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베이성 보도) 허베이성 창저우(滄州)시 보터우(泊頭)시 파룬궁수련생 웨이징민(魏靜敏, 여)은 예전에 청렴한 회계사이자 공장장이었다. 그는 이후 둥다(東大) 본사 사장을 맡았다.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 후 더욱 뇌물을 받거나 부패하지 않았으며 시종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했다. 파룬따파를 수련한 이유 때문에 현지 공안, 국가보안에게 두 차례나 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노역, 매달기 고문, 가죽채찍으로 후려치기 등을 당했다.
웨이징민은 1955년 8월 3일에 출생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72년 8월에 근무를 시작했다. 1987년에 보조 회계사로 평가받은 후 보터우시 자전거공장 주관 회계사, 판매 과장, 경영 공장장, 화학비료 ‘리터리(立特靈)’ 경영 공장장을 맡은 적이 있다. 1998년에 둥다 본사 사장으로 승진해 해마다 기업, 시 선진 근무자로 평가받았다. 웨이징민은 그가 대법을 수련하고 중공에게 박해당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자술했다.
1997년 6월, 나는 대법수련에 들어섰다. 대법 속에서 나는 진정하게 좋은 사람으로 되는 이치, 표준, 인생 그리고 더욱 높은 기대, 잃음과 얻음에 대한 이치를 깨닫고, 나는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속박해, 가지지 않고 탐오하지 않으며 어떠한 뇌물도 받지 않는 것을 해냈다. 1997년 겨울, 공장 업무 회의에서 나에게 1만 위안(약 170만원)의 장려금을 주었으나 나는 요구하지 않았다.
1998년, 내가 둥다 본사 사장으로 승진한 후 한 업무 거래처에서 집으로 찾아와 나에게 5천 위안(약 85만원)의 뇌물을 선사했으나 나는 받지 않았다. 나를 찾아 일을 처리하러 찾아온 사람의 어떠한 뇌물도 나는 일률적으로 받지 않았다. 1998년 말, 나는 예전에 받았던 뇌물, 술, 천 등 물품을 전부 어려운 사람과 일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썼다.
1999년 7월 20일 이후, 조직부에서는 보터우시 국영 기업, 정직 중에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내 사장 직무를 해임했다. 게다가 나를 찾아 면담을 하며 나에게 다른 직장으로 가서 당지부 서기를 맡으라고 했는데 당시 나는 거절했다. 면담한 사람은 화를 냈다. 이후 내가 퇴직할 때까지 나에게 부사장 명목을 걸어주었다. 보터우시 구치소에서 노역 박해를 1개월 동안 당했다.
2005년 11월 23일 저녁 무렵, 나는 다른 한 대법제자와 함께 시내에서 진상자료를 붙일 때 와리왕(窪裏王) 파출소의 경찰 4명과 마주쳤다. 나는 그들에게 파룬따파는 정법이고 선(善)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듣지 않고 몇 사람이 계속 잡아당겨 나를 차안에 밀어 넣고는 보터우시 구치소로 납치해 1개월 동안 박해를 가했다.
구치소 안에서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모두 기준량이 있었다. 성냥갑을 묶는 일을 했는데 기계처럼 끊임없이 일을 했고 매일 난잡한 말을 들었다. 모두 저질스러운 말이었다.
12월 24일, 내 남편과 사촌 여동생 남편이 나를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집에서 사촌 여동생에게 1만 위안을 주어 그녀가 공안, 국가보안과 교섭하도록 했음을 알게 됐다. 그 후 사촌 여동생은 또 2천 위안(약 34만원)을 돌려주었다. 박해한 사람은 공안국의 자오둥성(趙東升), 장쯔하이(張子海), 파출소의 류제(劉傑), 자오후(趙虎)다.
난피 구치소에서 가죽 채찍으로 때리기, 매달기 고문을 당하다
2009년 11월 31일, 나는 다른 한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난피(南皮) 농촌으로 가서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렸다가 진상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신고를 당했다. 우마잉(烏馬營) 파출소의 3명은 우리들을 난파현 구치소로 납치했다. 공안국에서 나와 다른 한 파룬궁수련생은 계속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에 의해 난피 구치소에 갇혔다.
당시 난피 구치소에서는 한 대법제자를 감금하고 있었다. 황슈링(黃秀玲)이라고 부르는 아가씨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30여 세 정도의 대학생이었다. 악독한 경찰은 정말로 무차별폭력을 거의 매일 가했다. 우리가 모두 죄수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죽 채찍으로 나를 때리고 매달아 놓았다. 어느 하루 저녁에는 나를 창문 위에 하룻밤 동안 채워놓았다. 전체 감방 안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당신은 연마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연마하지 않겠다고 말하세요. 먼저 나가세요. 집으로 가서 다시 연마하세요.”라고 권했다.
중공 고문 설명도: 매달기 고문(吊銬)
또 한 번은 우리 파룬궁수련생 3명은 모두 두 손이 벽 밑에 채워져 추위에 떨었다. 우리는 함께 대법을 외웠다. 대법의 신기함으로 우리의 손은 자연스럽게 수갑에서 나왔다.
일주일 째 되는 날 아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 일주일 동안 집에서는 나의 소식을 조금도 몰랐다. 큰 언니, 둘째 언니는 모두 조급해서 병이 도졌다. 가족들은 적잖은 고생을 겪으며 사방에서 나를 찾았다. 아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으나 매일 차를 몰고 몇 백리 길을 동분서주했다. 그는 나에게 “나는 하마터면 교통사고를 낼 뻔 했어요. 어머니는 내가 무슨 심정인지를 알고 계셔요?!”라고 말하면서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않는다고 원망했다. 열흘 째, 남편과 아들은 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누구도 말이 없었다.
난피 구치소 경찰은 매우 사악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파룬궁은 적아(敵我)모순이고, 살인방화는 내부모순이다”라고 소란을 피웠다. 나는 공안 국가보안대대장 쉬스훙(徐世洪)에게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은 어떠한 단체인지 당신이 마음속으로 말해 보세요. 좋은 단체가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어느 한 번은 불법적으로 나를 심문했는데, 그가 앞에 있지 않고 문밖에서 보고 있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분명히 그가 앞으로 덮치고 싶지 않음을 보았다. 경찰 몇 명은 내가 죄수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머리가 헝클어지게 구타하고 수갑을 채웠다. 그런 모습일지라도 여전히 그들에게 대법은 백여 개 국가에 널리 전해진 것 등을 알렸다. 나에게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나는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들이 진상을 명백히 아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쉬스훙은 나에게 질문하는 사람에게 손을 저었는데 의미인즉 ‘묻지 말고 가자’라는 뜻이었다.
내가 나올 때 구치소와 공안국에서는 돈을 받지 않았다. 나를 정문까지 바래다 준 경찰은 “당신은 공짜로 먹고 마셨으나 당신의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문장발표: 2014년 9월 1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9/17/2978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