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장셴룽(張先龍)은 원래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농지개간총국 하오량하 화학비료공장(浩良河化肥廠)의 초등학교 교사로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여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맡은 바 일을 책임지는 성실한 교사였다. 그는 중국공산당(이하 중공) 장쩌민(江澤民) 집단이 1999년 7월 파룬궁(法輪功)을 박해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계속 대법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1년 6개월의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을 당했으며, 그 후 또 3년형의 불법적인 법원판결을 받기도 했다.중공사당(邪黨)의 악인들이 장기간 그를 교란, 미행, 공갈협박 등 온갖 박해를 가해 이를 피하기 위해 2014년 8월 26일 밤에 집을 떠났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은 그의 행방을 수소문 끝에 2014년 9월 9일 하오량하 난다하(南大河) 하류에서 그의시신을 찾았다. 그는 당시 44세였다. 연로한 장셴룽의 부모는 젊은 아들을 먼저 보내고 그가 걸었던 시골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장셴룽(張先龍)
장셴룽이 억울한 옥살이와 박해를 당하는 몇 해 사이 그의 가족들이 감당한 고통과 피해는너무도 커서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극한상황이었다. 매년 설 명절이면 부모의 심정은더욱 아프고 무거웠다. ‘아들이 감옥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걱정이 매우 컸다. 다른 집은 기쁨이 넘치는 단란한 설을 보냈지만, 장셴룽의 부모와 가족들은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으로 슬픔 속에서 설을 보내야 했다. 경찰이 죄 없는 아들을 납치해가는 모습을 뻔히 눈을 뜨고 보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친은 홀로 벽에 기대어 목 놓아 통곡했다! 특히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는 이유로 아들이 악경(사악한 경찰)에게 잡혀가 충격은 더욱 컸으므로 부모는 일 년 내내 슬픔의 눈물로 세월을 보냈지만, 한편두려운 맘으로 흠칫흠칫 놀라는 상태가 되어 어떤 조그마한 일이 발생해도 온 가족은 모두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연로한 부모는 “놀라 죽겠다!”는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1. 파룬따파를 수련한 뒤의 변화
장셴룽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후 심령이 정화되고 도덕이 고상해 졌으므로 명리를 담담히 여기며 몸도 점점 좋아졌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다른 사람을 고려하게 되었으며, 마음가짐은 늘 낙관적이었다. 그러므로 교사로 근무할 때는 맡은바 책임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세심한 배려와 인내심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도 했다. 과외시간을 이용해 기초가 부실한 학생을 과목별로 지도해줬지만 대가는 바라지 않았는데. 학부모가 감사의 표시로 전달하는 선물도 모두 받지 않았다. 또 자기가 맡은 학과목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발전시켜그 방면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면을 보였으므로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매우 큰 호평을 받았으며, 공개수업을 통해 수차례나 1등 평가를 받았다.
대법이 장셴룽을 크게 변화시켜 그에게 인생의 의의를 깊이 깨닫게 했던 것이다. 대법은 사람에게 마음을 닦아 선을 행하게 하고, 지극히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침으로써 개인 이익에서 다투지 않고 빼앗지 않으며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하는 좋은 사람, 더욱 좋은 사람으로 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파룬따파는 이미 전 세계 140여개 국가와지역에 홍전 되어 각광을 받고 있는데, 각계로부터 받은 표창과 지지결의안, 감사편지 등이3천여 개에 달한다. 파룬따파 저작 ‘전법륜(轉法輪)’은 30여 어종의 문자로 번역되어 세계각지에서 발행되고 있으며, 파룬따파는 사회에 복과 이로움을 줌으로써 전 세계 각 국민과민족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셴룽은 대법수련 중에서 직접체험한 것들을 주변의 가족친지 동료들에게 “파룬따파는 불법(佛法)으로 사람을 구도한다.”는 것을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대법진상을 깨달은 사람은 모두 도태에서 면할 수 있으며 영원히 아름다운 미래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2. 1년 6개월의 노동교양소와 3년의 감옥살이
전 중공의 괴수 장쩌민은 1999년 7월 파룬궁을 수련하는 단체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하라.”는 말살정책의 지령을 하달했다. 하오량허진 화학비료공장 파출소의 사복경찰관은 늘 은밀하게 장셴룽을 감시하면서 심지어 목욕탕에 가는 것까지 미행했다. 그리고 늘 장셴룽의 근무지 학교 문밖에서 감시했다. 결국 장센룽은 잇달아노동교양소에서 1년 6개월, 감옥에서 3년 간 혹독한 감금박해를 당했다.
2000년 12월 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의 표어를 붙였다는 이유로, 자택에서 하오량하 화학비료공장 파출소 악경에게 납치되어 “연공을 하지 않는다.”는각서를 쓰라는 핍박을 받았고, 그 후 난차구(南岔區) 공안분국에 이첩되어 이춘(伊春)으로이송된 뒤 1년 6개월의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는데, 그 기간 동안 학교로부터 월급을 전액 삭감 당했다.
2004년 12월 초 다시 난차 ‘610’ 두목 왕위후이(王宇輝)에 의해 학교에서 납치돼 난차 공안국 구치소에 감금됐는데 그곳에서 “어느 파룬궁수련생이 어떻게 표어를 칠했는지” 말하라고 강요했으나 듣지 않자, 곧바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난차구 법원에서 불법적인 재판 개정당시, 재판장 마오리링(茅麗玲)은 “다만 유죄에 대한 변론을 할 수 있을 뿐, 무죄를 전제로 한 변론은 할 수 없다.”며 선임된 변호사가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하지 못하도록 차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법정 당사자인 장셴룽에게 죄수복을 입혀 수갑을 채운 채 일제의 진술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당사자 스스로의 변론을 위한 진술권마저 박탈했다. 그런 불법적인 재판에서 장셴룽은 3년형을 선고받고 무장경찰에 의해 자무쓰(佳木斯) 감옥으로 압송돼 박해를 당했다.
감옥 안의 실태는 참으로 열악했는데 무더운 여름에도 60여 명의 수인들이 바닥에 널빤지를 깐 비좁은 공간에 비집고 앉아야 했으며 한번 앉으면 하루 종일 앉았다. 그런 다음 이쑤시개 고르는 노역에 투입됐는데 새벽 4시경부터 오후 10시까지 작업을 시키면서 조는 사람을 또 다른 죄수가 감시하게 했다. 또 교도관은 금화를 바꾸는 컴퓨터 게임도박을 즐기면서강제로 장셴룽에게 그 게임에 참가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매일 하달된 임무는 완수해야했다.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중대 교도관이 “반드시 맡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며위협했다. 이런 박해 방식은 극히 은폐된 것이다. 그러므로 심신에 가해진 고통과 상처는매우 잔혹했다. 그것은 사람이 정상적으로 생활해야하는 정도를 심각하게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롄장커우(蓮江口)감옥으로 이송돼 혹독한 고문박해를 당했다.
3. 15년 동안 지속된 박해는 그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다
2007년 12월 9일, 장센룽은 3년형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만기 출소했다. 출소할 때는 강제로 한차례 채혈을 한 후 나왔다. 그는 롄장커우 감옥에서 돌아왔으나, 직장으로부터 해고되었기 때문에 생활수단이 없었으므로 부모에게 의지해 생활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다가 2010년 10월 하오량하 화학비료공장에서 노동자모집을 하여 장셴룽은 수석 합격하여 노동자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런대로 안정된 직업이 생겨 가족들과 함께 그동안 입었던 심신의 상처를 잊으면서 큰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의 공안국 ‘610’은 직장의 중공서기 등에게 사람을 붙여 그를 감시하도록 하여 다시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셴룽은 파룬따파를 수련하면서 얻은 이로움과 가르침으로 온갖 핍박과 시달림을경험했기 때문에, 오직 대법을 굳게 믿고 근무에 열중하면서 또 고향주민들에게 파룬궁진상을 알리는 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라디오, TV 방송에서 선전한 것은 모두파룬궁을 모함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날조한 것이다.”라고 알려주며, 빨리 진상을 요해하도록 했다. “종공이 거짓말선전을 하는 목적은 세인을 속이는 것인데 맨 마지막에는 그것(중공)을 위해 순장품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알려주었다. 역사상에서 언제나 바른믿음에 대한 박해는 모두 천벌을 받았다. 예컨대 2천 년 전에 강대한 로마제국은 예수와 그의 신자들을 박해했기 때문에 하늘이 내린 4차례 역병으로 무수한 사람이 죽었으며, 그렇게 강대했던 로마제국도 천벌로 멸망하고 말았다. 장셴룽은 고향의 주민들이 되도록 빨리 박해자 중공의 조직과 그 관계에서 벗어나도록 독려했다. 그래야만이 천벌을 멀리할 수 있고 재난을 멀리할 수 있으며, 그것의 순장품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는 삼퇴, 즉 탈당, 탈단, 탈대로 목숨을 유지하고 평안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2014년 8월 26일 정오 12시가 넘어서 장셴룽이 자전거를 타고 신젠촌(新建村) 인근에서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중이었다. 막 말을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이 오더니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들 두 사람은 잠복감시를 하는 경찰관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장셴룽은 산을 넘어 숱한 고생을 하며 달렸다. 바짓가랑이와 신발은 전부 푹 젖었는데 신발 안에는 검은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다. 대략 오후 4시가 넘어서 겨우 하오량허 화확비료공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부모님이 보고 놀랄까봐 친구의 집으로 가서 친구의 옷과 바지로 갈아입고 새 양말로 갈아 신고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났으나 금방이라도 경찰관이 들이닥칠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련생을 찾아가 교류하기로 했다. 수련생과 대화를 하는 사이 옆방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 목소리 주인공이 직장인 화학비료공장의 610 소속 모모가 옆방에서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미행 감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를 체포하려는 것이다!’라고 생각됐고, ‘즉시 이곳을 빨리 떠나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계속되는 극도의 공포와 압력 속에서 생활해온 장셴룽은 다시 악경에게 잡혀 거듭 박해를당하게 되면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는 ‘그것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집을 떠났다. 저녁 9시가 넘은 밤에 살며시 문을 열고 뒷산 방향으로 뛰어갔는데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가족이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을 해서 마침내 2014년 9월 9일 하오량하 난다허 하류에서 장셴룽의 시신을 찾아낸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44세였다. 그의 사망원인은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데, 하나는어두운 밤 산길로 피신하다가 실족했을 수 있고, 둘째는 하오량하 다리를 지나다가 납치하려는 경찰관을 만나게 되어 몸을 피하려다가 황망 중에 발을 헛디뎌 강물 속으로 추락했을 수도 있다. 예전에도 어떤 사람이 이 다리에서 실족해 떨어진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가자살했다고 추측하기도 했으나,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 자살을 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장셴룽은 대법을 통해 이미 그 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셴룽은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했으므로 시시각각 엄격하게 자신을 대법에 맞도록 요구했다. 살생을 하지 않고 사람을 착하게 대했으며,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타인을 더욱 착하고 관대하게대했던 것이다.
타살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상황이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중공 장쩌민 깡패집단이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박해를 가하는 바람에 그의 고귀한 생명과 평화로운 생활을 앗아갔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박해가 그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그의 부모 등 가족에게도 영원한 아픔과 비애를 조성해 준 것이다. 연로한 그의 부모는 효성스러운 아들과 만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기를 얼마나 고대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사리가 밝고 착했던 아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예로부터 바르지 못한 것은 바른 것을 이길 수 없고, 선악에는 반드시 상응한 인과응보가뒤따른다고 했다. 좋은 사람을 박해하고 선량함을 박해한 중공의 그것들, 올바른 믿음을 탄압한 사악의 종말에는 그들의 사악한 진상이 하나하나 밝혀져, 정의와 진리 앞에서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해체되어 소멸될 것이다. 이는 천리인 것이다. 하오량하 고향의 선량한 주민과 세상에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진선인(眞善忍)’의 법광(法光)에 흠뻑 젖어 아름답고 행복한 미래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1월 2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28/3037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