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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동안 비인간적인 박해, “살아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허베이 푸닝현 파룬궁수련생 왕하이진이 박해당한 경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베이성보도) 키가 178cm에 체중이 90kg의 건장한 체격이었던 왕하이진(王海金)은 꼬박 3개월, 90일 동안 비인간적인 혹독한 박해를 당해 지금은 불과 65kg 정도에 불과한 쇠약한 몸으로 변했다. 정신은 흐리멍덩해졌고 밤낮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태이다. 누우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밤새도록 침대에 앉아 있거나 방안에서 왔다 갔다 하지만 서 있어도 앉아 있어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너무 졸려 기대어 잠시 잠이 들지만 단 몇 분 만에 갑자기 놀라 질겁하며 일어나 앉는다. 그렇게 놀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 대자 형으로 결박당해 호스를 꽂고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당했던 그 자세를 취했다……

这张照片是蛋糕店刚开业时在店里照的
이 사진은 케이크 상점을 개업할 때 상점 안에서 찍은 것임

这是从看守所被接回家的第三天照的
구치소에서 집으로 픽업해온 후 3일째 되는 날에 찍은 사진

허베이 친황다오시 푸닝현 파룬궁(法輪功)수련생 왕하이진은 2014년 4월 22일 자신의 케이크 상점에서 경찰관에게 불법적으로 납치되어 푸닝현 구치소에 감금된 뒤, 90일 동안 강제로 음식물 주입을 당하고, 구타, 성적학대,노역 등 비인간적인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

왕하이진은 그런 모진 고문학대로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눈길을 한곳에 고정시키지 못한 채 딴 곳을 바라보는 상태인데, 눈앞에는 늘 여전히 구치소에서 혹독한 고문과 구타, 강제노역을 했을 때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더구나 밥을 보면 구토증을 느껴 토하려고 했다. 어떤 때는 가족의 권유로 억지로 멀건 죽을 좀 마시지만 곧 전부 토했다. 이렇게 음식물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서 걷기조차 힘들어했다. 그는 무슨 전화가 걸려와 가족들이 받기만 하면, 국가보안이나 파출소 등지에서 걸려온 전화가 아닌 가해서 매우 긴장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아주 과묵해 진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뭘 물어봐도 대답조차 하지 않지만, 다만 구치소 안에서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할 정도로 너무 심한 고문박해를 당하며 보냈다면서, “살아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납치 감금, 야만적으로 호스를 꽂고 음식물을 주입하다

왕하이진은 2014년 4월 22일 상점에서 일을 하던 중인 점심시간, 12시가 좀 넘은 시각에 푸닝현 국가보안 천잉리(陳英利), 뉴터우야(牛頭崖) 파출소의 왕웨이(王偉) 등 악인 20여 명에게 납치되어 뉴터우야 파출소로 끌려갔다. 당일 오후 6시경 왕하이진에게 수갑을 채우려고 하자, 그는 큰소리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하고 외쳤다. 왕하이진의 아내와 두 아이도 소리 내어 울면서 외쳤다가, 많은 악경(사악한 경찰)들이 그들을 끌어 잡아당기고 또 가로막았다.

왕하이진은 푸닝병원으로 끌려가 신체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심장박동이 좀 높은 것 외에 다른 것은 정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날 오후 8시경 국가보안대대 왕후이 등에 의해 푸닝현 구치소로 송치돼 감금됐다. 왕하이진이 그곳에서 죄수복입기를 거부하자, 당직 교도관은 2, 3명의 죄수를 시켜 왕하이진의 머리 등을 구타했다. 당시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는데 곧바로 앞니 한 대가 부러졌으며 그들에 의해 강제로 죄수복이 입혀졌고, 곧이어 8호 유동 감방에 수감시켰다.

왕하이진은 구치소에 감금되면서부터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을 시작한 지 4일째 되던 날부터 강제 음식물주입이 시작됐다. 구치소 관계자는 죄수 몇 명에게 왕하이진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완력으로 눌러놓고, 구치소 의무실 키 큰 여자의사 이(李) 모가 코에 호스를 꽂아 넣고 음식물을 주입시켰다.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왕하이진은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 몸상태가 조금 회복되자, 교도관 장창(張強)은 왕하이진에게 노역을시켰다. 강제노역을 하는 과정 중에서 어떤 죄수가 왕하이진을 구타하기도 했다.

酷刑示意图:摧残性灌食
고문 설명도: 강제 음식물주입 학대

단식으로 몸이 매우 허약해진데다가 매일 노역의 책임량은 점점 많아져서 왕하이진의 그런 몸 상태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5월 13일, 푸닝 국가보안의 천잉리(陳英利)와 천더둥(陳德東)이 왕하이진을 다시 심문하기 시작했다. 왕하이진은 다시 단식으로 항의했다. 그러자 구치소는 곧 왕하이진을 7감방으로 옮겨 강제음식물주입의 박해를 가했다. 이번 박해는 극히 고통스러웠다. 역시 몇 명의 죄수가 왕하이진을 움직이지 못하게 내리눌렀는데, 한 사람은 심하게 허벅지를 꼬집기도 했다. 그중 또 한사람은 왕하이진의 입을 강제로 열고 잡았는데, 앞니에 강하게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곧 앞니가 부러졌다. 그런데도 키 큰 여자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굵고 긴 호스를 코를 통해 위속까지 15내지 55cm를 꽂아 넣었는데, 코와 입에서 피가 질펀하여 그 정경이 너무도 참혹해서 차마 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호스를 꽂고 음식물을 주입했던 여자의사마저 구토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음식물주입이 끝나고 나서도 호스를 뽑지 않았다. 그대로 두고 죄수가 매일 음식물을 주입했는데, 매일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한 고통을 당했다.

죄수를 이용해 구타하다

그 후에 푸닝현 구치소의 악인들은 그에게 박해강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 한 개의 수갑에 왕하이진과 사형수 옌웨이(嚴偉)를 함께 채워두었다. 사형수 옌웨이는 사람을 3명이나 죽인 사형수로, 사인침대(死人床)에 2년 넘게 채워져 있으면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악독한 교도관은 왕하이진과 사형수를 함께 채워놓고 사형수로 하여금 왕하이진을 괴롭히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하이진의 손은 그에게 채워진 수갑으로 구타를 당해 만두처럼 부어올랐다.

酷刑演示:毒打
고문 재연: 혹독한 구타

5월 21일경 구치소 직원들이 퇴근을 한 뒤, 5~6명의 죄수가 왕하이진을 혹독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호장(號長) 리룽(李龍)은 죄수 가오나이창(高乃昌)에게 지시하여 왕하이진의 생식기를 심하게 비틀어 꼬집었다. 마약범 리룽은 “교도관이 구타를 하되 부상이 외부로 나타나지 않게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내일은 반드시 밥을 먹게 하라.”고 했다고도 했다. 그러므로 그날 밤 그 죄수들이 왕하이진을 혹독하게 구타할 때, 비명소리는 전체 푸닝구치소에 울려 퍼졌다.

이튿날, 교도관 양스쩌(楊士澤)는 위선적인 모습으로 왕하이진의 수갑을 풀어주고, 일주일 동안 체력을 회복시켜 계속 노역에 투입시켰다. 어느 날 왕하이진은 죄수에게 부축을 당해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나 땅을 밟을 수 있었는데, 다른 한 감방장이 많은 앵두씨를 왕하이진의 발밑에 놓고 그에게 맨 발로 밟게 하여 고통을 주기도 했다.

핍박에 못 이겨 노역을 하다

6월 초, 왕하이진의 몸 상태는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교도관은 그에게 케이크를 만들 때 사용하는 종이컵을 붙이는 노역을 시켰다. 한 꾸러미가 200개씩인데, 매일 죽을힘을 다해서 붙여도 2~4천개 정도를 붙일 수 있었다. 어떤 죄수는 지쳐서 허리가 굽었다. 거기다가 혹독한 노역을 시키고도 급식은 열악하기가 극히 악랄했다. 아침에는 옥수수가루 죽을 주었는데, 한 사람 당 겨우 두 국자씩 주기 때문에 그저 연명하는 데 불과 했고, 점심저녁에는 옥수수떡에 야채 국을 주었다. 누구든지 배고파 다른 것을 먹으려고 한다면 모두 고가로 사야 했다. 떡 한 개에 20위안(한화 약 3천원)이니 누구나 사먹을 수가 없었다. 집에서 돈이 차입되지 않는 죄수는 그곳에서 급식되는 대로만 먹으며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장기간동안 절반정도의 죄수들은 죽지 못해 필사적으로노역을 해야만 했다. 노역은 각 감방에서 했는데 어떤 상태의 죄수도 다있었다. 그러나 위생상태가 근본적으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극도로 더러운 그곳에서 그들이 만들어 낸 제품의 위생상태는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왕하이진은 매일 7~9 꾸러미 정도밖에 붙이지 못했다. 교도관과 감방장은 그에게 실적이 적다고 끊임없이 질타하며 압력을 가했다. 그에게 배당한 것은 매일 열 꾸러미였는데, 그걸 완수하지 못하게 되면 바닥을 닦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또 밤에는 당직을 서는 벌칙을 내렸다. 그는 너무 지처서 온몸에 부종, 구토증, 식욕부진 등의 상태가 나타났으며, 전신쇠약감과 심장박동증가와 호흡곤란증세가 나타났다.

7월 중순, 왕하이진은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처음으로 병원을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제출했으나, 구치소 측은 대꾸는 물론 상대도 해 주지 않았다. 죄수가 정식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려면 치료비 전부를 자신이 부담해야 했으므로, 그럴 돈이 없는 왕하이진에게 구치소 내 의무실에서 구심환(救心丸) 등 간단한 약을 주고는 계속 노역을 시켰다. 며칠이 지나자 몸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다리가 부어올라 누르면 움푹 패어 들어갔는데 전혀 음식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 호흡고란증세가 심해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하이진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다시 두 번째로 요구했다. 그러자 의무실로 끌려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무실 의사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미 오후라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병원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튿날(7월 15에서 16일경) 푸닝현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는 심장쇠약증상이라 즉시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7월 21일 오후 5시경 왕하이진은 병원에서 구치소로 돌려보내졌다.

악독한 경찰 위협, 보석석방해도 수시로 소환해야 한다

7월 21일 오후, 국가보안경찰 천잉리(陳英利)는 왕하이진의 가게로 찾아와서, “시 국의 어떤 사람이 나서서 병보석수속을 밟아 주었는데, 가족이 이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만약 동의한다면 곧 뉴터우야 파출소로 찾아가서 보석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당일 오후 10시경 마침내 왕하이진은 가족을 만났다. 가족은 그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과거 건장하고 잘생겼던 왕하이쥔이 지금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고 온 얼굴에 수염은 가득한 채 허리를 구부린 모습이 겉 늙은이가 다 된 모습이라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몰골이었다. 몸에 입은 옷은 누구의 옷인지 체격에 비해 작은 옷을 입고 있었고, 발에는 검은 색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분명히 발보다 매우 작아 도저히 신을 수가 없어서 신지 못하고 뒤축을 밟아 끌면서 제대로 잘 걷지도 못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동안 가족은 여러 차례 구치소에 왕하이진의 면회를 요구했으나, 교도관은 “사람은 볼 수 없고 돈을 차입하는 것은 할 수 있다.”고 했다 가족이 3백 위안(약 5만원)을 차입해 넣어줬는데, 이 돈이 구치소에서 생활하기에는 턱도 없이부족하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가 처음에는 100여 위안(약 1만6천원)을 빚졌다고 했는데, 바로 침대시트, 세수 대야, 수건 등의 물품을 구입하는데 필요한 돈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2개월이 넘은 뒤에는 이미 160여 위안(약 2만7천원)을 빚졌다고 말했다. 구치소에서는 어떤 옷이나 무슨 물건을 차입해 넣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드시 구치소, 그들의 것을 구입해서 옷을 입어야 하는데 새 것이든 낡은 것이든지 입기만 하면 3백여 위안이라고 말했다. 왕하이진이 푸닝 구치소에서 걸어 나올 때, 교도관은 옷을 벗으라며 어느 죄수의 옷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옷으로 갈아 입혔다.

구치소 측이 계속 가족에게 왕하이진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잘 있기 때문이라며, 매번 푸닝현 국가보안 혹은 구치소 천잉리, 구치소장 양커쥔(楊克軍) 등을 막론하고 그들은 모두 “왕하이진은 아주 잘 있다.”고 말했다. 당시 가족은 무슨 상황인지를 알지 못했다. 아마 알았다면 병보석을 동의하지도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천 위안(약 33만원)의 보증금 역시 가족이 사정을 모르는 상황 하에, 진상을 모르는 친척이 수속을 밟으면서 천잉리에게 넘겨 준 것이었다.

출발 전 푸닝 국가보안 천잉리는, “보석되어 집으로 간다고 해서 별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수시로 호출하면 출정(出庭) 등에 협력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가족이 상해를 입다

가족들도 왕하이진이 불법적으로 감금당한 3개월 동안, 늘 푸닝현 국가보안 과 하이닝로(海寧路), 가도사무실, 관할경찰관 등에게 위협과 교란을 당했다.새로 개업한 케이크 점은 이미 문을 닫았다. 그러므로 매일 집세는 밀리고 있는데다가 그동안 영업 손실을 합치면 5, 6백 위안(약 8만원~10만원)이나 된다. 원래 상점은 경찰들에게 불법적인 수색과 강탈을 당하고, 경찰이 여러 차례 교란과 미행하고 감시하며 장기간 상점주변을 잠복함에 따라,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하여 영업실적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 바람에 고용한 두 사람의 월급조차 지불하기가 어려운 정황이었다. 현재 가족들은 모두 친구의 도움으로 경우 생활하고 있는 실정이다.

왕하이진의 아내는 남편을 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했고 또 80대 노인을 봉양해야했고 두 아이는 아직 공부를 해야 했는데, 큰 아이는 이제 겨우 10세, 작은 아이는 7세였다. 아내는 처음에는 거의 매일 파출소, 푸닝 국가보안대대 등으로 분주히 뛰어다녔으므로 그 충격으로 심신에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한때는 정신적인 압박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매우 수척해졌다.

왕하이진은 효자다. 가족 중에서 매우 연로한 할아버지가 있는데, 그는 말하기를 “우리 하이진은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으로, 밖에서 노인을 데려온다고 해도 부양해 줄 것이라는 걸 나는 믿네.”라고 손자가 파룬궁을 수련해서 심덕이 좋다는 것을 공언했다. 왕하이진이 3개월 동안 감금된 상태에서 모친과 친지들이 모두 면회를 허락받지 못한 고통을 감내해야했지만, 노인은 이런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늘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정의로운 변호사를 선임함으로써 그제야 왕하이진의 일부 상황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왕하이진이 박해 당한 것이 그렇게 처참했는데도, 가족은 그가 집으로 돌아온3일 후에야 그가 박해로 심장쇠약증상이 나타나 풀려났음을 알았다. 그는 근본적으로 죄수와, 경찰, 교도관 등인성이 없는 악인들로부터 받은 고문과 박해를 회억해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여러 차례 물어봐서야 조금씩 말했다.

왕하이진이 구치소에서 90일 동안 당한 박해는, 모두 심신에 가한 이중적인 학대였다. 가족은 구치소에서 음식물을 강제주입하고, 병원에서 약물 주사할 때 몸에 유독성물질을 주입했을 거라는 의심을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집으로 돌아온 지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늘 구토하며 물도 많이 마실 수 없어 마시면 물마저 토해내겠는가?

그 밖에 정황에 따르면, 왕하이진을 납치한 것은 친황다오시 국가보안이 푸닝현 국가보안에 지시하여, 장기간동안 잠복감시, 미행감시, 사진, 녹화를 하는 등 추적 감시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일종의 무슨 기기를 조사한다고 말했으나, 경찰은 왕하이진의 상점과 자택 등 두 곳의 차고까지 모두 수색했으나찾아내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의 경찰은 지금까지 왕하이진을 박해한 지 3개월이 되었는데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왕하이진을 납치했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문장발표:2014년 8월 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8/4/2955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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