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장쑤 보도) 양저우시(揚州市) 파룬궁수련생 잔싱모(展興茂)는 훙쩌후(洪澤湖) 감옥에서 2년 넘게 박해를 당했는데, 약물 박해를 당한 듯하다. 잔싱모는 감옥에서 구조를 간곡히 요청했다.
올해 50세인 잔싱모는 1999년, 2000년에 여러 차례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파룬궁진상을 알렸다는 이유로, 차례로 불법 형사구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돌아온 뒤에 또 ‘610’에 의해 양저우시 우타이산(五台山) 병원(정신병원), 장두시(江都市) 뇌과병원(정신병원)에 3년 넘게 불법 감금당했다. 그 기간에 여러 차례 강제로 정신병 약물을 먹고 전기 충격을 당했다.
2004년 6월에 잔싱모는 정신병원에서 벗어나 ‘610’ 악인에게 체포당했다. 쓰촨(四川)에서 거듭 노동교양박해를 당한 뒤에 유랑생활을 했는데, 2011년 10월 말에 양저우로 돌아왔다가 납치돼 4년의 불법판결을 받았다.
이른바 ‘610 사무실’은 중공(중국공산당) 장쩌민(江澤民)패가 1999년 6월 10일에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성립한 불법 조직으로, 나치스 게슈타포와 흡사하다.
잔싱모는 그가 당한 박해를 다음과 같이 자술하여, 해 내외 선량한 인사가 관심을 갖도록 호소했다.
훙쩌후 감옥에서 약물박해를 당한 듯하다
나는 잔싱모라고 부르는데, 올해 50세이고 학력은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양저우시 장두구 쩐우진(真武鎮) 멍타오촌(蒙套村) 잔좡(展莊)사람으로, 불법 판결을 선고받아 지금 훙쩌후 감옥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다.
나는 2012년 12월 25일부터 얼굴 부위에 약간 부종이 나타나서, 훙쩌후 감옥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그날 저녁 8시에 ‘긴급’하게 쓰훙현(泗洪縣) 인민병원으로 보내져 중환자실의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두 차례나 ‘병세가 위독한 통지’가 내려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후 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 나는 정상적으로 병을 검사하러 갔다. 의사가 나에게 입원하라고 한 뒤, 나 스스로 11감구역 3층을 돌아와 물건을 가지고, 또 스스로 병원 감구역 2층으로 되돌아가서 입원했는데, 반드시 응급처치를 받아야 할 아무런 상황도 없었다. 하지만 훙쩌후 감옥병원 의사 판융(潘勇)이 준 약물을 절반 주사 당한 뒤, 갑자기 심장 주파수가 30초에서 60초 사이로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올 때만 해도 혈색이 좋고 윤기가 흐르던 얼굴색은 잿빛으로 변했고 혈압이 없었으며, 온몸은 마치 ‘근육을 뽑아 버린’ 듯 나른해졌다. 그 후 중환자실 의사는 나에게 ‘염화칼륨(kcl)’ 중독이라고 알려 주었다. 동시에 또 ‘E형 바이러스 간염’이란 진단이 내려졌다.
고문 시연: 독침을 주사하다(정체불명의 약물을 주사하다)
의문스런 것은 약은 훙쩌후 감옥 의사 판융이 준 것이고 모든 식사, 물, 음식은 모두 감옥 안에서 제공한 것인데, 염화칼륨(kcl) 중독과 ‘E형 바이러스 간염’ 병독은 어디에서 온 것이란 말인가? 훙쩌후 감옥과 직접적인 책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내가 2013년 1월 10일에 쓰훙현 인민병원에서 감옥 옥정과 저우(周)과장에게 이 두 가지 의문을 제출한 뒤, 저우 과장은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은’ 문제에서 직접 가족과 연계한 외에 정면 혹은 전면적으로 나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게다가 스헝밍(史恆明, 부주임의사)은 또 감옥의 ‘훙신보(洪新報)’에서 ‘진발성 흉민(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한 증상), 6개월의 심계항진, 반나절의 위험’에서 벗어난 병인 병증세를 발표했다. 이 떄문에 나는, 주입된 약물과 복용한 약물에 대해 의심이 생겼다. 믿음을 위해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2013년 7월 25일에 퇴원해 11감구역으로 돌아갔다. 8월 29일에 우 부교도원은 대장실(大帳室) 1층에서 나에게 약을 먹였다. 내가 퇴원한 뒤 병세가 비교적 평온했기 때문에 약을 먹일 필요가 없었다(더군다나 약을 먹은 뒤 위부위는 양쪽 갈비뼈를 향해 간간이 방사성 동통 증상이 있음을, 감옥 의사는 모두 알고 있었음). 그 후 우 교도원은 ‘병보석’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에게 ‘구린 개똥’이라고 욕했다! 《감옥법》, 새《형사소송법》에서 국민에 관한, 인권에 관한, 감옥경찰, 감옥 의사에 관한 법률 요구, 법률 형상, 법률 책임은 또 어디에 물어야 하는지?
내가 2012년 4월 25일에 훙쩌후 감옥 11감구역으로 온 뒤, 감구역 책임자는 나에게 ‘4서’ 등을 씌우기 위해, 그해 5월 나를 5층의 감시기가 없는 방안으로 끌어다가, 꼬박 하루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아 정신적으로 혼란시켰다. 게다가 구타하고 욕설을 퍼붓는 등의 수단으로 압박했다. 그 기간에 11감구역의 감옥 교도관 장위안성(張元盛)은 나의 손을 공격해 부어오르게 했다. 전 11감구역에서 지금은 10감구역으로 파견된 교도관 왕후이(王暉)는 나의 머리와 귀뺨 등을 구타했다. 그들의 거느림과 방임 하에 죄수 양정야오(楊正堯), 바이융젠(白勇健), 둥링링(董玲玲) 등은 나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다. 당시 나는 이 때문에 천웨이웨이(陳偉偉, 전 11감구역에서 지금은 교개과로 파견된 부과장임)에게 둥링링이 나를 주먹으로 호되게 구타한 사실을 알렸는데, 천 모는 뜻밖에 내버려 두고 상관하지 않았다!
2013년 8월 27일, 11감구역의 전체 죄수가 운동장에서 영화 뉴스를 중앙텔레비전(殃視) 뉴스중계방송을 본 뒤, 감방 안에서 싸움을 한 40~50세의 사람을 강단으로 압송해 올렸는데, 옆의 고정범(固定犯)이 고의로 트집 잡아 말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서로 말다툼을 했는데, 이어서 곧 4명의 고정범이 함께 덮쳐들어 그를 필사적으로 뒷짐을 지게 하여 땅바닥에 눌러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현장에 있는 300여 명 사람이 모두 보았다. 이 광경은 훙쩌후 감옥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적인 ‘문화대혁명’때의 비판, 투쟁 기억을 환기시켰다. 당시 교도관 장위안성(張元盛)은 바로 현장에 서 있었는데, 말없이 지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4월 27일에 6감구역 죄수 천핀장(陳平章)이 70세의 장푸민(張福民)의 창자를 걷어차서 끊어놓은 뒤를 이어서, 천핑장이 3년 6개월의 형기를 연장 당하고 장쑤성(江蘇省) 감옥 관리국에서 8월 이후 훙쩌후 감옥을 정돈한 뒤에 발생한 사례이다. 그들의 원칙은 바로 사고를 일으킨 죄수에게 형기를 가하는 것인데, 주관 교도관, 감구역 책임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정신병원에 3년 동안 감금, 두 차례 노동교양처분 합해서 3년
나는 1999년 7월 1일부터 파룬궁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것 때문에 청원하러 갔다. 99년 7월 20일 이후인 99년 12월 17일, 베이징 바다링(八達嶺) 장성에서 장쑤, 안후이(安徽), 쓰촨(四川), 랴오닝(遼寧), 광둥(廣東) 등에서 온 60여 명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란 진상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게다가 단체연공을 통해 파룬따파가 좋음을 실증했는데, 그 후에 불법 체포당했다.
2000년 3월 27일,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장두(江都), 가오유(高郵), 화이인(淮陰), 산둥(산둥 경내에서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대법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러 베이징을 가는 옌타이(煙台) 파룬궁수련생을 만났음)을 거쳐 2000년 4월 4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 후에 납치당했고, 이 떄문에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예전에 장쑤 방창(方強) 노동교양소에서 박해당하던 기간 중 4개의 전기봉에 전기 충격을 당한 적이 있다. 그리고 논밭의 농사일로 하루 12~13시간이 넘는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려서 검고도 수척해졌다.
자신이 ‘진ㆍ선ㆍ인(眞ㆍ善忍)’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것 때문에, 1년 후에 장두 악독한 경찰, 장두 610 부주임 왕민(王敏), 진우(真武)파출소 교도원 사오유자오(邵有照) 등 3~4명에 의해 강제로 양저우시 우타이산(五台山) 정신병원으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강제로 나에게 약을 먹이고, 주사를 맞혔고, 발 부위에 ‘전기 치료’를 했는데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 후 나는 장두(화이양로(淮陽路))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의 악독한 경찰 쑨위안칭(孫元慶), 쑨광허우(孫廣厚), 볜유밍(卞有明), 악독한 간호장 왕메이(王梅) 등은 강제로 나에게 주사를 맞히고 약을 먹였으며, 머리 부위 태양혈에 ‘전기침’을 맞혔는데, 고통을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3년 후인 2004년 6월 25일, 나는 성공적으로 3미터 높이인 담장을 뛰어넘어 장두 정신병원에서 벗어났는데,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2005년 4월, 쓰촨 이빈시(宜賓市) 핑산현(屏山縣)에서 불법 체포당한 뒤, 2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몐양(綿陽) 쓰촨 신화(新華) 노동교양소에서 노동교양을 당한 기간,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보고합니다’를 말하지 않으면 화장실로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 등 공포스러운 경험을 했다.
2007년 설 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장두에서 대략 9개월 있었는데, 그 기간에 양저우 ‘610’, 장두 ‘610’, 악독한 경찰 왕민 등은 늘 집으로 와서 교란했다. 그 교란을 견딜 수 없어서 나는 2007년 10월 1일에 집을 떠나서, 다시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등으로 가서 유랑생활을 했다.
2011년 10월 24일, 윈난에서 양저우로 돌아왔는데, 또 양저우 기차역 인근에서 자료를 배포하는 과정 중에 무고를 당해 거듭 납치당했고, 장두 법원 장옌(張炎) 등 악독한 법관에게 판결을 당했다. 양저우 중급인민법원에 상소를 제출했으나 원판결이 유지되었다. 이 지경에 이르러 나는 2011년 10월 24일부터 2015년 10월 23일까지의 4년의 불법 판결을 당했다.
1999년 7ㆍ20 이후부터 지금까지, 집에 있었던 시간은 대략 1년밖에 되지 않는다. 가정을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내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노령인 노부모도 역시 남동생의 회유와 경제적인 압박으로 감히 나와 상대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감옥에서 두 차례나 위독했는데, 응급처치를 거쳐 ‘병보석’을 받을 수 있었지만, 가족이 나를 집으로 받아들여 병 치료를 해주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 사회와 선량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줄 것을 청구한다.
문장발표: 2014년 4월 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4/9/2898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