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보리현(勃利縣) 파룬궁수련생 황야오지(黃耀吉)는 2014년 4월 7일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래, 그는 6차례 납치, 2차례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바로 황야오지가 사망하기 이틀 전, 보리현 ‘610’은 ‘상부’의 지시를 받고 회의를 소집해, 파룬궁수련생이 있는 직장과 지역 사회, 가도 등에 자신의 사람을 관할하고 잘 지키며, 모두 집에 있는지, 집에서 무엇을 하는지, 외출하지 말라는 등 명령을 내렸다. 또한, 공포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인심이 흉흉해 편안하게 있을 수 없게 했다. ‘610’은 중공이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 기구로, 헌법과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 위에 군림해 있다.
황야오지(65세)는 보리현 챵컨(搶墾)향 싼싱(三興,바자쯔(八家子))촌 촌민이다. 그는 생전에 “나는 1996년에 법을 얻어 사부님의 가르침으로 인생의 의의를 깨달았다. 1999년 7. 20 사악이 대법을 박해하기 시작한 이래 나는 여러 차례 향 파출소의 박해를 당했다. 첫 번째는 2000년 6월 20일인데, 경찰에 붙잡혀 유치장에서 3개월 반 불법 감금당했고, 5백 위안(약 8만 원)을 갈취당했다. 그리고 시달림을 받을 대로 받아 피골이 상접해지고, 정신적으로 극심한 손상을 입었다. 두 번째는 2000년 11월 26일인데, 악독한 경찰은 또 나를 파출소에 붙잡아 넣어 보름 동안 구류시키고 160위안(약 2만 6천)을 갈취했다. 2000년 12월에서 2001년 7월 26일 사이 또 두 차례 납치를 당했는데, 매번 보름 동안 불법 감금당했다.”라고 말했다.
황야오지는 또한 “다섯 번째는 2001년 7월 26일 내가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말했는데, 챵컨 파출소 소장 장둥춘(姜東春)과 경찰 쑹퉁유(宋同友)가 우리 집으로 와서 나를 붙잡았다. 그 후 직접 나를 구치소로 보냈다. 그곳은 정말 인간의 지옥이었다. 옥수수 알로 만든 죽을 먹었는데, 짠지마저도 없었다. 악독한 경찰은 또 소백룡(小白龍)으로 나를 후려쳤다. 나를 2개월 넘게 불법 감금한 뒤, 2001년 10월 9일 나를 쑤이화(綏化) 노동교양소로 보냈다.”
“막 노동교양소에 들어가자, 대대장 양(楊) 모는 우리를 죄수로 여기며 관리에 복종하도록 했다. 중대장 하오롄구이(郝連貴)는 늘 강제로 노역 당하고 있는 파룬궁수련생에게 대법을 비난하는 녹화 프로그램을 보도록 했다. 어느 한 번, 과장 캉(康) 모는 우리를 모욕하며, 우리를 죄수로 여겨 우리에게 거짓말을 주입했다. 내가 그의 사악한 거짓말을 저지하자, 두 명의 경찰은 다가와서 나의 뺨을 후려갈겼는데, 반 시간 넘게 때렸다. 이어서 또 강제로 나에게 계속 일을 시켰다.”
2002년 11월 25일부터, 쑤이화 노동교양소에서는 수감당한 파룬궁수련생에게 고문 탄압을 실행하여, 강제로 ‘진ㆍ선ㆍ인(眞ㆍ善ㆍ忍)’ 믿음을 포기시켰다. 교도원 양보(楊波), 가오중하이(高中海), 중대장 판샤오둥(范小東)은 파룬궁수련생에게 ‘진ㆍ선ㆍ인’을 포기할 건지를 캐물었다. 그리고 또 ‘거짓으로 써도 된다.’고 말하며, 동의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믿음을 포기할 때까지 전기봉으로 손, 발에 전기 충격을 가한다고 했다. 악독한 경찰은 전기봉으로 황야오지에게 전기 충격을 가했다. 그는 시달림을 견딜 수 없어 마음을 어기고 ‘3서(三書)’를 썼는데, 쓴 뒤 뼈저리게 뉘우쳤다. 악독한 경찰은 고문, 거짓을 꾸미는 수단으로 ‘전향률’을 달성해 장려금을 받았다.
황야오지는 2003년 석방, 집으로 돌아온 뒤, 노동교양소에서 쓴 ‘3서’를 폐기하며 계속 진상을 알리고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좋다고 성명했다. 그는 실제 행동으로 자신이 대법에 조성한 손실을 만회하려 했다.
황야오지가 노동교양박해를 당한 기간, 불구인 아내는 결혼하지 않은 아들을 데리고 낡고 새는 집안에서 살았다. 밖에서 비가 내리면 집안에서 비가 줄줄 샜는데, 대야로 퍼내도 다 퍼내지 못했다. 매번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내는 방안이 무너질까 두려워 감히 잠을 자지 못했다. 집안에 땔나무도 없고 양식마저 부족해 밥을 배불리 먹지 못했다. 근근이 집 뒤 뜰에서 채소를 가꿔 판 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2004년 9월 7일, 황야오지는 칭산(青山)향 타이성(太升)촌으로 가서 파룬궁수련생의 수련심득체험 교류회에 참가해, 파룬궁수련생이 대법 중에서 이로움을 얻어 병을 없애 몸을 건강히 하고 또 자신이 직접 진상 알린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무고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보리현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장둥춘 등은 향 파출소와 결탁해 20~30명의 경찰을 출동시켜, 갑자기 회의장을 포위해 81명의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해 현 유치장에 불법 구금시켰다. 그리고 사람마다 적어도 2백 위안(약 3만 원)을 갈취하고, 강박하여 보증서를 쓰도록 하고 나서야 석방했다. 그들은 중점인물로 인정되는 황야오지 등 14명은 현 구치소에 불법 구금시켰다.
2개월 6일 동안 불법 감금한 뒤, 경찰은 남성 파룬궁수련생 6명, 여성 파룬궁수련생 7명을 불법으로 노동교양소로 납치해 계속 박해를 가했다. 남성은 황야오지, 지싱(吉興)향의 리시즈(李喜之), 챵컨향의 위청췬(於成群)인데, 쑤이화는 노동교양소의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해 석방했다. 중공 당국이 여러 차례 그들에 대해 교란, 납치와 구금 및 갈취 등 극심한 박해로 이미 그들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결국 리시즈는 불행하게도 2013년에 사망하고, 챵컨향의 장청주(姜成久)는 쑤이화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로 생명이 위독해져 2006년 10월 17일 석방 후 48일 만에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보리현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한 2개월 동안, 황야오지가 어떠한 박해를 당했는지를 그는 시종 말하지 않았다. 악독한 경찰이 그들을 모두 나눠 감방 안에 감금해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다. 다른 파룬궁수련생의 말에 의하면, 구치소 인원은 여러 차례 불법 감금한 파룬궁수련생을 매우 적대시했는데, 그들은 수감 죄수를 방임해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했다 한다. 그리고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로 말할 필요가 없고, 또 몇 가지 방식이 있었다.:가을과 겨울 계절에는 파룬궁수련생에게 옷을 깡그리 벗게 하여 냉수를 끼얹었고; 마룻바닥에서 잠을 재우며 이불도 깔지 못하게 했고, 냉수를 끼얹어 축축한데도 러닝과 팬티만 입혀 윗면에서 잠을 자게 했다. 그리고 ‘전기문 설치’고문인데, 바로 죄수가 발꿈치로 파룬궁수련생의 허리 부위(양측과 뒷부위)를 심하게 내리쳐 외부에서 보면 가지색으로 되었다. 사실은 내장을 심각하게 다쳐 움직이지 않아도 아팠고, 움직이면 더욱 아팠다. 낮이면 파룬궁수련생에게 땅바닥 침대(地鋪) 위에 마좌(碼坐, 바로 군대자세로 앉히는 방법)로 앉혔는데, 죄수가 파룬궁수련생의 몸 뒤에 있으면서 불시에 주먹과 발로 이 부위를 밟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죄수가 다시 힘을 들이지 않아도, 이미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게 되었다. 잠을 잘 때 몸을 뒤척여도 아팠는데, 3~4개월 후에야 나아질 수 있었다. 또 예컨대 ‘카이페이지(開飛機)’ 등 육체적 학대도 있었다.
중공이 1999년 7월부터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한 이래,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했다. – 중공 요원이 언제 갑자기 파룬궁수련생의 집에 들이닥쳐 교란, 납치, 가택수색, 구금, 갈취, 고문 등을 감행해, 끊임없이 수련생에게 사상압력과 정신적 긴장을 조성하고, 몸을 비정상 상태로 만들지도 모른다.
문장발표: 2014년 4월 1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4/16/29011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