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롄 군계열 파룬궁수련생이 중공에게 박해당한 사실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다롄(大連) 지역은 주둔군이 가장 많은 도시 중의 하나이다. 1999년 7월 20일 전, 군계열의 장군에서 아래로는 사병까지 수백,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파룬궁을 수련했다. 듣기로는, 당시 다롄 해군함정학원(海軍艦艇學院)에만 해도 2백 여 명이 수련을 했는데, 그 중에 대령(大校), 상교계급(上校軍銜)의 사단급(師團級) 군관과 학원이 있었으며, 군대 퇴직 간부 휴양소,이직 휴양·정년퇴직한 노간부에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어떤 이는 일가족 여럿이 수련을 했다 한다. 연공을 한 뒤, 그들은 매우 빨리 ‘약 봉지’를 던져버리고 몸이 건강하고 도덕이 고상한 사람이 되었다.
1998년 2월 21일, 《다롄 석간신문》에서는 다롄 해군함정학원 파룬궁수련생 위안훙춘(袁紅存)이 사람을 구한 사적을 보도했다. 98년 2월 14일 오후, 위안훙춘은 다롄 즈유하(自由河)의 3미터나 되는 얼음 구멍이에 빠진 아이를 구출해 주어 학원에서는 그에게 영광스럽게 2등공을 기록해 주었다. 당시 위안훙춘은 이미 파룬궁을 수련한지 2년이 되었다. 위안훙춘처럼 파룬궁을 수련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례는 파룬궁 수련자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파룬궁의 이념 ‘진선인(真善忍)’이 결정한 것으로, 일을 함에 먼저 다른 사람을 고려해 주고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뒤, 군계열의 파룬궁수련생도 극심한 마난을 경험했는데, 심지어 여러 사람이 박해로 사망했거나 불법 판결을 당했다.
장군의 억울한 죽음
딩한(丁翰) 장군, 향년 77세, 전 해군뤼순(旅順)기지 정치부의 대리 주임이자 군급(軍級) 노간부로, 1996년 5월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수련 후, 병이 모두 완쾌되고 심신이 건강했다. 딩한 장군이 수련하기 전후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과 신기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향 하에 백 명이 넘는 사람이 대법 수련에 들었다고 한다.
딩한 장군은 일생 동안 ‘마르크스·레닌 이론’을 연구한 무신론자에서 파룬궁수련생이 되어 군대 내외에 영향이 매우 컸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해 다롄 라오후탄(老虎灘) 퇴직간부 휴양소에서는 연속 3차례나 당소조회의를 열어, 딩한에 대해 강압적인 박해를 실시해 강제로 그에게 수련을 포기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딩한은 뇌혈전 증상이 나타났는데, 결국 같은 해 11월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직 휴양 간부의 죽음
양위산(楊玉山), 향년 76세, 다렌시 군대 이직 휴양·정년 퇴직간부 제1복무관리센터의 퇴직간부이다. 1994년 7월, 양위산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뇨병이 완쾌되고 병이 없자 온몸이 가벼웠으며 매우 건강했다. 아내는 파룬궁을 수련한 뒤, 다년간의 산후병, 빈혈, 저혈압 등의 질병이 모두 완쾌되어 개인적으로는 물론 직장의 의료비를 절약했다. 그들은 매일 법공부, 연공을 하면서 일가족은 행복하고 유쾌한 생활을 보냈다.
양위산(楊玉山)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뒤, 양위산과 아내는 여러 차례 납치, 가택수색, 벌금을 부과당했다. 구이린가(桂林街) 파출소에서 악독한 경찰은 양위산의 머리칼을 잡고 벽에 부딪히고 귀뺨을 때렸는데, 줄곧 그가 구타로 땅에 쓰러질 때까지 구타했다. 코에서는 선혈이 줄줄 흘러 내렸다. 그때 그는 이미 70여 세였다.
고문 시연:머리칼을 틀어쥐고 벽에 부딪히기
2007년, 다롄 다보스회의 시기, 양위산은 8일 동안 연금되어 대변을 볼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늘 넘어지고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그리고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하여 반신불수가 되어 생활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었다. 2008년 9월 5일, 양위산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4년 5월 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5/3/2903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