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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교사 왕런궈 3년 6개월 불법 판결 당해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 보도) 2014년 9월 초, 다롄 파룬궁수련생 왕런궈(王仁國)의 아내는 남편과 가깝게 지내는 동료에게 학교로 돈을 가지러 가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만난 후 매우 난처해 하며 그녀에게 “왕런궈는 학교에 의해 해고당했는데, 8월에 학교 내부망(內部網)에 발표됐습니다. 왜냐하면, 왕런궈는 이미 판결을 당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王仁国
왕런궈(王仁國)

왕런궈의 아내는 학교를 찾아가 교장에게 “얼마나 판결했어요? 저는 왜 모르고 있었죠?”라고 물었다. 교장은 그녀에게 “3년 6개월을 판결했습니다. 판결문 위에 이 판결은 2014년 4월 14일부터 효력이 발생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한 부를 받았는데, 당신들 가족도 한 부를 받아야 함이 마땅합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아내는 멍해졌다. 재판 날에 이미 판결이 내려졌는데 가족은 여전히 여태껏 오리무중에 빠져 있었다.

왕런궈의 가족은 여러 차례 판사 리볜장(李邊疆)에게 판결 결과를 문의했지만, 그는 모두 얼버무리며 지나갔다. 그러기에 가족이 구치소로 가서 옷을 갖다 주러 갔을 때 구치소 측은 왕런궈가 이미 6월 12일에 구치소를 떠나 랴오난(遼南) 신루젠(新入監) 감옥으로 옮겨졌다고 알려주었다. 이 일을 처음 겪는 가족은 또 장소를 바꿔 수감하는 줄로 여겼는데 이미 형기를 판결한 것도 몰랐고 판결을 집행했음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가족들이 전전해 랴오난 신루젠 감옥을 찾았을 때 왕런궈는 이미 또 옮겨졌다. “어디로 옮겼습니까?”라고 묻자 감옥측은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가 전화를 기다리시오. 그쪽에서 통지를 내릴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고 수많은 잠 못 드는 밤을 보냈으나 가족은 그의 행방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공직에서 해고당했다는 악독한 소식을 듣게 되어 이미 불행하던 가정에 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013년 8월 30일 아침 7시 반, 왕런궈는 근무 시간에 다롄 세무 전문대학에서 납치됐다. 같은 날 아침 8시에 그의 아내는 야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인근에서 납치됐고 또 강제로 가택수색을 당했다.

개학 준비를 하던 딸은 어머니가 몇 명의 우람한, 보기에 졸개 같은 젊은이들에게 납치된 소식에 충격을 입었다. 딸의 학습을 위해 준비했던 새 노트북 컴퓨터, 프린터도 강탈당했는데 그 프린터는 딸이 단지 20~30장을 인쇄했을 뿐이었다. 이 컴퓨터와 프린터는 딸이 전문적으로 학습에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해석해도 소용없었다. 도둑떼 같은 중공(중국공산당) 경찰이 침입해 왕런궈의 딸은 울었으며 컴퓨터 본체는 옮겨졌고 1천 6백 위안(약 27만 원)의 생활비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납치에 참여한 사람은 다롄 국가보안대대, 610, 다롄 사허커우구(沙河口區) 공안분국과 헤이스자오(黑石礁) 파출소 사람이다.

왕런궈 부부는 따로따로 신분이 분명하지 못한 사복경찰에게 심문을 당했는데 같지 않은 정도로 강제 자백, 유도 자백, 속임수 자백을 당했다. 아내는 지금까지 당국에서 그들 부부를 무슨 등급의 인물로 여겨 대했는지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 몸의 바지춤 고무줄을 하나하나 훑었고 브래지어도 빠뜨리지 않고 수색했다. 머리핀마저 뽑아내고 머리카락을 반복적으로 몇 번 빗었는데 마치 무슨 소형의 무전기를 찾는 것 같았다. 국가보안은 자신의 특무 수단을 이용해 정찰했고 왕(王)씨 집의 은행 내역을 구체적으로 조사 확인했다. 오후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왕런궈는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했는데, 욕설 소리, 비명은 방음하지 못하는 장벽을 뚫고 아내 귀에 전해졌다. 아내는 남편이 사람마다 모두 칭찬하는 좋은 사람인데 오늘 왜 이런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내의 마음은 찢어지듯 슬펐다.

아내는 그날 저녁에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얼마 동안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후 다롄 야오자 구치소로 보내져 감금됐다.

왕런궈 가족은 예전에 차례로 세 차례나 변호사를 선임해 구치소로 왕런궈를 면회하러 간 적 있으나 모두 왕런궈가 업무 담당 기관에 규정된 중점 인물이라는 이유로 면회하지 못했다. 왕런궈의 여위고 허약한 몸이 이 시련을 버텨낼 수 있을지 아내와 딸은 걱정하고 있다.

먼 고향에 있는 왕런궈의 80여 세 부모는 오랫동안 아들을 보지 못했고 또 아들의 전화도 받지 못했다. 아랫사람이 솔직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말하지 않았으나 사리에 밝은 노인은 마치 무엇이든 모두 알고 있는 듯 했다. 노인은 전화로 손녀에게 “할머니에게 종종 전화해라!”라고 당부했다. 멀쩡하던 행복한 가정이 사람마다 마음을 졸이게 됐다.

왕런궈는 1996년에 기쁘게 대법을 얻고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다. 1999년에 파룬따파는 박해를 당했다. 그는 지식인층 대법제자 2백여 명과 함께 야외 연공을 하다가 납치돼 보름 동안 불법 구금을 당했다. 2001년, 속임수를 당해 파출소(파출소에서는 전화로 외지 수련생이 그를 찾는다고 말했음)로 갔다가 납치됐다. 감금 기간에 발 위에 온통 옴이 생겨 20여 일 후 석방돼 돌아왔다. 5세인 딸은 옴에 감염돼 한쪽 엄지발가락 발톱이 벗겨졌다.

재차 납치당한 후 왕런궈는 ‘지명 인물’이 됐다. 상부의 의도에 따르면 이 젊고 혈기 왕성한 수업 핵심교사는 제1선에서 전출되어 출근할 수도 수업을 할 수도 없게 되어 교무 이외 업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은 각 방면에서 진선인(眞ㆍ善ㆍ忍)을 행위 준칙으로 한다. 왕궈런의 착실한 근무 태도, 우수한 인격적 매력, 뛰어난 근무 능력은 전 학교 상부에서부터 아래까지의 호평과 환심을 깊이 샀다. 과거에 중요 근무를 맡기면 안 된다고 지정된 사람이 오히려 단번에 교무 이외 업무 주력이 되어 많은 재무상황을 관리했고 학교에서 주요 역할을 맡게 됐다.

이번에 왕런궈가 납치되자 교장 및 학교 책임자는 재차 그의 행방을 알아보았고 방법을 찾아 사건 상황을 파악해 왕런궈가 하루 빨리 학교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다. 그에 대한 납치박해는 학교의 정상적인 근무에 매우 큰 손해를 가져다주었다.

2013년 9월 19일, 공안 부문에서는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로 왕런궈에게 체포증을 하달했다. 2014년 4월 14일, 아침 9시 반에 다롄 사허커우구(沙河口區) 법원은 불법 재판을 열었다. 사허커우구 검찰원은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로 왕런궈를 기소했다. 사허커우구 법원 리볜장이 주심 판사를 맡았다. 재판 중 검찰관은 “왕런궈는 밍후이왕에 문장을 365편이나 발표했습니다.”고 말했다. 왕런궈는 “나는 밍후이왕에 문장을 쓴 것이 아니라 대기원(大紀元)에 문장을 썼습니다.”라고 정정했다. 맨 마지막에 왕런궈는 자신을 위해 변호했다. “나는 수련자가 해야 할 일을 했고,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 했을 뿐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고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파룬궁은 잘못이 없고 대법제자는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사회가 오늘까지 발전함에 이르러 인터넷 매체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인터넷 자원을 함께 공유하는 거센 기세는 이미 막을 수 없게 됐다. 그 당시 우등생, 중국 인민대학 역사학과의 학생 왕런궈은 오늘날 시사에 대해 자유 언론매체에 한 개인의 견해와 평론을 발표했다가 오히려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로 판결을 당했다. 이런 문자감옥(文字獄)은 봉건 왕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개혁개방인 바로 그 당시 분위기와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이런 절름발이 개혁은 이미 세계 전문가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문장발표: 2014년 9월 2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9/22/2980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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