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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웨이팡 천빙난 3년형의 불법 판결을 당하다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산둥 보도) 2014년 7월 3일, 산둥(山東) 웨이팡시(濰坊市) 파룬궁(法輪功)수련생 천빙난(陳炳囡)은 웨이팡(濰坊) 경찰관에게 납치됐다. 당시 그녀의 모친 위구이팡(於桂芳), 남편 양펑(楊峰), 시어머니 펑즈훙(馮志宏) 그리고 친구 리징(李靜) 등도 함께 납치됐다. 천빙난은 웨이팡시 쿠이원구(奎文區) 법원의 두 차례 재판을 거쳐 2015년 1월 13일 3년형을 선고받았다.

파룬궁수련생 5명이 납치되다

2014년 7월 2일, 천빙난의 모친 위구이팡(於桂芳)은 지난시(濟南市)로 가서 사위 양펑(楊峰, 천빙난의 남편)을 도와 컴퓨터와 보드판을 마련한바 있다. 그런데 지난시 파룬궁수련생 리징(李靜)이 자택에서 지난 경찰관에게 납치당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같은 날 양펑과 양펑의 모친 펑즈훙(馮志宏) 역시 지난의 셋집 자택에서 지난시 톈차오(天橋) 분국 황젠(黃健) 등의 경찰관에게 납치됐고, 연이어 다음날인 7월 3일 천빙난도 웨이팡시에서 경찰관에게 납치됐다.

납치당한 파룬궁수련생의 현재 상태

2014년 7월 2일과 3일 각각 납치당한 파룬궁수련생 중 현재 천빙난은 3년형의 판결을 받았으나, 위구이팡, 양펑, 리징 등은 현재까지 여전히 그대로 불법 감금상태에 있다. 소식에 따르면, 위구이팡은 납치 감금 되어 고문 박해를 당하던 중에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었을 뿐만아니라 심각한 고혈압과 심근경색증으로 생명이 위급한 상태에 처해 있다.

선량한 일가족

천빙난(45세)은 웨이팡시 건설은행 회계직원으로 직장상사와 동료들의 대단한 호평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과부로 수절한 농촌사람으로 별다른 수입원이 없었으므로 천빙난이 줄곧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시어머니를 선하게 대하며 극진히 부양했으므로 시어머니는 조금도 불편함을 모르는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런 정황은 현대 중국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양펑(올해 45)은 고향이 산둥 더저우(德州) 지허현(齊河縣)으로 산둥 웨이팡(濰坊) 정보공정학원을 졸업한 후 본교에 배치돼 교직원으로 근무했다. 그는 겸허하고 착할 뿐만아니라 우 우수한 교사로 평가돼 상사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가 동료와 함께 집필한 교재는 줄곧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바쁜 업무시간 중에서도 석사학위를 획득하기도 했다. 그는 1998년 웨이팡시 건설은행에 근무하는 우수한 사원이며 파룬궁수련생인 천빙난과 결혼했다.

위구이팡(68세)은 퇴직하기 전 웨이팡시 법제국 부국장 직위에 있었다. 그는 업무능력이 뛰어났을 뿐만아니라 다재다능했다. 그녀가 부는 휘파람소리는 은은하고 구성져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기도 했지만 또 글씨를 잘 쓰기도 했다. 그녀는 이미 20세 때 한 국영기업체의 공장장이었다. 그녀는 60년 산둥성 여성민병의 ‘특등 사격수’, ‘수영선수’로 선발되어 산둥성 민병초병대회에 출전해 우승하여 방송보도가 되어 전 웨이팡시에서는 ‘다섯 송이 금화’ 중 한 사람이라는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일가족은 진선인(真善忍)의 대법을 수련해 서로 배려하며 자상하게 대하는 행복한 한 가정의 구성원이었지만, 그 가족은 10여 년 동안 중공의 박해를 당했다.

1. 위구이팡과 딸이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하다

2008년 7월 9일 이른 새벽, 위구이팡은 딸 천빙난의 집에 함께 있다가, 모녀는 함께 웨이팡 경찰관에게 야만적인 납치를 당했다. 천빙난의 아버지 천마오린(陳茂林)은 마침 딸 천빙난의 집에 밥을 전해주려고 갔다가, 악독한 경찰관에게 야만적인 폭력을 당해 그 충격으로 땅에 쓰러져 기절하여 병원으로 후송됐다.

위구이팡, 천빙난은 불법적인 1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위구이팡은 혈압이 매우 높았으므로 노동교양소에서는 신병인수를 거부했다. 그녀는 되돌려진 후 병원에 감금되어 24시간 감시박해를 당했다. 천빙난은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당하다가 만기출소 후 집으로 돌아왔으나, 출소 1개월 뒤 악경(사악한 경찰관)에게 다시 납치되어 웨이팡시 세뇌반에 감금된 후 다른 파룬궁수련생의 인적사항을 말하라는 강요와 핍박을 당했다.

2. 양펑이 핍박에 못 이겨 10여 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다

양펑은 파룬궁을 수련한 것 때문에 불법적으로 공직에서 해고당해, 할 수 없이 2001년 초 외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2003년 8월 5일 짐을 들고 지난시 산다로(山大路)를 보행 중에 지난시 ‘610’의 사복경찰관에게 납치된바 있고, 또 그 후 악경에게 납치돼 웨이팡시 ‘610’ 세뇌반에 감금됐다. 납치된 지 사흘째 되던 날 모친 펑즈훙(수련하지 않음)이 양펑에게 세면도구를 전하려고 세뇌반에 갔을 때, 푸진빈(傅進賓) 등 악도들은 양펑의 모친을 인질로 삼기 위해 구류처분으로 감금한 뒤 ‘양펑에게 믿음을 포기시키도록 하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모친은 악도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집에 혼자 남아 있는 3세의 어린 손녀(양펑의 딸 솽솽)를 돌봐야 하니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공악도들은 그런 것에는 상관도 하지 않은 채 계속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잠시 집에 돌아가 손녀딸을 건사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는데도 역시 악도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양펑은 2003년 8월 28일 웨이팡시 세뇌반의 높은 담장을 벗어난 후 더는 중공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장기간 외지 셋집에 거주하며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의 모친 펑즈훙은 9월 11일까지 불법적인 감금을 당한 후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 부친 천마오린이 박해로 사망

천빙난의 부친 천마오린(陳茂林)은 웨이팡 공상국 직원이었지만 온몸에 병이라 1년 내내 심장병, 고혈압 등으로 고생했었다. 병원과 한의원은 물론 좋다는 민간요법까지 모두 처방을 받아봤지만 효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점점 심각해졌다. 온종일 비실비실하며 기운을 차릴 수 없었는데 몇 해 살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상태가 심각해지면 병원에 입원해야했는데 해마다 두어 차례씩 입원을 했었으며, 그 증 두 번은 생명이 위급하다는 병원 통지를 받기도 했다.

그랬던 천마오린은 1997년 파룬궁을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몸의 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주 건강하게 변했다. 이는 국가의 의료비를 크게 절약한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파룬궁수련은 사람을 성실하고 착하도록 변하게 하였으므로 너그러운 사람으로 변해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직장에서는 성실하게 근무를 더욱 잘했다. 원래 신이 존재함을 믿지 않았던 위구이팡은 이처럼 남편의 변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어, 그녀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천마오린은 중공으로부터 10여 년 동안 잔혹한 박해를 받다가 2012년 경 봄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중공은 그를 불법체포하기 위해 사복경찰관은 병원에 파견하여 잠복감시를 하면서, 친지들이 병문안을 가게 되면 그것들은 은밀히 에워싸며 공안국신분증을 보이면서 납치를 시도하기도 했다.

4. 할머니와 손자가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다

천빙난의 딸 솽솽爽爽)은 올해 15세로 태어나서 이날까지 편안한 날을 보낸 적이 없다. 바로 중공의 박해 중에서 보냈던 것이다. 그가 8세였던 2008년 6월, 솽솽이가 꿈나라에 있을 때 바로 한바탕 중공의 공갈 협박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어머니, 외할머니가 잇따라 함께 악독한 악도들에게 납치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 천빙구에게는 불법적인 법원의 판결이 내려졌고, 외할아버지는 중공의 박해로 인 충격으로 사망했다. 단지 할머니와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문장발표: 2015년 1월 2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 //www.minghui.org/mh/articles/2015/1/22/3034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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