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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교양으로 박해당한 우한시 유치원 교사가 장쩌민 고소

[밍후이왕] (밍후이통신원 후베이 보도) 후베이(湖北) 우한시(武漢市) 유치원교사 레이샤오윈(雷曉雲) 여사는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다가 노동교양, 강제 세뇌박해를 당했고, 노동교양소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어 생명위험에 처했었다. 지금까지도 기억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최근 레이샤오윈 여사는 박해 원흉 장쩌민을 반 인류죄, 비방죄, 혹형죄, 사기죄, 집단말살 등을 저지른 죄로 고소했다.

아래는 레이샤오윈 여사가 진술한 사실과 이유이다.

1995년 나는 산재로 한쪽 다리에 분쇄성 골절을 입었는데 즉, 뼈가 부러졌다. 그런데 하필 돌팔이 의사를 만나 접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불구가 될 위험에 처했다. 접골이 비뚤게 되었기 때문이다. 뼈가 맞지 않은 데다 깁스를 했기에 병원은 깁스를 잘라내고 다시 접골하였다. 이미 까무러칠 정도로 아팠던 나는 접골하면서 담배를 피우고 또 동시에 동료와 잡담을 나누는 의사를 더는 믿을 수 없어 스스로 해결하기로 했다. 몇 달이나 침대에서 감히 내려오지 못했고, 감히 땅을 디딜 수 없었다.

약을 써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상황에 부모님께서 기공을 떠올리셨는데, 25세인 딸을 한평생 침대에서 지내게 할 수 없었다. 많은 기공을 연마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한번은 나도 모르게 파룬궁을 만났고 시험을 해보고 싶었는데, 침대에 누운 지 곧 반년이 되던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나는 듯이 가볍고 빠르게 걷게 되었다. 이는 정말로 사람을 놀랍고도 기쁘게 했다.

사회에 들어서서 사람마다 명리를 다투었기에 나는 굉장히 곤혹스러웠고, 나 자신이 어느 길을 따라야 하는지 몰랐다. 자신의 수양에만 힘쓰면 분명 주위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물결치는 대로 표류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이는 내 심령이 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았다. 나는 자신의 정신이 때때로 분열 상태에 처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파룬궁은 오히려 나를 이 정신적 속박으로부터 구해주었다. 파룬궁 책을 통해 나는 사람이 살아감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양지(良知)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 즉, 사람의 도덕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은 양지를 배반할 어떤 이유도 없는데, 이것은 한 사람이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개인적인 사심으로 인류 최대의 억울한 사건, 대참사를 일으켰다. 1999년 나는 세 번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불법구류를 당했는데, 매번 15일간이었다. 마지막 한 번은 베이징에서 납치되어 돌아온 뒤에 스옌시(十堰市) 제1구치소에 불법감금 되었다. 10일간 등 쪽으로 수갑을 찼다. 우리는 20일 가까이 단식을 하였고 교도관은 야만적으로 소금물을 주입하였다. 2000년 3월 3일에 불법으로 노동교양 3년 처분을 받고 사양(沙洋) 노동교양소에 감금되어 박해를 당했다.

노동교양소에서 강제 전향을 시작했고, 나는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가 노동교양병원으로 보내져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당했다. 개구기로 입을 최대한 받치고 사지는 고정되어 움직일 방법이 없었다. 당시 나는 점차 질식했는데,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죽을힘을 다 해 발버둥 쳤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고 오줌을 지렸다. 그러나 병원 교도관은 나를 둘러싸고 내가 원통해하는 참혹한 광경을 감상했다. 당시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들은 개구기롤 작게 해 몇 번 숨을 쉬게 하고는 또 죽을 것 같은 고문을 시작했다.

酷刑演示:野蛮灌食

혹형시연: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음식물 주입을 하면서 그들이 내 치아를 세 개나 때려서 생으로 떨어져 나갔다. 혹독하게 두들겨 패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전기 몽둥이가 더욱 흔한 일이었다.

사양 노동교양소 병원에서 그들은 내게 강제로 황색 약물을 주사했다. 그들에게 무슨 약이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제 발 저린 듯 긴장한 태도를 보였다. 후에 내가 쇳조각을 삼켜 죽음으로 겁을 주어서야 그들은 주사 놓는 것을 중단하였다.

사양 노동교양소에서는 나의 수면 권리를 반년이나 박탈했다. 낮에는 밖에서 10여 시간 일했고, 돌아가면 쭈그려 앉기, 서 있기, 담 밑 파기를 시켰는데,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침대로 돌아가게 했다. 막 5분 잤을 때 나를 깨워 계속 박해했다. 몇 달이 지나고 나는 기억력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가장 명확한 예를 들자면, 나는 이미 발걸음을 내디딜 때 왼쪽 발을 먼저 내디뎌야 하는지 아니면 오른쪽 발을 먼저 내디뎌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바로 이렇게 바보처럼 서 있는데, 머리는 이미 내 몸을 통제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당시 직장의 과장인 첸리탸오(千裏迢)가 나를 보러 왔고, 그가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께서 바로 나에게 ‘수의’ 한 벌을 보내주셨다. 왜냐하면, 과장이 나를 본 후에 내가 며칠 못 살 거라고 단정하고는 우리 아버지에게 바로 알렸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나의 기억력은 회복되지 못했는데, 오전에 했던 일을 오후에 기억하지 못한다.

우한 반차오(板橋)세뇌반에서 그들은 음식물 주입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호스는 병원 것보다 더 굵었다. 게다가 음식물에 약을 넣었고, 밤새 서 있게 하고 잠을 못 자게 했다. 낮에도 계속 서 있었는데, 내가 이미 서 있을 수 없는 것을 알고도 계속 서 있게 했다. 우한 세뇌반 불량 관리들은 불법으로 공갈협박 하여 우리 집에서 2만 여 위안을 강탈했다.

문장발표: 2015년 7월 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7/8/3121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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