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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된 박해, 랴오닝 시펑현 촌민 왕원장 억울하게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랴오닝성(遼寧省) 시펑(西豐)현의 순박하고 선량한 촌민 왕원장(王文章)은 거듭 된 박해를 당했다. 그는 2009년 3월에 납치돼 4년의 불법 판결을 당했고, 선양(瀋陽) 둥링(東陵)감옥에서 박해 당해 뇌혈전 증상이 나타났다. 가족이 감옥 측에 8천 위안을 갈취당해서야 2013년 초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았다’. 6개월 후에 마비되어 몸져누웠는데, 결국 2014년 3월 2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다.

왕원장은 시펑현 바이위(柏榆)향 사람으로서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순박했다. 1996년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뒤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다. 나쁜 성격을 고치고 술 담배를 끊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질병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더욱 낙천적이고 명랑해졌으며 득실을 따지지 않았는데, 몸에도 매우 큰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또 가정은 더욱 화목해졌고, 자신이 향에서 성심으로 경영하는 일용 백화점도 장사가 매우 잘 되었다.

그러나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공포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왕원장은 파룬궁수련생으로서 시종 수련을 견지한 동시에 진상을 알렸다. 이로 인해 중공 시펑 당국에 수차례 박해를 당했고 원래 행복하던 가정도 참혹하게 박해를 당했다.

1999년 7월 20일 이후, 왕원장은 파룬따파를 위해 청원하고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현지 국가보안에게 교란, 공갈협박을 당해 한때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 후에 향 정부에서는 무리하게 이른바 ‘벌금’ 만 위안을 납부하도록 요구했다. 이후로 왕원장의 집은 늘 현지 공안국, 파출소 및 현 인민공사(縣社)의 교란을 받았다. 어느 날 아침, 왕원장의 아내가 막 일어나자마자 현지 파출소 류전칭(劉振淸)을 우두머리로 한 악인들이 왕원장의 집에 들이닥쳤는데, 어떠한 물품을 수색해내지 못한 상황 하에 다짜고짜 그녀를 파출소로 납치했다. 게다가 보름 동안 불법 구류했다.

2000년 7월, 왕원장은 진상자료를 전한 것 때문에 미행당했다. 시펑의 악독한 경찰은 그의 집으로 뛰어들어 왕원장을 땅에 눌러 넘어뜨리고는 불법적인 가택수색을 감행해 녹음기, 텔레비전 등 물품을 수색해갔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현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요원 리청제(李成傑), 향 파출소 소장 리샤오보(李曉波)이다. 그 후 그들은 왕원장에게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내려 톄링(鐵嶺)교양원에서 박해했다.

2009년 3월 2일, 왕원장은 시펑현 핑강향(平崗鄉) 자유 시장에서 진상자료를 나눠주다가 악인에게 무고를 당해 현지 파출소로 납치됐다. 당시 그에게 야만적으로 검은 머리씌우개를 씌우고 두 손을 뒤로 결박해 경찰차에 끌어올렸다. 왕원장은 호주머니의 돈도 모조리 강탈당했고, 몸에 지닌 증명서 및 사업자등록증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

오후 한 시쯤, 핑강향 파출소 경찰차 4~5대(총 20여 명)가 와서 왕원장의 주택을 2시간 동안이나 포위했다. 맨 마지막에 왕원장을 협박해 집으로 돌아가서 집 문을 비틀어 연 뒤, 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불법으로 노트북 컴퓨터 한 대, 컬러잉크젯 프린터 한 대, 32인치 컬러텔레비전 한 대, DVD 및 VCD 기계 한 대, 대법 서적, 션윈 공연시디, 인민폐 3~4백 위안 및 소량의 각종 진상자료를 수색해 갔다. 왕원장이 30여 년 동안 경영하던 소매점도 이로 인해 핍박에 못 이겨 문을 닫고 영업을 중지당했다.

잇달아 악독한 경찰은 왕원장을 시펑현 구치소에 불법 감금하고 가족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친척이 3백 여 위안어치 담배를 사줘서야 면회를 허락받았다. 구치소에 있던 기간, 3월의 날씨는 매우 추웠으나 구치소에서는 그에게 이불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우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잠을 자게 했다.

2009년 7월 9일, 시펑 법원은 왕원장의 가족에게 통지하지 않고 비밀리에 법정 심문을 감행해 왕원장에게 4년의 불법 판결을 내렸다. 그 후 선양 둥링감옥에 불법 감금했다.

감옥에 있던 기간, 강제적으로 ‘전향’시키는 각종 잔인한 박해를 당한 탓에 왕원장은 건강이 급격히 변했다. 2010년 6월에 맹장염 증상이 나타났는데, 감옥 측은 수술비 2천 3백 위안을 그의 가족이 부담하도록 했다.

2012년 12월, 왕원장은 뇌혈전 증상이 나타났으나 감옥 측은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았다. 가족이 그를 보았을 때는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감옥 측은 ‘병보석을 받아 치료받게’ 해달라는 가족의 요구를 승낙했으나 전후로 2개월 넘게 시간을 끌었다. 왕원장의 가족은 온갖 난처함과 곡절을 겪었고, 거기에 또 감옥 측에 의해 8천 위안을 갈취당해서야 사람을 데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왕원장의 석방 날짜까지 이미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왕원장은 몸이 호전되지 않아 줄곧 생활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었다. 6개월이 지난 뒤 마비되어 몸져누웠고, 결국 2014년 3월 2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4년 4월 2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4/22/2903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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