날부터 시작해 시(市)에서는 각 부서에 상응하는 회의를 소집해 함께 파룬궁수련생을 향했다. 나의 직급이 좀 높았기에 국에서는 직접 나를 찾지 않고 둥바오(東寶) 공안분국에서 직접 나를 찾았다. 그들은 돌아가며 나를 세 번이나 찾아왔다. 첫 번째는 어느 날 오후였다. 우리 국의 쿵링윈(孔令雲) 부국장이 나를 둥바오 공안분국으로 끌고 가 그들의 회의실 안에서 나 혼자만 강단 위에 세웠다. 그리고 공안국 국장 마젠궈(馬建國, 또 그들 한 무리 사람이 있었음)는 강단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먼저 나에게 “당신은 파룬궁이 ×교임을 알고 있습니까? 지금 중앙에서 연마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는데, 당신은 오늘 명확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파룬궁은 사람에게 마음을 닦고 선을 행하도록 가르치며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데 어떻게 ×교입니까? 공법은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습니다. 나는 연공을 하여 2개월도 되지 않아 전신의 크고 작은 병들이 모두 기적처럼 사라졌는데, 내가 어찌 연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화를 내며 나를 저지해 내가 계속 발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의 사부님에 대해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당신은 나의 사부님을 욕하지 마시오. 나의 사부님은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둥바오 공안분국 가오(高) 정치 위원은 몇 사람을 끌고 우리 국 사무실로 찾아와서 나에게 태도를 밝히도록 핍박했다. 게다가 또 나에게 서면으로 입장을 밝히도록 핍박했다.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나에게 말을 하라고 하면, 나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말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쓰라고 하면 나는 파룬궁을 연마하면, 병을 없애고 건강 증진에 효과가 있다고 쓰겠습니다. 원합니까?”라고 물었다. 8~9시까지 맞서다가 그들은 떠나갔다.

세 번째는 어느 날 오후, 둥바오 공안분국에서 또 4~5명의 사람이 왔는데, 우리 국 책임자도 직접 우리 집으로 찾아 왔다. 역시 그런 식으로 나에게 태도를 밝히도록 핍박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당신들이 말한 것을 나는 해낼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난처하게 만들지 마십시오.”라고 성실하게 말했다. 우리 국의 국장 장젠(張劍)은 “할아버지가 정말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 두세요.”라고 한 마디 했다. 이렇게 되어서야 돌아가며 치근거리던 것이 끝났다.

나는 수련생에게 선을 권하는 편지를 복사해 주었는데, 중공은 나에게 3년의 판결을 내렸다. 사건은 2001년 12월에 발생했다. 둬다오(掇刀) 개발구 수련생 황자오싱(黃兆興)은 나를 찾아와서 진상 자료를 요청했다. 나는 곧 내게 있던 다른 사람이 전해준 선을 권하는 편지 한 통을 가지고 톈(田) 씨 복사부로 가서 백 여 부를 복사해 그에게 주었다. 그는 정유 공장의 노동자 스쥔성(史君勝)과 함께 배포하다가 둬다오 파출소에 붙잡혔다. 스 씨는 사양(沙洋)으로 보내져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는데 그가 나에 대해 말했다. 둥바오 공안분국 과장 비샹인(畢相銀)은 몇 명을 데리고 와 우리 집 문을 열었다. 기세등등하게 나의 방안에 들이닥쳐 샅샅이 뒤지고 철저하게 조사해 많은 대법 책을 수색해갔고, 나를 징먼 수용소로 압송해 심문했다. 매번 오후면 나를 심문할 때 강온 양책을 사용했다. 부드러운 수법은 유도 자백을 시키는 것인데, 그들은 정유 공장의 대법 수련생 량(梁) 씨에게 전화를 건 뒤 나에게 듣게 했다. 게다가 나에게 “그는 말을 한 뒤에 돌아갔습니다.”라고 말했다. 강한 수법은 눈을 부릅뜨고 책상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쥔성에게서 얻은 구두 자백(1천 여 부의 자료)에 대해 나에게 말하도록 했다. 어느 날 오후, 몇 명이 술을 마셔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 책상을 두드리며 나에게 말하도록 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1000부를 인쇄했다고 거짓 자백을 하도록 했는가? 그 후 듣기로는 상부의 규정이 있는데, 3백 부 이상이어야 판결(나는 모르고 있었음)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말한 숫자가 그들이 장악한 가짜 자백의 숫자에 도달하지 않자 비샹인은 책상을 두드리며 “당신이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만 증언하면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면 하필 나에게 거짓자백하게 할 필요가 있는지 말했다! 2002년 3월에 이르러 체포당했는데, 나는 징먼 구치소에 갇혔다. 7월에 이르러 둥바오 공안분국에서는 재판을 열어 나에게 유기징역 9년을 불법 선고했다. 나는 불복해 중급인민법원에 상소를 제출했다. 시 중급인민법원은 2002년 9월 29일에 (2002)징먼형종자제133호(荊門刑終字第133號)로 유기징역 3년으로 번복했다. 판결한 뒤 시 텔레비전방송국, 시 방송국에서 방송했다. 징먼 신문은 눈에 뛰는 위치에 게재했다. 내게 가한 시달림, 정신적인 탄압으로 나는 극히 고통스러웠다.

2002년 9월, 중급인민법원에서 판결서를 하달한 뒤, 10월에 나를 농장으로 보내려 했다. 아들딸은 공동으로 서명해 내가 감옥 외 집행을 받도록 했는데, 자기 집에서 거주하지 못한다는 한 조목의 요구가 있었다. 아이들의 집은 작아 지낼 수 없었다. 자녀들은 농촌에서 나에게 낡은 집 한 채를 사주었다. 수리한 뒤, 나와 아내는 그곳에서 거주했다. 이래도 그들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해 공개적 혹은 암암리에 늘 사람을 파견해 우리의 거주지로 와서 교란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꼬박 8년을 거주하며 시달림을 받을 대로 받았다.

2005년, 나를 억울하게 재판한 3년 형기가 만기되었다. 나는 우리 국의 책임자에게 편지 한통을 써서 그들에게 형기가 이미 만기되었는데 생활을 해야 하고 생계를 유지해야겠다고 알려주었다. 그 후 국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신청서 한 부를 쓰도록 했다. 나는 나의 월급 3천여 위안(약 55만원)을 당신들이 가져가면서 신청서를 쓴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무슨 보증을 해야 하는지, 나는 쓰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2013년에 자녀들이 내가 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을 보고 국의 책임자를 찾아갔다. 책임자는 태도를 표시하기 어렵다고 나의 자녀들에게 한 부국장과 함께 ‘610사무실’(중공이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려고 설립한 불법 조직)을 찾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2013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매달 나에게 천 위안(약 18만원)의 생활비를 주었다. 이것이 바로 장쩌민이 파룬궁에 대해 육체적으로 소멸시키고 경제적 내원을 끊는 정책이 아니겠는가!

문장발표:2015년 7월 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7/7/3120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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