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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닝 단둥시 간호사 왕쉐메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경위

[밍후이왕] 랴오닝성(遼寧省) 단둥시(丹東市) 왕쉐메이(王雪梅,女)는 단둥 부녀아동병원에서 근무하는데,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해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다. 그녀는 파룬궁이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박해를 당하게 되면서 여러 차례 불법적으로 납치되어 노동교양처분(이하 노교소)의 박해를 당했으며, 또 정신병원에 강제로 감금되어 박해를 받으면서 직장에서 강제 해고를 당했으므로, 직장에 정당하게 복직을 요구했다.

그녀가 강제로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박해당한 경위

나의 이름은 왕쉐메이(王雪梅)로 금년 53세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한 후 부녀아동병원에 배치되어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근무했다. 1996년 임파선암에 걸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가 파룬궁을 수련한 뒤에 암이 완쾌되었다고 하여 매우 놀랐다. 당시 나는 심장병과 류머티즘 등의 질병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불면증으로 밤이고 낮이고 잠들 수 없어서 괴로움이 무척 컸다. 그때나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으므로 생활형편이 몹시 어려웠다. 그리고 결혼생활의 파탄으로 생활에 대한 의욕마저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그런데 파룬궁을 배운 뒤, 전신의 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정신적인 면모도 일신되어 생활에 대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이 때부터 이 공법은 내 맘속에 뿌리를 내려 나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듯 했다.

1999년 7월에 장쩌민(江澤民)은,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권력으로 법을 무시한 채 파룬궁에 박해를 가했다. 마침 나는 휴가기간이라 다른 사람과 함께 가서 (청원의)진실한 말을 했다. 그로부터 납치되고 감금되었는데, 직장 책임자가 공산당정부의 지시를 받고 나를 직장으로 인수해갔다. 그러나 며칠 뒤 직장 책임자에게 속아 정신병원으로 실려가 64일 동안 불법적인 감금을 당했으며, 그 대가로 직장에서는 7천 여 위안(130만원)의 돈을 중공에 지불해야만 했다.

모두들, 내가 건강하고 온전한 정신을 소유한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를 중증 정신질환자와 함께 갇혀 있게 했다. 더구나 이 기간 동안 의사는 신경계통을 손상시키는 약물을 강제로 투여해 나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손상을 입혔다. 그들 말로는 나의 직장 모모 책임자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고 했다. 그때 나는 정신적으로 받게 되는 압력이 너무 커서 심신에 매우 큰 상해를 입었다.

그런 후 며칠 뒤, 직장 책임자는 차량으로 2백여 리 되는 농촌에 거주하는 70 대인 나의 부친을 정신병원으로 데려와 “왕쉐메이가 사망해도 병원에서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내용에 서명하라고 핍박했다. 나는 그들이무엇때문에 날 그토록 살해하려고 하는지, 내가 어느 법률조항을 위반했는지 영문을몰랐다. 나는 당시 겨우 30대로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있었는데, 내가 죽는다면 아이는 어찌되겠는가? 나는 그들에게 살해당할까봐 몹시 두려웠다. 많은 방법을 생각하며 (마굴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모두 이루지 못했다. 이런 유무형의 압력 때문에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어서 안절부절못했다. 극도의 긴장으로 정신상태는 무너지기 직전에 이르렀고, 몸은 이미 망가졌다.

2000년 3월 17일, 직장에서는 부득불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박해의)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한동안의 기간이 지났는데도 방향감각을 잃어 지역의 식별이 어려워 단독외출이 어려웠는데 나가면 늘 길을 잘못 걸었다. 거기에다가 또 직장으로부터 해고통지를 받았는데, 2000년 3월 27일 직장으로부터 ‘왕쉐메이 동지의 제명에 관한 결정’이란 통지를 받았다. 결정된 날짜는 이미 2000년 3월 16일이었다. 직장에서는 내가 납치되어 정신병에 감금되자 바로 관련규정을 무시한 채 터무니없는 교묘한 명목을 들어 ‘제명처분’을 내렸던 것이다. 나는 직장의 일방적인 ‘제명결정’에 승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직장의 단순노동계약직(合同工) 대우도 거부하며 정식복직을 요구했다.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들이 나의 부친을 정신병원으로 데려와서 정신질환자들 방에 함께 수감되어 있는 딸을 보게 했을 때, 그의 심정은 예리한 칼로 가슴을 에이는듯했으리라! 아버지는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하소연했다. “얘야, 나는 늙었다. 넌 온전하게 살아야 한다. 늙은 나는 젊은 네가 먼저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당시 아버지의두 손은 떨렸고 얼굴은 실룩거렸다.

나의 부친은 노병(老兵)이었는데, 나는 이렇게 성장한 지금까지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속담에, “대장부는 눈물이 있으되, 쉬이 흘리지 않는다.”고 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그때 부친은 눈물을 흘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으로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부친은, “얘야, 나는 늙었다.”고 했던 이 몇 마디 말은,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으며, 또 어찌할 방안도 없음을 나타낸 절박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부친은 또 그에게 서명하도록 핍박한, “왕쉐메이가 죽어도 정신병원에서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그 몇 글자를 어떻게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딸을 정신병원에 가둬 넣고, 오늘은 또 그녀를 살해하려고 하는데, 한 노인이 어떻게 책임지고 감당하겠는가?

설 명절에는 원래 모든 가족이 단란하게 모이는 날이다. 그러나 나는 집에 어린 딸을 남긴 채 정신병원으로 납치되어 왔다. 2000년 정월 초나흗날 딸은 엄마를 만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기쁘게 다가가서 딸을 안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딸에게 밀렸다. 딸은 울면서 “엄마, 엄마는 무엇 때문에 저를 원하지 않으세요?”, “설인데 엄마는 왜, 집으로 돌아와 저와 함께 하지 않나요?’라고 원망했다. 나는 울면서 아이에게 “엄마가 널 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이곳에 가두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서 가지 못한 것이다!”라고 설명해주고, 내가 아이에게 접근할수록 아이는 점점 뒤로 물러섰다. 현장에서 이 장면을 본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원래 아이는 엄마를 그리워했는데, 어떤 사람이, “너의 엄마는 파룬궁을 연마해서 너를 원하지 않는다.”, “너의 엄마는 파룬궁을 연마해서 정신병에 걸렸어.” 하는 등등의 거짓말을 해주었던 것이다. 아이는 너무 어려 그들의 거짓말을 정말로 믿었다. 어떻게 설명을 해도 믿지 않았으며, 또 감히 엄마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어린 아이의 마음에 매우 큰 상처를 입혔다. 우리에게는 모두 자식이 있다. (중공에 의해) 내가 상처를 입는 동시에 또 어린 딸도 이런 잔혹한 깊은 상처를 입었다.

정신병원 책임자와 의사는 다음과 같이 협의했다. “왕쉐메이가 입원해 있는 기간동안 누구도 스스로 병원으로 찾아와 면회하지 못한다. 반드시 담당 의무과에서 발급한 증명서를 소지해야 면회를 할 수 있다. 사전에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면 딸, 여동생, 친척, 동료 등 모든 가족과 친지를 포함해서 누구도 면회할 수 없다.” 또한 정신병원 당직실 게시판과 병력서에 “왕쉐메이 탈출방지”란 주의 글을 명시하기도 했다. 딸이 어머니를 보는 것조차도 ‘결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정신병원은 나를, 병세가 가장 심각한 광조형(狂噪型) 정신분렬증 환자와 함께 수감했다. 이 사람들은 묶여서 밤낮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한 시각도 쉬지 않고 노래 부르고 소리 지르며 춤을 췄다. 무거운 쇠침대도 방안에서 방밖으로 끌어내어 침대 매트리스를 뜯어내고, 장난질을 쳤으며, 어떤 이는 침대 밑에 기어들어갔는데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또 어떤 이는 의사를 ‘남편’이라고 불렀고, 간호사를 보면 ‘어머니’라고 소리쳤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밤낮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머리가 무겁고 다리가 떨려 침대에서 내리지 못했고, 아주 많이 수척해졌다. 나는 몇 차례나 방을 바꿔달라고 요구했으나, 의사와 간호사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당신은 반드시 중증환자와 마찬가지로 이런 특수간호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특수간호’와 함께 매일 세 끼마저 몇 명의 정신병환자가 ‘시중’을 들었는데, 그녀들은 자기가 먹고 남은 밥과 반찬을 내가 먹고 있는 밥그릇에 쏟아 부었고, 어떤 때는 미처 다 먹지도 못했는데, 밥그릇을 가져다가 다른 사람 밥그릇에 섞어주었다. 또 속옷을 빨아 놓으면 아직 채마르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입고 있었으며, 집에서 가져온 식품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몽땅 가져갔고, 과일은 주물러 터뜨리기 일쑤였다.

집권자는 (정상인)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넣고 박해를 가하고, 한편으로는 거짓말을 꾸며대며 도처에서 소문을 퍼뜨렸는데, “왕쉐메이가 파룬궁을 연마해서 정신병에 걸려 일도 하지 않고, 가정도 꾸리지 않고, 어린 자식도 돌보지 않는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트린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왕쉐이메이가 (스스로)사직했다는 등등을 말했다. 당시 나는 겨우 30여 세로, 한창 외모도 세련되고 재능이 넘치는 시기였는데도 황당하게 이런 괴상한 곳에 갇혔다. 당시 나의 처지가 얼마나 간고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감옥은 본래 나쁜 사람을 감금하는 곳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피해를 준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직장의 이익에 조금도 손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어디에서나 다른 사람을 위하고 배려해 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감금을 당했는지?! 무엇 때문에 직업을 잃었는지? 무엇 때문에 생활은 이처럼 간고한지?

직장에서 ‘해고’당한 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호텔에서 종업원으로 일했고, 진료소를 도와 일했으며, 약방에서도 일을 한 적이 있다. 매번 아이가 학비를 납부하는 시기가 되면 이곳저곳에서 빌려야 했다. 독신 여인의 생활이 얼마나 간고한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래된 상처와 마음의 아픔을 지니고 비바람 속에서 간고한 14년을 걸어왔다. 이런 고통과 상처는 영원히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서 가셔지지 않는다.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어 다시는 어떤 상해도 입고 싶지 않다.

내가 착실하게 근무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신생아과에서 근무하는 기간, 책임자가 나에게 배치한 일을 나는 처음부터 “아니요”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야근에 일손이 부족하면 야근을 했고, 낮에 검사 팀에 사람이 없으면 나는 곧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일을 했다. 상부의 검사준비를 위해 책임자가 이런 저런 일을 시키면 군소리 없이 협력했다. 매주 자신이 맡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이틀 동안 검사 팀의 근무를 감당하기도 했다. 위급환자를 응급처치 할 때는 일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사를 놓고, 채혈하고, 산소를 공급해 주면서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곳에 공백이 나타나면 나는 그곳에 있었는데, 이런 나를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나는 받지 말아야 할 처벌을 이미 그렇게 많이 경험했다. 다시는 직장 책임자가 말하는 “당신은 직장과 어떠한 관계도 없다.”고 경시하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근무를 해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하므로, 나는 돌아가 원래 근무지에서 근무를 해야 함이 마땅하다.

문장발표: 2014년 5월 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5/6/2909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