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쓰촨보도) 2014년 10월 31일 오전 9시, 쓰촨(四川)성 루저우(瀘州) 장양구(江陽區) 법원은 루저우 나시(納溪) 안푸차오(安富橋) 구치소 내에서 불법 감금된 지 6개월이 넘는 파룬궁수련생 자오룽구이(趙榮桂, 의사)에 대해 불법 재판을 열었다. 중국공산당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에서는 명령을 내려 자오룽구이의 변호사가 현장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직계 가족인 자오룽구이의 남편에게 방청을 위해 결혼증명서, 호구부, 신분증 세 가지 증명서를 요구했다. 도로에는 검문소를 세워 방청증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경찰, 사복 경찰, 각지 지역사회 인원은 민중을 가로막아 구치소 밖에 있게 했다.
주변 농가에서는 말했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상쩍게 구치소로 와서 재판을 하다니?…… 사람을 못살게 굴려면 남몰래 재판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 소굴의 행위입니다” 한 택시 기사는 말했다. “구치소에서 재판이라고요? 틀림없이 떳떳하지 못하며 음모가 있습니다.”
일부 당직 근무 경찰, 지역사회 인원, 사복 경찰 인원이 구치소 밖 큰길 위에 검문소를 설치해 재판 방청을 저지하고 있다.
이 이른바 ‘개정’에는 변호사도 없고 가족이 없었으며 민중 한 사람도 참여하지 못해 재판 내막은 아무도 몰랐다.
1. 좋은 사람 박해 당하고, 선과 악이 전도되다
자오룽구이(50여 세)는 존경받는 좋은 의사로 예전에 군 의료기관에서 일했다. 그녀가 근무하는 진료소에 들어서면 그녀가 늘 근무 환경을 질서 정연하고 깨끗하게 챙기는 것이 보였다. 각종 약품, 기구를 둔 것도 가지런했고 환자에 대해서도 편안하고 친절했으며 중약, 양약 처방을 내주고, 주사 맞히기, 링거 주사, 약을 나눠주며 약을 헤아리고 약을 달이는 능력이 전면적이었고 조직적이었고 질서정연했다. 그리고 비용 계산, 수금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아 경제적으로 한 푼도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풍모는 사장의 신임을 얻었고 환자들의 감탄을 받아 남녀노소 환자들은 모두 그녀를 가까이 했다.
자오룽구이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해 ‘진선인(眞善忍)’을 믿어 열심히 근무하고 사람됨이 성실하고 도덕이 고상했는데 사람에 대해 사회에 대해 백 가지 좋은 점만 있고 한 가지 나쁜 점도 없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걸핏하면 감옥에 갇혀 감옥살이를 했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 매우 분명하지 않은가?
2014년 4월 22일, 자오룽구이가 재차 납치돼 불법 감금된 지 이미 6개월이 넘는다. 그의 남편은 장양구 공안국을 찾아가서 석방을 요구하며 공안국장 천(陳)씨에게 “파룬궁은 훔치고 빼앗고 속이지도 않았으며, 또 방탕한 생활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사교’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안국장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남편은 국가보안을 찾아가 그들이 구타로 함부로 자백하게 하고 함부로 죄명을 씌우며 불법적으로 괴롭히며 납치하는 등이 위법임을 지적했다. 국가보안대대 대대장 업무 담당자 판젠핑(樊建平)은 스스로도 박해가 이치에 어긋남을 알고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야만적으로 손찌검을 하며 그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그리고는 “당신이 불만이 있으면 변호사를 찾으시오. 중국의 변호사가 안 되면 국제 변호사를 찾으시오”라고 말했다.
자오룽구이가 거주한 지역사회는 루저우시 장양구 지녠뱌오(紀念標) 지역사회였다. 이 지역 사회의 군중 공작사무실의 직원 장루이훙(張瑞紅)은 창예공장(長液廠)을 퇴직한 사람으로 그녀는 불법 자료를 꾸며 상부에 보고해 자오룽구이를 박해했다. 자오룽구이를 감옥에 밀어넣고 불법 감금하고 무고한 판결을 내림에 그녀는 첫 번째 책임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다. 그녀 남편 차오장은 장양구 국가보안대대의 부대대장으로 자오룽구이를 박해한 업무 담당자다. 부부는 모두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 패가 되어 위아래에서 결탁해 죄를 저질렀다.
2. 가짜 ‘재판’을 꾸미다
2014년 10월 31일, 루저우 장양구 법원은 법정을 구치소에 설치해 불법 감금된 지 6개월 된 자오룽구이에 대해 재판을 열었다. 아침 9시, 구치소로 통하는 길목 위에 검문소를 설치했다. 출입 차량은 모두 증명서를 보여야 지나갈 수 있었다. 길목에는 몇 대의 승용차를 정차해 놓았는데 소방차 한대와 운동 교습차가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경찰차는 구치소에서 드나들었다. 경찰 몇 명은 검문소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고 10~20명의 사복 경찰과 남녀 지역사회 인원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 비정상적인 현상을 보고 주변의 한 농가에서는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상쩍게 어제부터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파룬궁 사건을 심리한다는 말을 듣자 그들은 놀라며 “파룬궁을 재판하는데 구치소로 와서 합니까?”라고 말했다. 다른 한 농가는 “사실 파룬궁은 좋습니다. 이렇게 괴롭힐 필요가 없죠. 사람을 못살게 굴려면 남몰래 재판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 소굴의 행위입니다”라고 말했다.
남편이 위탁한 변호사는 이 사건에 개입해 자오룽구이와 몇 차례 면회한 적이 있다. 변호사는 자오룽구이가 자백하지 않고 태도가 아주 고집스러워 변호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변호사는 자우룽구이의 가족에게 재판을 연다는 소식을 통지했다. 또 가족에게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가 현장에 변호사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오룽구이의 남편은 재판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결혼증명서, 호구부, 신분증 세 가지 증명서를 지녀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결혼해 30년이 되는데 수차례 가택수색을 당해 어디에서 결혼증명서를 찾겠는가? 자오룽구이의 남편은 재판에 참가하지 못했다.
자오룽구이의 재판에 관심이 있어서 온 방청 민중이 접근하면 검문소에서는 바로 가로막았다. 한 칠순 노인이 검문소에 다가가자 당직자는 “뭘 하러 왔습니까?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들어가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노인이 찾아온 뜻을 설명하자 당직 직원은 구실을 찾아 방청증을 요구하며 노인을 가로막았다.
재판 공고를 붙이지 않았고 또 사람들에게 통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공개 재판에 방청증이 필요하다는 조례 규정을 보지 못했다. 이 국민들은 그때가 되어 어디에 가서 방청증을 요구하겠는가? 이전에 법원 측은 파룬궁수련생 재판에 참가한 방청객에게 신분증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방청증으로 고쳤다. 방청증 요구는 음모였다. 방청증을 구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법원 측은 각종 이유로 방청증을 거부할 수 있었다.
대략 20~30명이 검문소에 접근해 들어가 재판에 참여하려 했다. 일부 지역사회 인원, 사복 경찰은 상황을 보더니 곧 에워싸며 “당신들이 이곳으로 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돌아가시오. 당신들은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큰 비가 오고 연세도 많은데 돌아가시오.”라고 말했다.
대략 오전 11시에 법정 심리가 끝났다. 자오룽구이에 대한 이른바 ‘재판’에는 방청객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얼마나 불법적인 재판을 진행하고 모함했는지 아는 사람이 없고 목격한 사람도 없다.
확실히 그 농부와 택시 기사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불법적인 재판을 연 것이며 음모가 있다. 공개 재판에 방청을 허락하지 않았고 변호사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직계 가족은 증명서 제한을 받았다. 검문소를 세워 법을 집행하고 계엄령을 내리며 공포를 조성했는데 이것은 바로 세상 사람의 이목을 가려 가짜 재판을 꾸민 것이 아닌가? 매일 중국공산당의 언론 매체는 그럴싸한 말로 ‘헌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부르짖었으나 정법위가 조종한 공검법사(공안, 검찰, 법원, 사법)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죄를 저질렀는데 백주대낮에 법률 시행과 사법 제도를 파괴했다.
파룬궁수련생은 들어가서 방청할 수 없자 가로막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한 사람이 자오위안(招遠)에서 살인한 일을 묻자 파룬궁수련생은 그에게 그것은 파룬궁과 관계가 없다고 알려주었다. 파룬궁은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므로 절대 그런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또 천안문 분신자살 가짜사건이 가짜임을 이해하지 못해 정말로 그 사건을 믿으며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파룬궁수련생은 곧 그에게 “당신이 생각해 보세요.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찰이 소화기를 메고 천안문에서 순찰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불을 붙인지 1분 사이에 몇 십 명이 소화기로 그 불을 껐는데 그 소화기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라고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천안문 분신자살 가짜사건을 만든 천멍(陳虻), 이 가짜사건을 방송 보도한 뤄징(羅京)마저 업보를 당해 사망했고, 이 가짜사건을 만든 610 두목 리둥성(李東生)도 낙마했음을 알려주며 그들에게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했다.
대략 11시경, 협박당해 파룬궁 박해에 참여한 지역사회 인원은 “재판이 끝났습니다. 돌아갑시다. 당신들이 가지 않으면 우리도 가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방청객을 가로막는데 참여한 일부 사복 경찰과 지역사회 인원
3. 여러 차례 납치, 감금당하다
자오룽구이는 1979년에 전문적으로 루저우 액체 압력 부속품 공장 의무실에서 근무했는데 파룬궁수련을 견지해 여러 차례 납치, 불법 감금 박해를 당했다.
1999년 7월 20일, 그것은 사악하고 공포적인 날이다. 중국공산당 사당(邪黨)의 장쩌민 집단은 파룬궁 수련 단체에 대한 한 차례 전무후무한 유혈 박해를 발동했다. 당시 자오룽구이는 현지 파룬궁 수련 단체에서 연락인, 보도원 일로 봉사하면서 다른 사람이 대법을 얻고 수련하는 것을 사심 없이 도와주면서도 한 푼의 대가도 받지 않았다.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얻고 정신적으로 승화되게 했다.
박해가 시작되자 그 천지를 뒤엎을 듯한 사악한 형세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오룽구이는 중점 인물로 붙잡혔으며 단독 격리돼 심사를 받았다. 감방 안에서 텔레비전으로 무고한 파룬궁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사악한 거짓말을 재방송하며, 하루 24시간 수감자들에게 폭격식 세뇌를 가했다. 정부 각 부서에서는 연합해 압력을 가했고 신문 매체는 사악을 도와 취재, 녹화, 선전하며 강대한 공세를 조성해 자오룽구이에게 수련을 포기하고, 파룬궁과 결렬한다는 태도를 표시하도록 핍박했다. 한 일반 민중이 갑자기 닥쳐온 국가, 정부의 강대한 압력을 감당하고 저지해야 했는데 영혼에서 육체에 이르기까지 당한 극심한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시 불법 감금당한 시간은 일주일인데 이것은 심상치 않은 일주일이었다.
2001년 몹시 더운 여름날, 자오룽구이는 집에서 갑자기 장양구 국가보안, 610(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 조직)에게 납치돼 루저우 싼화산(三華山) 구치소에 감금됐다. 이어서 또 첸차오(茜草) 세뇌반에 갇혀 계속 ‘전향(수련 포기)’을 강요하는 세뇌 박해를 당했다. 첸차오 세뇌반에서는 대략 10~20명의 불법 감금된 파룬궁수련생들이 박해를 반대하고 세뇌를 저지해 루저우시 국가보안과 610을 놀라게 했다. 자오룽구이는 단독으로 끌려갔는데 한 동안 실종됐다. 남편과 아이는 첸차오로 면회하러 왔으나 그녀를 만나지 못했고 그제야 자오룽구이가 비밀리에 이송됐음을 알게 됐다.
그 후 자오룽구이가 허장(合江) 구치소, 싼화산 구치소로 전전해 감금됐음을 알게 됐다. 그녀는 각 부서에 호소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그의 가족은 일을 내려놓고 여러 차례 장양구 공안국장에게 석방을 요구했다. 감금 9개월 째 자오룽구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자오룽구이가 세 번째로 감금된 것이다. 이전 두 번째 감금은 1개월이었다. 2014년 4월 22일, 자오룽구이는 혼자 집에 있었는데 네 번째로 납치됐다. 6개월 동안 불법 감금당한 후, 10월 31일에 나시(納溪) 구치소에서 불법 재판을 당했다.
4. 박해로 가정 상황 어려워져
2000년에 국유자산이 사라지자 자오룽구이가 근무하던 국영기업이 해체되고 두 부부는 모두 실업자가 됐다. 두 사람은 근무 연한을 합하면 50여 년이 됐는데, 50여 년 근무 연한을 고작 3만 여 위안(한화 약 535만원)의 돈으로 보상받았다. 두 부부는 부득이 여러 곳에서 일을 해 생계를 유지하며 아이를 부양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일을 하며 집안을 부양했지만 자오룽구이가 매번 불법 감금당하면 남편은 부득이 근무를 내려놓고 외지에서 서둘러 돌아와 아이를 돌보고 사방을 뛰어다니며 아내를 구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집 문이 열려 있고 집안은 텅 비어 있었으며, 땅바닥 위에는 구류증 한 장이 있었고 아이도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그는 온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또 외지로 일하러 갈 수 없었다.
사악한 박해는 자오룽구이의 본래 어렵던 가정을 설상가상으로 만들었다. 한 번은 자오룽구이는 감옥에서 나와 줄곧 국가보안 특무에게 미행, 감시를 당했으며 몰래 사진이 찍혔다. 한 개인 진료소에서 어렵게 직업을 찾았는데 ‘610’은 사장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사장은 부득이 자오룽구이를 해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오룽구이는 예전에 사람들에게 커튼을 판 적이 있었다. 어렵게 일하는 과정에서 자오룽구이는 어떤 때는 12시간 이상 일을 했는데 또 주말 휴가도 없었다. 아이는 대학에서 여러 차례 중퇴할 위기를 겪었다. 어느 한 번은 아버지가 외지에서 일해 모은 돈을 모았다가 학비로 냈고 어떤 때는 자오 씨의 자매가 도와주어 난관을 지났는데 아이는 쉽지 않게 대학공부를 마쳤다.
작년에 자오룽구이의 남편은 큰 병에 걸려 거의 죽음의 문턱에서 몸부림치다 돌아왔다. 체력과 기력이 예전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장기간 생활이 어려웠던 이유로 의료보험을 신청할 돈이 없게 되어 한 차례 큰 병으로 딸이 근무해 막 모은 약간의 저축을 몽땅 써버렸다. 지금까지 그들은 집안 빚을 아직도 다 갚지 못했다. 올해 4~5월, 자오룽구이의 남편은 병든 몸을 이끌고 재차 지역사회, 공안국으로 분주히 뛰어다니며 지역사회 사람들에게 무슨 이유로 사람을 붙잡았는지 묻고 국가보안을 찾아가 석방과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다……세 식구의 가정은 산산이 조각이 났고 온갖 방법을 다 해 가족을 구하려고 마음을 졸였다.
루저우시 정법위, 공겁법(공안, 검찰, 법원), 국가보안, 610이 적극적으로 이번 사악한 박해에 참여해 이 평범한 가정에 재난을 가져다주었는데 파룬궁수련생 가족들에게 조성한 고통을 한 마디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문장발표: 2014년 11월 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1/4/2998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