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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웨이팡시 법제국 부국장 과 가족 거듭 납치당해

[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산둥 보도) 2014년 7월 4일, 전 산둥성(山東省) 웨이팡시(濰坊市) 법제국 부국장 위구이팡(於桂芳)은 친척을 방문하러 지난(濟南)으로 갔는데, 한 파룬궁수련생의 친구 집에서 산둥성 지난 톈차오구(天橋區) 분국,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함께 납치당한 사람은 또 위구이팡의 파룬궁을 수련하는 몇 명의 친구였다.

웨이팡, 지난 경찰은 불법으로 잇따라 웨이팡에서는 위구이팡의 딸 천빙난(陳冰囡)과 지난에 있는 그녀 남편 양펑(楊峰)과 양펑의 모친을 잇달아 납치했다. 납치와 동시에, 그들의 거처도 불법으로 수색했다.

현재 위구이팡 및 납치당한 그의 가족들은 모두 지난시 중궁(仲宮) 마약 중독자 재활원(전 지난시 중궁 노동교양소)에 불법 감금당해 있다. 이것은 산둥성 ‘610’ 악인과 웨이팡시 공안국 국가보안지대, 지난시 공안 관련 부서에서 오랫동안 은밀히 계략을 꾸민 박해다.

행복한 일가족

올해 67세인 위구이팡은 퇴직하기 전에 웨이팡시 법제국 부국장을 맡았다. 그녀의 전반생은 평범하지 않은, 현지에서는 공인하는 세력가였다. 웨이팡 교외 지역에서 출생한 그녀는, 어릴 때부터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강한 자였다. 그녀는 능력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매력도 있었고 다재다능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부는 휘파람은 은은하고 구성져 마음을 울렸다. 위구이팡은 또 글씨를 잘 썼다. 그녀의 만년필 행서(行書)는 습자 본과 겨룰 만했고, 그녀의 붓글씨는 힘 있고 대범해 보기 좋았는데 어떤 사람은 본 뒤에 묵보(墨寶)라고 하며 아예 벽을 도배한 뒤 걸어놓았다……그녀가 20세 때 한 국영기업의 공장장이 되었다. 60년 그녀는 산둥성 여성 민병 ‘특등 사격수’, ‘수영 선수’가 되어 산둥성 전성 민병 초병대회에 출전해 성급 표창을 받아, 당시 전 웨이팡시에서 유명하게 방송되었던 ‘다섯 송이 금화’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중에 위구이팡은 용감하게 진실한 말을 한 이유로, 목에 종이 팻말을 걸고 조반파(造反派)에게 압송되어 웨이팡 도시 구역에서 도보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비판을 당할 때, 그녀는 조반파에 의해 무대 위에서 밀려 바닥에 떨어져 몸 위의 여러 곳에 낙상을 입었다. 그때 그녀는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노처녀였다. 위구이팡은 자신의 능력과 착실하게 일을 해 90년대 중반 웨이팡시 정부 법제국 부국장 직위에 올라 업무를 맡았다. 업무를 감당하기 위해 그녀는 많은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생을 참아 내며 스스로 법률 법규에 관련된 것을 학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정부 법제 업무 방면의 전문가가 되었다. 99년 7.20전, 웨이팡시의 적잖은 기관단위에서는 위구이팡을 초빙해 법에 관련된 교과 과정을 강의시켰다.

류구이팡은 1997년에 파룬궁 수련의 길에 들어섰는데, 웨이팡 공상국에서 근무하는 남편 천모린(陳茂林)의 변화 때문이었다. 천모린은 원래 일 년 내내 심장병, 고혈압 등 온몸에 병을 앓았다. 중국 의학, 서양 의학, 민간 처방을 전부 사용했는데, 쓸모없었을 뿐만 아니라, 점점 심각해져 온종일 기운이 없어 비실비실하여 살 것 같지 못한 모습이었다. 거의 해마다 두 차례나 입원했는데, 그중 2차는 병원에서도 그가 위독하다는 통지서를 내렸다. 1997년에 어떤 사람이 그들 부부에게 파룬궁을 소개해 주었다. 천모린은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몸의 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몸은 건강해졌다, 이것은 국가에 대량의 의약비를 절약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파룬궁을 수련해 원래 성실하고 착하던 그는 더욱 너그럽고 더욱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해 주었으며 근무도 더욱 잘했다. 원래 신의 존재를 믿지 않던 위구이팡은 직접 남편 천모린의 변화를 목격한 뒤, 자신도 천천히 파룬궁을 수련하는 길에 들어섰다.

파룬궁을 수련한 뒤, 그녀는 꿈속에서 깬 듯이 문득 인생의 참뜻—원래 사람은 살아서 온종일 항상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선인(真善忍)의 요구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반본귀진(返本歸真)하는데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보배를 얻은 듯이 전심으로 파룬궁 사부님의 요구하심을 실현해 단위, 집에서 모두 노력을 다해 자신에게 끊임없이 진선인에 접근한 좋은 사람이 되도록 요구했다. 그녀는 다년간 양성된 승부욕이 강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등 사람의 마음을 없애 버리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겪은 적이 있다. 몇 해 동안 수련한 뒤, 원래 그녀와 익숙하던 사람은 그녀의 언행 중에서 매우 쉽게 그녀의 거대한 변화를 감수했다. 그녀는 점점 온화하고 점점 다른 사람의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하며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도리를 따질 때, 예전의 그 ‘싸우면 반드시 이기’던 다투고 언변이 좋은 상황이 적어졌다. 적잖은 사람은, 그녀가 말한 말은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한다고 말했다.

위구이팡의 딸은 천빙난이라고 부르는데, 분수를 지키고 성실하며 또 총명했으나 성질이 비교적 내성적인 아가씨였다. 그녀는 예전에 웨이팡시 건설은행의 회계였다. 그녀는 부모가 파룬궁을 수련해 심신에 나타난 커다란 변화를 목격한 뒤, 그녀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길에 들어섰다. 이로부터 그녀는 수련생의 무사무아(無私無我)의 표준적인 요구를 실현하기에 노력했다. 그녀의 자폐적 성향은 대법수련을 한 뒤 점점 낙관적으로 변했고, 점점 다른 사람을 대신해 생각해 줄 수 있었다. 원래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근무하던 그녀는 직장에서 더욱 부지런하게 노력을 하여, 직장 책임자의 호평을 매우 많이 받았다. 주변 사람은 이 일체를 감수하고 늘 배후에서 그녀를 칭찬했다. 파룬궁을 수련하려는 지향을 지닌 천빙난은 청년 교사이자 파룬궁수련생 양펑과 사귀게 되었다. 게다가 1998년에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부부 인연을 맺었다. 결혼 1년 후, 그들의 딸 솽솽(爽爽)이 인간에 왔다.

천빙난의 남편 양펑은 품행과 재능 그리고 좋은 용모를 갖췄다. 그는 호리호리한 키에 말쑥한 얼굴을 가졌는데, 원래 산둥성 정보공정학교(지금은 산둥성 정보공정 직업기술학원으로 되었음)의 교사었다. 1989년에 이 학교에서 학습한 기간, 국가인사부에서 조직한 컴퓨터 프로그램 인원(程序員, 보조 기사에 상당했음) 수평 시험에서 산둥성에서 3등을 했다. 졸업해 학교에 남아 교편을 집은 뒤, 그는 컴퓨터 전업 교재 두 권을 썼는데, 모두 학교에서 학생의 교재로 채택되었다. 그중 다른 사람과 공동저서인 《계산기 원리》는 출판 발행되었다. 학교에서 해마다 선정하는 논문 평의 중에 여러 차례 수상했다. 교수한 과정에 대한 평가에서도 학교 책임자나 학생들은 그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주었고, 여러 차례 ‘우수 교사’ 호칭을 받았다. 업무학습과 대학원 시험을 보기 위해, 그는 매일 고생스럽게 자습했다. 업무와 학습에 지나치게 전념한 양펑은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온몸은 차갑고 기운이 없었는데, 병원에 갔으나 병명을 알 수 없었다. 1996년에 6개월 동안 독한 약을 먹어도 치료되지 않았다. 그는 정신적으로 점점 압박을 느끼고 우울했다. 1997년에 양펑은 인연이 있어 ‘전법륜(轉法輪)’을 읽은 뒤, 마음은 햇빛이 대지를 비추듯이 맑고 아름다웠고, 심정은 비할 바 없이 상쾌했다. 전신의 불편하던 것은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몸이 건강을 회복하고 마음이 상쾌함으로,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1999년 7월, 중국 대륙에서 당시 중공(중국공산당) 사당 두목을 맡았던 장쩌민(江澤民)은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악한 공산당을 통제해 전체 국가 기구를 움직여, 잔인 악독하게 일억 명에 가까운 파룬궁수련생들의 평정하고도 따뜻한 생활을 교란해 파괴했다. 위구이팡과 그의 친인은 재난을 요행히 모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위구이팡이 비교적 특수한 사회 지위에 있었던 이유로, 그녀와 그녀의 친인들은 일반인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다. 위구이팡과 파룬궁을 수련한 그의 가족들은 반복적으로 담화하고 세뇌받기, 감시, 미행, 월급 지급을 중지하기(위구이팡, 양펑), 공직에서 해고하기(양펑), 불법 구금(1999년 7월 24일에 성 정보공정학교 책임자 샤오펑쉬(肖鵬旭)는 장 씨 소집단의 압력으로 양펑을 학교에 일주일 동안 연금하는 등 박해를 가한 외에, 그들 전체 대가정은 이번에 사악이 집중적인 박해를 가하기 전에 또 두 차례나 집중적인 박해를 당한 적이 있다.

첫 번째로 집중적인 박해를 당하다

양펑은 공직에서 해고당한 뒤, 2001년 초에 외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2003년 8월 5일, 양펑은 짐을 들고 지난시 산다로(山大路)에서 차를 타려 했다. 갑자기 두 명의 지난시 ‘610’의 사복 특무가 오더니, 양펑을 이유 없이 지난 젠신(建新) 파출소로 납치했다. 파출소에서 그들은 양펑을 연결된 걸상 다리 위에 채워두고는, 두 사람을 파견해 그를 감시하게 했다. 저녁에는 그에게 휴식을 주지 않고 윤번으로 그에 대해 불법적인 심문을 가했다. 악독한 경찰은 양펑의 가치가 대략 만 2천 위안 되는 짐과 일부 가치로 추산할 수 없는 물품을 몰수했다. 꼬박 2 일 후, 웨이팡시 공안국의 과장 왕(王) 모는 몇 명의 악독한 경찰을 끌고 양펑을 웨이팡으로 압송해 돌아왔다. 그리고 새벽 1시쯤에 양펑을 웨이팡시 신화로(新華路) 베이서우(北首)에 위치한 ‘610’ 세뇌반(전 시 공업간부학교 세뇌반)으로 보냈다.

세뇌반에서 웨이팡시 ‘610’ 두목 쉬위쥔(徐玉軍), ‘610’ 사무실 부두목, ‘웃는 얼굴 호랑이’ 커우진후이(寇金輝) 및 공안국, 안전국의 악도 그리고 성 정보공정학교의 관련 책임자는, 속임수와 강압적인 수단을 채용해 양펑을 굴복시키려고 시도했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악인들은 양펑의 친인에 대해 연루 박해를 했다. 양펑이 세뇌반으로 납치당한 셋째 날, 그의 그 환갑에 가까운 모친(수련하지 않았음)이 양펑에게 세면도구를 보낼 때, 악도 푸진빈(傅進賓) 그들은 오히려 양펑의 모친을 가지 못하게 하며, 뜻밖에 황당하게 노인에게 남아서 함께 ‘전향’하라는 요구를 제출했다. 모친은 듣고 단호히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 있는 세 살박이 어린 손녀(양펑의 딸 솽솽임)를 돌보아야 한다는 실제 상황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인간성이 전혀 없는 중공 악도들은 이런 것은 상관하지 않고 억지로 노인을 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서 좀 배치를 하겠다고 제출한 요구마저도 악인들은 잔인하게 거부했다.

이 갑작스러운 납치로 도움이 없는 노인은 마음이 무척 급했다. 애타고 고통스럽고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양펑의 모친은 곧 110 경찰에 신고했는데, ‘인민경찰’이 함부로 인신자유를 제한하는 이런 법을 어긴 범죄행위를 제지해 그녀를 구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선량한 노인은 생각을 잘못했다. 110의 경찰은 온 뒤에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곡직을 따지지 않고 ‘610’의 악도를 도와 말을 했다. 푸진빈은 사건이 발생한 뒤, 흉악하게 양펑의 모친에게 “당신은 110이 무엇을 하는지를 모릅니까? 또 110 전화를 걸다니? 110은 우리를 도와 파룬궁을 혼내는 곳입니다.”라고 말하고 악도는 토비 수단으로 노인을 불법으로 세뇌반에 가뒀다.

악도는 노인에게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또 끊임없이 거짓말로 노인에게 해독을 입혔다. 그들은 강제로 양펑과 모친에게 함께 대법을 모독하는 녹화 프로그램을 보게 했다. 어느 한 번, 양펑의 모친은 화가 나서 혈압이 급격히 올라 머리가 터질 듯이 심하게 아팠다. 노인이 혈압를 재겠다고 요구하자, 사당 악도는 노인에게 혈압을 잰 뒤에 “고혈압은 220이고 저혈압은 190입니다. 별로 큰일은 없습니다.”라고 대충 서술했다. 노인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요구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대답하지 않았다.

악도는 양펑의 모친을 세뇌반에 불법 구류했는데, 모친을 괴롭혀 양펑으로 하여금 ‘진선인(真善忍)’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끔 한 외에, 또 더욱 음험한 목적은, 양펑의 아내 천빙난, 양펑의 장모 위구이팡을 속여 양펑의 모자에게 물건을 보내올 때 다시 한 차례 가둬 ‘전향’ 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런 깡패 수단으로 대법 수련생을 박해함은 또 정말 첫 번째가 아니었다. 이전에 웨이팡 목축학교(牧校)의 전 보위과 과장인 아내(부부는 모두 파룬궁수련생임)는 세뇌반으로 와서 불법 감금당한 남편을 면회할 때, 세뇌반의 악도들은 노부인을 강제로 구류시켜 함께 ‘전향’ 시켰다.

바로 그들이 이 일체의 위선, 위협 등 정신적인 통제, 박해 수단이 전부 효과를 잃어 양펑에 대해 잔혹하게 육체적 학대를 할 때, 2003년 8월 28일 이른 아침 양펑은 정념으로 기회를 잡고 세뇌반 소굴에서 벗어났다.

양펑이 벗어나자, 화가 나고 괴로운 악도들은 양펑의 모친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켰다. 9월 11일에야 양펑의 모친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떠나기 전 악도 푸친빈은 양펑의 모친에게 이른바 ‘보증서’

위에 서명시켜, 그들을 협력해 양펑의 납치를 보증하도록 했다. 노인은 마음속으로는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지만, 여전히 강압적인 위협하에 마음을 어기고 서명했다.

세뇌반에서 한 달 넘게 정신적 학대를 당해, 원래 건강하고 낙관적이던 양펑의 모친은 얼굴색이 누렇게 뜨고 몸이 수척해졌으며, 심신이 불안정한 매우 심각한 상해를 입었다. 나온 뒤 며칠 만에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는데, 혈압이 갑자기 올라 급히 병원에 보냈다. 검사를 거쳐 혈전 증상이 매우 심각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다행히 때맞춰 치료해서 심각한 결과는 조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앓아 천여 위안의 의료비를 썼고, 이 때문에 양펑의 집의 원래 궁색하던 생활에 설상가상이 되었다.

양펑의 모친에 대해 이유 없는 박해를 한 동시에, 악인들은 마수를 또 양펑의 아내 천빙난에게 뻗쳤다. 양펑과 모친이 불법 감금당한 기간, 악도들이 양펑의 아내 천빙난에게 세뇌반으로 가서 양펑 모자를 보도록 유인하려고 시도한 음모가 이루지 못하자, 곧 여러 차례 양펑의 모친을 핍박해 양펑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세뇌반으로 오도록 하여 전향시키려 했다가, 양펑 모친의 제지를 받았다, 양펑이 벗어난 뒤, 악인들은 무척 화가 나서 양펑의 모친에게 연속 압력을 가했는데, 거듭 양펑의 모친을 핍박해 천빙난에게 전화를 걸도록 했다.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양펑의 모친은 부득이 천빙난에게 전화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 전화가 통하자, 날뛰던 푸진빈은 한줌에 전화를 빼앗더니 명령적인 어조로 흉악하게 천빙난에게 즉시 세뇌반으로 와서 전향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천빙난이 단호히 저지했던 이유로, 사악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시 ‘610’ 두목 쉬위쥔(徐玉軍), 커우진후이(寇金輝) 및 푸진빈은 직접 천빙난의 직장(웨이팡 건설은행 쿠원구행(奎文區行))의 책임자를 찾아서, 그의 직장에 천빙난을 세뇌반으로 보내도록 요구했다. 악도들은 또 뻔뻔스럽게 만약 세뇌반으로 가지 않는다 해도 되지만, 그들의 네 가지 요구를 대답해야 하는데 첫째, 자신이 파룬궁을 이탈했다는 태도를 표명할 것, 둘째, 그의 모친 위구이팡을 적발할 것, 셋째, 남편 양펑을 적발할 것, 넷째, 결렬서를 쓰라고 했다. 그들은 또 천빙난을 위협해 “당신이 양펑과 이혼하지 않기만 하면, 관련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말했다. ‘610’ 악도는 천빙난과 양펑을 핍박해 이혼시켜 가정 관계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천빙난은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천빙난이 업무 중에서 표현이 뛰어나고, 근무에 대해 극히 강한 책임감이 있었던 이유로, 책임자도 ‘610’의 요구에 따라 그녀를 세뇌반으로 보내지 않았다. ‘610’ 악도는 곧 건설은행으로 사람을 파견해 그곳에서 숙식하며 전문적으로 천빙난에 대해 세뇌박해를 진행했다. ‘610’의 사악한 압력으로 건설은행의 관련 책임자는 타협해 천빙난의 직업을 중지했다.

당시 양펑의 모친은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있었는데, ‘610’과 건설은행의 관련 인원은 천빙난에 대해 점점 강요했다. 그녀에게 극심한 정신적 압력, 심각한 영향을 조성해 그녀의 일상적인 생활을 교란했다. 나이 어린 아이 솽솽도 보살핌을 잘 받을 수 없게 되어, 갑자기 기관지 천식에 걸려 또 병원에 입원했으며, 또 의료비 8백여 위안(약 13만 원)을 썼다.

양펑의 아내에 대한 박해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사악한 ‘610’은 여전히 양펑 장모인 전 웨이팡시 정부 법제국 부국장 위구이팡에 대한 박해를 놓치지 않았다. 부득이 위구이팡과 딸 천빙난은 차례로 집을 떠나, 외지에서 3개월 넘게 유랑했다. 그 기간 천빙난의 3살 된 딸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양펑의 모친이 혼자서 돌보았다.

두 번째 집중적인 박해를 당하다

2003년 이후 양펑이 유랑생활을 한 기간부터, 웨이팡 공안국 국가보안지대, 쿠이원 공안분국 국가보안대대 악인은, 여러 차례 그의 아내 천빙난, 위구이팡, 천모린과 양펑의 모친을 교란한 적이 있다. 천모리는 오랫동안 여러 방면의 교란 박해 속에 처했던 이유로, 더군다나 아내, 딸이 납치, 불법 노동교양을 당하고 사위가 붙잡히고 공직에서 해고당해 유랑생활을 하며 집이 있어도 돌아올 수 없게 되었으며, 사돈댁이 불법 감금당한 등 각종 박해를 당해, 심신에 극심한 손상, 상해를 입었다. 그래서 2년 전 불행히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는 본래 박해의 고통 속에 처한 위구이팡과 그의 자녀로 하여금 더욱 설상가상이 되게 헸다.

양펑의 딸 솽솽은 세 살 때, 한때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의 사랑을 박탈당했다. 5년 후인 2008년, 재난이 또 한 차례 닥쳐왔다. 8살인 솽솽은 아직 꿈속에서 헤매다가 공갈 협박하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잇달아 어머니와 함께 악도에게 납치돼 구치소에 감금당했다. 같은 날, 외할머니도 불법 감금당했다. 7년 후인 오늘, 15살인 솽솽은 거듭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의 사랑을 박탈당했다.

2008년 7월 9일 아침 6시가 가까워, 악도 황웨이롄(黃維連)을 우두머리로 한 웨이팡시 공안국에서는 10여 명의 악독한 경찰을 파견해 따로따로 개발구 위구이팡과 그의 딸 천빙난의 숙소를 포위했다. 그녀들이 문을 열지 않자, 악도는 창문 위의 보호망을 비틀어 열고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악도들은 불법으로 주거를 침입한 뒤, 곧 함부로 뒤졌다. 이어서 녹화를 찍었는데, 강탈한 물품은 상세하지 않다. 위구이팡은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으나, 그들은 듣지 않고 각각 그들 모녀를 납치했다. 당시 위구이팡의 남편 천모린은 마침 딸 천빙난의 집으로 밥을 가져갔다가, 사악에게 야만적인 폭행을 당해 기절해 바닥에 쓰러져 병원에 보내졌다.

위구이팡, 천빙난은 구치소에 20여 일 동안 불법 감금당한 뒤, 모두 산둥 왕춘(王村) 노동교양소로 이송돼 1년의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다. 위구이팡의 혈압이 아주 높아 노동교양소에서 수감을 거부했다. 되돌아온 뒤, 또 웨이팡 악인에 의해 병원에 보내져 24시간 동안 감시 박해를 당했다. 천빙난은 산둥성 왕춘 노동교양소에서 1년 동안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했다.

지금 위구이팡과 그의 친인들은 거듭 납치 불법 감금을 당했는데, 위구이팡 노인은 머리가 구타로 터졌다. 그들은 모두 합법적인 국민으로, 인신의 자유는 법률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 친척을 방문하고 놀러 가고 책을 읽은 것이 무슨 법을 위반한다는 것인가?

이곳에서 모든 정의로운 인사에게 위구이팡과 그의 친인이 납치당한 사건에 높은 관심을 두도록 호소한다. 그리고 동포들이 파룬궁 진상을 요해하여 명백한 선택을 하며, 중공 사당을 멀리하고 자신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수 있게 하길 바란다.

관련 박해단위와 인원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4년 7월 2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7/24/2951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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