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성 보도) 하얼빈(哈爾濱) 파룬궁수련생 양민(楊敏,여)은 2014년 2월 27일에 션윈공연CD를 배포할 때 하얼빈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주관 ‘610’의 부서기 친(秦) 모씨가 불러 온 경찰에게 납치돼 보름 동안 불법 구류 당했다. 그들은 지금 또 양민을 검찰원에 불법 기소하려 한다.
양민의 딸은 한창 모친을 구출하고 있다. 그녀는 박해에 참여한 사람에게 절대로 박해를 직업으로 삼지 말며 또 그녀에게 어머니를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양민의 딸은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어머니의 아름다운 변화와 중공(중국공산당)에게 박해당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올해 2월 27일, 나의 어머니는 진안(金安) 상업빌딩에서 한 남자에게 션윈공연CD를 선사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감사를 표하지 않고 반대로 어머니를 상즈(尙志) 파출소로 보냈다. 그 후 어머니는 구치소로 보내져 보름간 구류를 당했는데 파룬궁을 수련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붙잡힌 후 81세인 외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각 부서로 가서 어머니의 상황을 문의하며 노인과 아이를 봐서라도 우리에게 가족을 만나게 하고, 더욱이 어머니가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전혀 결과가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보름이 빨리 지나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보름이 지났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형사구류처분으로 옮겨졌고, 이어서 ‘사건’은 또 다오리구(道裏區) 검찰원으로 옮겨졌다는 통지를 받았다. 이것은 어머니가 불법 판결에 직면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겪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가 8세였을 때,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퇴직에 직면했다. 원래 부유하지 못하던 우리 가정은 설상가상이 됐다. 36세인 어머니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식구를 벌어 먹이는 한편, 또 집안일을 모두 해야 했다. 여성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매일 이른 아침이면 어머니는 일찍 일어나 밥을 지은 다음 나를 학교로 보내주었다. 하루 종일 고생스럽게 일을 한 후 저녁이면 또 학교로 와서 나를 데려와야 했다. 어머니는 나의 학습에 관심을 가지셨고, 또 나의 어린 마음이 가정의 불행으로 상처를 받고 밖에서 업신여김을 당할까 걱정하셨다. 사실 어머니 자신의 마음도 매우 고생스러웠다. 굳센 그녀는 혼자일 때면 늘 눈물로 보냈으나 또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얼굴에 웃음을 띠어야 했다. 아마 잃은 것이 너무 많다고 여겼고, 또 자신이 다시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쟁탈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그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녀에게 인색하고, 둘째 고모와 막내 고모를 편애하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마음을 가졌다. 그녀의 한 면은 선량하고 나약했으나 또 한 면은 이기적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어머니였다.
심리적 압력이 컸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몸도 갈수록 상황이 나빠졌는데 심각한 저혈압, 저혈당으로 그녀는 수시로 쓰러질 때도 있었다. 더구나 골반내염, 부속기염은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주었다. 그때 나는 정말 빨리 성장해 어머니의 걱정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는 늘 책 한 권을 보았는데 보기만 하면 한밤중까지 보았다. 그리고 늘 각종 동작을 했다. 내가 어머니에게 그건 무슨 책인지를 묻자 나에게 “내가 보는 책은 ‘전법륜(轉法輪)’이다. 나는 파룬궁을 연마한다”고 알려주셨다. “뭐라고요? 파룬궁? 톈안먼으로 가서 분신자살한 그 사람들 아닌가요? 너무 무서워요!” 나는 감히 자신의 귀를 믿지 못했다. 어머니는 가볍게 말했다. “얘야, 너 아직도 그 소녀 류스잉(劉思影)을 기억하고 있지. 그녀가 기관 절개 수술을 받은 뒤 나흘 째 되는 날에 말을 할 수 있고 노래도 부를 수 있었는데 이것이 우스운 일이 아니냐. 왕진둥(王進東)의 두 다리 사이의 휘발유를 넣은 플라스틱 병은 이치에 따라 말한다면 큰 불에 타서 녹아버려야 하지 않겠니?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연출한 것은 오히려 아무런 손상도 없었지. 이 일은 완전히 거짓말이야. 많은 국가에서도 모두 파룬궁을 연마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른 나라에는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을까? 해외 수련생은 많은 사람이 석사, 박사, 전문가, 학자인데 이 사람들은 모두 매우 이성적이야. 함부로 무엇이나 믿을 수 있겠니?”
비록 어머니의 말을 나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가 정말로 차츰차츰 변해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선 그녀의 건강이 점점 좋아져 수년 간 앓았던 질병이 보이지 않았다. 성격도 점점 쾌활해지고 마음도 넓어져 다시는 자신을 위해 따지지 않았다. 둘째 고모는 새로 지은 할머니의 집을 가져가면서 우리에게는 5만 위안만을 주겠다고 했다. 누구나 하얼빈의 집 가격을 다 알고 있다. 5만 위안으로 화장실도 사지 못한다. 이전에 어머니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며 다시 건물을 분할하려 했을 것이다. 이번에 어머니는 뜻밖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반대로 둘째 고모의 입장을 고려해서 할머니가 86세인데 생활을 전부 둘째 고모, 막내 고모가 보살펴 준다고 매우 고생하니 집도 그들이 가져야 마땅하다고 말해주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진선인(眞ㆍ善ㆍ忍)’ 의 법리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2002년, 우리의 즐거운 생활은 어머니가 파룬궁을 연마해 붙잡히고 노동교양처분을 받은 후부터 바뀌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붙어 함께 살아 왔고, 오직 어머니의 보호로 성장해 온 내가 어떻게 감당할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자신을 보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해놓은 밥은 맛이 없었고 빨아놓은 옷도 늘 깨끗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17세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인생에서 성격이 형성되는 관건 시기였다. 이런 힘든 나의 생활경험은 나의 성격에 슬픔과 열등감을 갖게 했으며 또 두려움이 많아졌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는 어머니가 선량한 좋은 사람인데 왜 노동교양소로 붙잡혀 들어갔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나는 자신도 신화 중에 있는 침향(沉香)처럼 산을 허물고 어머니를 구할 수 있기를 환상했다. 그러나 현실 중에서 나는 오히려 속수무책이었다.
그 후 어머니가 돌아왔다. 어머니는 노동교양소에서 당한 고문, 강제전향 박해를 말씀하셨다. 이런 경험은 줄곧 나를 소름끼치게 했으나 어머니는 오히려 여전히 믿음을 굳게 지키셨다. 그 후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했는데 점차 생활의 어려움을 체험했고 어머니가 이 몇 년간 당한 괴로움과 강한 인내심을 체험했다. 딸로서 나는 이 믿음이 어머니에 대해 일종의 지지이고 일종 힘임을 이해했다. 마치 나무가 뿌리에 대해 말하듯, 만약 대지에 뿌리를 박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마치 나뭇잎처럼 시들어 떨어지고 말라버렸을 것이다. 이것은 어머니에 대한 감수일 뿐만 아니라 다른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감수임을 믿고 있다. 때문에 나는 수련에 대한 믿음을 어찌 주먹으로 때려서 제거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했다. 만약 사람의 마음을 주먹으로 바로 잡는다면, 어찌 또 몇 천 년 이래 공자와 노자의 ‘교화’ 역량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각종 교화 중에 진선인을 가장 순수하고 고상한 것으로 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는가!
졸업 후 나는 직업을 찾았는데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도 있었다. 행복한 생활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는데 어머니가 재차 붙잡히고 예전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또 다시 올지 누가 알았겠는가!
어머니가 첫 번째로 노동교양소로 붙잡혀 들어가셨을 때 어린 나는 세상에 대해 전혀 몰랐고 법률에 대해 전혀 개념이 없었다. 그때 나는 군중에 대해, 사회에 대해 두려움이 생겨 다른 사람이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함에 부딪치면 감히 반박하지 못했고 그들에게 어머니에게 잘못이 없음을 알려 주지 못했다! 나는 자신이 예전에 그렇게 겁이 많음을 경멸했다. 그러나 지금 어머니는 또 거듭 위험에 처했다. 이미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어머니가 난중에 있는 것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둘 수 없다!
며칠 동안 나는 일부 변호사 사무실로 가서 관련 자문을 해서 파룬궁문제에 대해 법률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게 됐다. 접촉한 변호사는 모두 신앙은 무죄이며 우리나라 법률 조목 중에 한 글자도 파룬궁을 언급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파룬궁 탄압은 마치 당시 문화대혁명 운동처럼 황당했기에 파룬궁수련생은 언제든지 죄명을 뒤집어쓰고 판결당해 감옥살이를 할 수도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고한 것이며 정책 집행자야말로 법을 어기고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들은 문화대혁명처럼 대가를 치를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감옥으로 보내려 한 고집 센 그 남자가 생각났다. 듣기에 그 사람이 바로 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에서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사람이라 하는데, 어떤 사람의 말로는 바로 그 사람이 일반인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만약 일반인이었다면 당신의 어머니가 며칠 지나지 않아 풀려났을 것이라고 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면 그 남자든, 아니면 누구든지를 막론하고, 이 몇 년간 줄곧 파룬궁수련생과 만났는데 당신들은 파룬궁수련생이 모두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지 않는가. 누구든 절대로 박해를 직업으로 삼지 말며, 다시는 파룬궁수련생과 가족에게 더욱 큰 고통을 주지 말아야한다. 집권자는 자주 초하루, 정월대보름이 되면 정책을 바꾸는데 당신들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고려해야 한다.
지금 나는 여러분이 면밀하고 신중하며, 공정한 태도로 무조건 나의 어머니 양민(楊敏)을 석방하며, 나에게 단란한 가정을 돌려주도록 간청한다!
문장발표: 2014년 4월 2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4/26/2905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