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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교 박해로 간질병에 걸려도, 두수후이 거듭 억울한 재판에 직면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산시보도) 산시(陝西) 몐현(勉縣) 도시건설국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한 두수후이(杜淑慧.女.64)는 2013년 9월에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에 납치되었다. 그 후 2014년 4월 9일 한중시(漢中市) 법원에서는 변호사와 그의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은밀하게 파룬궁(法輪功) 수련생 두수후이, 두수밍(杜淑明), 장리핑(張莉萍), 왕신롄(王新蓮) 등 4명에 대한 재판을 개정했다. 그런데 두수후이는 감금된 그 기간 동안에 간질병이 도져, 족쇄는 두 발이 경련을 일으킬 때마다 바닥을 쳤다.

두수후이는 수차례 중공에게 납치, 감금, 갈취, 노동교양처분 등을 당했다. 2002년 시안(西安) 여자노동교양소에 불법적으로 감금됐을 때, 여러 차례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교도관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벽과 땅바닥, 철제 침대에 부딪치게 하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머리에 중상을 입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간질병이 후유증으로 되었다. 치아는 모두 부러지고 머리카락도 죄다 뽑혀나갔다. 두수후이는 지금 한중시 한타이(漢台) 구치소에 감금당해 있다. 다음은 그녀가 자술한 내용이다.

박해로 여러 차례 간질병이 발작을 일으키다

나는 2013년 9월 26일 저녁 집안에 있다가, 갑자기 집안으로 들이닥친 몐현 공안국 국가보안경찰에게 납치되어 청둥(城東) 파출소로 연행됐다.후쥔젠(胡軍建) 악경(사악한 경찰관)은 우리 집을 수색하여 나의 퇴직월급카드, 현금 2천 여 위안, 신분증, 핸드폰, 컴퓨터, 프린터기 등 개인의 금품을 강탈해 갔다. 그리고는 감시인에게, 나를 심문의자에 2일 동안 주야간으로 채워두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나는 간질병이여러차례 경련을 일으켜도 그들은관여하지않아 나의몸은 심각한 상해를 입었다.

후쥔젠은 심문하러 와서 다짜고짜 나에게, 형법 33조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는 불법(佛法)이고 정법입니다. 공안부에서 인정한 중국의 14개 종류의 사교 중에는 파룬궁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후라는 자는 또 “당신의 그까짓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고 말했다. 그런데 9월 28일 공안국에서 국장급 2명이 와서 후에게 “지금 파룬궁을 잘 아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 당신이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후쥔젠은 국장이 나가는 것을 보고, 나에게 “당신의 그 돈을 내가 돌려주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진실로 믿었다. 나는 당일 그에 의해 한타이구 구치소로 압송됐다. 10월 초 후쥔젠이 나를 심문할 때 정색을 하며 “당신의 돈은 사건을 처리하는 데 써버렸으니, 이후에 다시는 돌려달라고 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내가 그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속이느냐고 묻자, 그는 욕설을 퍼부었는데 듣기조차 민망했다. 심문을 하는 내내 욕설을 했다. 간질병이 끊임없이 발작을 일으키자, 협조경찰이 의사를 불러다가 나의 인중 등 혈점을 눌렀지만 효과가 없었다. 6~7차례나 심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매번 병이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만 감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에 대한 모든 기록은, 후쥔젠이 다른 사람에게 꾸민 말을 적어 넣게 한 것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후 그자만 알고 있을 뿐이다. 모든 서류에 한 글자도 서명하지 않았는데, 내용이 무엇인지를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2013년 10월부터 2014년 4월까지, 간질병 발작은 반복됐지만 증상이 심해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하는 중, 밥을 먹는 중, 밤에 당직을 서는 중에 수시로 바닥에 쓰러져 발작을 일으켰는데, 다행히 마음씨 좋은 감방 사람이 여러모로 도와주고 보살펴 주었다. 간질병이 발작하자 담결석증도 심해져 고통이 가중되었다.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마실 수도 없었으며, 잠도 잘 수가 없었다. 한 번 발작하게 되면 면 10여 일간 지속됐다. 구치소 교도관간부와 의사는 4차례나 나를 데리고 한중2병원과 한중중심병원, 3201병원에서 B형초음파 진단기 검사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담낭에 결석이 가득 찬 증상, 담낭위축증상, 담즙분비불순증상(不分泌膽汁)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제때에 수술을 받아 치료를 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 구치소책임자는 여러 차례 검토를 한 후, 나의 병세에 대해 두 차례나 몐현 사건처리담당 상부에 서신보고를 했다.

나의 남편, 아들, 자매는 몐현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검찰원, 법원 등을 수차례 찾아다녔다. 3개 기관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들의 말로는, 나의 경우는 32가지 보석의 상황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그들은 가족들이 찾아도 일체 만나주지 않고 있다.

나는 한타이 구치소에 감금당한 지 8개월이 된 이후, 생존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격려하며 발효한 만두 하나를 억지로 먹었다. 밥은 너무 딱딱해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 담낭증세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담낭은 늑골 근처에 매달려 있어 손으로 만질 수 있었으며늘 아팠다. 몸은 하루하루 수척해져서, 원래 75kg의 체중이 50kg로 줄었다. 나는 얼마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酷刑演示:手铐脚镣

고문 시연: 수갑 족쇄(手銬腳鐐)

2014년 3월 25일, 몐현 법원에서 나를 심문하러 와서 10일 후에 재판을 개정한다는 고지를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국선)변호사를 선임해 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2013년 11월 나에게는 이미 변호사가 선임됐는데, 그 변호사는 단 한 번 나를 면회한 후 다시는 오지 않았다, 4월 9일 임시로 마련된 한중 중급인민법원 뒤 건물의 강당 대청에서 재판이 개정됐다. 우리 일행 왕신롄(王新蓮), 장신웨(張馨月), 두수밍(杜淑明), 두수후이(杜淑慧)) 등 4명은 족쇄와 수갑을 차고 법정으로 끌려 나갔는데, 방청석에는 우리 4명의 가족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재판 중에 간질병이 발작을 일으켰는데, 족쇄가 두 발이 경련을 일으키자 따라서 바닥을 쳤다. 같이 불법적으로 재판을 받던 다른 파룬궁수련생이 풀어주라는 요구를 하여, 그제야 쇠고랑을 풀어주었다. 나는 심문실로 옮겨져 휴식을 취하게 했다. 다른 파룬궁수련생은 스스로 변론을 하려고 했지만 법관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검찰관은 나에게 7~9년형을 요구하는 억울한 구형을 하여, 나는 상소를 하려고 했다.

납치, 금전사취, 불법 노동교양처분

2001년 3월, 나는 장기간동안 국가보안대대 경찰 후쥔젠 한 무리에게 감시, 미행, 교란 등을 당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났다. 베이징으로 청원하러가서 막 톈안먼 광장으로 들어섰는데 후쥔젠에게 발견되어 납치된 후, 베이징 주재 한중사무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후는 사무실의 여자 종사자에게 경찰관이라고 사칭하게 한 후 나의 몸수색을 시켜 현금 2,980위안(51만원 상당)을 강탈했다. 그런 후 후쥔젠이 직접 나에게 임시영수증을 발급하더니, 나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윗주머니에 넣으면서 “당신이 지니고 있으면 불편하니,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몐현으로 돌아가서 당신의 남편에게 넘겨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몐현으로 돌아와서 2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게 되었다. 나의 남편은 5~6차례나 후를 찾아가서 그 돈을 반환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그는 얼버무리며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내가 2003년 노동교양소를 출소해 집으로 돌아온 뒤 다시 후에게 돈을 달라고 했는데, 그자는 나를 피하면서 만나주지도 않았다. 네 번째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안색을 바꾸며 “돈은 우리가 몰수했습니다. 다시 와서 돈을 달라고 하면 당신에게 3년형의 판결을 내리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국가보안대대의 사람 모두 그 현장에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그 돈을 돌려 달라고 하지 말라 하면서, 아무리 요구해도 받아내지 못하니 포기하라고 했다. 그 후란 자는 나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2002년 7월 후쥔젠은 한 사람을 데리고 노동교양소로 와서 나와 몐현의 또 다른 다른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상황에 대한 심문을 했다. 당시 내가 몇 마디를 질문하자, 그는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져서 머리를 숙인 채, 근 3페이지나 되는 기록을 스스로 쓴 후 나에게 서명하라고 했다. 내가 서명을 거부하자, 함께 온 그중 한 사람이 “그녀가 쓰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 하고 말하자, 후는 서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면서 그래도 모두 쓸모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더는 상대하지 않았다. 노동교양소에서 학대를 당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몐현에서 그 당시 20여 명을 불법적으로 납치하여, 15명은 재판에 회부되고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는데, 이로 인하여 국가보안대대에서는 상부로부터 장려금 10만 위안을 받았으며, 후쥔젠은 공로를 인정받아 중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의 파룬궁수련생은 집을 나가지도 않았는데, 후란 그자가 억지로 대교 위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란 진상표어를 붙였다는 억지를 부려 그에게 3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 파룬궁수련생이 자신이 한 것이라고 승인했는데도, 후 모는 “당신이 한 말은 너무 늦었다.”고 하고는 그대로 그 수련생을 짜오쯔허(棗子河)로 보내 3년의 노동교양감금을 시켰다.

남편은 원래 몸이 매우 건강했다.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하여, 현지 국가보안이 우리 집에 대해 수차례나 교란과 가택수색, 벌과금을 부과하거나 납치 감금을 감행하면서부터 남편은 매번 놀라거나 모욕을 당하고, 공갈협박 등을 당하게 되자, 현기증, 조바심, 고혈압증 등의 질병을 앓게 되었다, 내가 노동교양처분을 당하던 동안 남편은 늘 병이 도져 침대를 떠나지 못했는데, 8, 9일을 그렇게 지내도 누구 한사람 찾는 사람도 보살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마음을 졸이며 나날을 보냈다. 병세가 심각해지고 있는 그는 치료를 받는 중에도 도처로 다니며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다. 그는 내가 하루 빨리 석방되어 수술을 받기를 바라며 자신을 보살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문장발표: 2014년 7월 2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7/21/2949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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