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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하반의 그리움

— 헤이룽장 우창시의 호인(好人) 장옌차오의 이야기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12년 전 3월 28일은 황치촌(黃旗村)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생 장옌차오(張延超)가 경찰에게 납치되어 다시는 돌아 올수 없었던 비분하고도 비통한 날이다.

2002년의 이른 봄,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날, 헤이룽장(黑龍江) 우창시(五常市) 라린진(拉林鎮) 시황치촌(西黃旗村)의 청년 장옌차오는 그를 낳아주고 키워준 흑토를 영원히 떠났고, 그를 생각하고 그를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을 떠났다. 몇 년 이래,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장옌차오가 살해당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옌차오가 좋은 사람이 되려한 것 때문인가? 그가 마을 사람 모두에게 진심으로 잘 대해준 것 때문이란 말인가? 정말 아직도 하늘의 이치가 있다는 것인가?

张延超

장옌차오(張延超)

장옌차오가 박해로 사망했지만 12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시황치촌의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장옌차오를 말하고 있다. 모두가 장옌차오에 대한 평가는 이상하리만치 모두 일치했다. “장옌차오는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누구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좋은 사람입니다!” 지난 일이 눈에 선한데, 모든 시작은 1999년의 그 겨울이었다.

대법을 얻은 뒤의 거대한 변화

1997년 말, 장옌차오는 하얼빈시(哈爾濱市)로 가서 일을 했는데, 난방의 총각을 만났다. 이 난방인은 매일 짬을 내어 책 한 권을 보았다. 어느날, 남방인은 장옌차오에게 이 책을 권하면서 그도 책을 잘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장옌차오는 책을 받아 보자마자, 책표지 위의 ‘전법륜(轉法輪)’ 세 글자가 뜻밖에 그의 눈앞에서 반짝반짝 빛나면서 바로,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인과 일찍이 만나지 못해 한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것은 보통 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꼭 열심히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숨에 ‘전법륜’을 다 보았다. 장옌차오는 ‘전법륜’은 사람에게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해 반본귀진(返本归真)하게 하는 귀중한 책임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그는 다시는 ‘전법륜’을 놓지 않았다.

장옌차오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해 오래지 않아, 몸에 강렬한 반응이 생겼다. 그날 그는 수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 했는데, 설사가 너무 심해 탈진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장옌차오는 이것은 대법사부님께서 그를 관할하셔서 그의 몸을 청리해 주시는 수련과정 중의 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그는 매일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먹을 것을 보내고, 약을 보내고, 차를 집 앞까지 몰고 가서 그를 병원으로 보내려 하고, 말로 권했다……그러나 장옌차오는 그것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이틀 후, 원기가 왕성하고, 얼굴색이 좋고, 풍만하고 생기발랄한 장옌차오가 마을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다. 모두 자신의 눈이 믿기지 않았다. 그저께만 해도 초췌하고 얼굴색이 어둡던 사람이 오늘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여위었던 사람이 뜻밖에 단지 이틀 사이에 가장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그야말로 불가사의했다. 이웃집 아저씨는 “사람이 살이 찐다해서 갑자기 살이 찌는 것이 아니잖아?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가! 이것은 너무 빠르다! 파룬궁은 너무 신기하다,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장옌차오는 병 없이 온몸이 가벼운 미묘한 감수를 이해했다. 동시에 그의 일언일행은 또 더욱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게 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같지 않음을 보게 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불리는 그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몇 십 명, 심지어 몇 백 명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장옌차오는 바로 몇 백 명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배추를 심은 이야기

1999년 봄은 가물었다. 장옌차오가 심은 콩은 마을 사람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가물어서 싹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가 잘 자라도록 땅에 물대기’를 시작했다. 장옌차오의 집에는 차 한대가 있었는데, 그는 차를 몰고 도와 물을 길어 땅에 물을 댔다. 땅이 많고 차가 적어서,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물을 길어 땅에 대어 모가 자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물을 길어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은, 돈을 주는 사람도 있었고, 또 돈을 주지 않는 사람도 적잖게 있었다. 그러나 장옌차오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매일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까지 싱글벙글거리며 모두를 위해 분주히 바삐 보냈다.

맨 마지막 한 집의 땅에 물을 다 댔을 때는, 농사짓는 과정에서 맨 마지막에 모가 잘 자라도록 땅에 물을 대는 시기도 끝났을 무렵이었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 모두 숨을 좀 돌렸을 때 날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물을 길러 대주었던 장옌차오의 콩밭에는 물 한 방울도 대지 못했음을 발견하고 모두 놀랐다. 옥토였던 장옌차오의 땅은 바짝 마른 묵정밭으로 변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미안해하는 표정과 위안의 말에, 장옌차오는 인자하게 “괜찮아요! 다시 다른 걸로 심으면 되죠!”라고 말했다. 말은 이렇게 했으나 생산량이 높고 경제 수입이 높은 가을철 작물을 심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어쩔 수없이 생장기가 짧은 가을 채소를 심을 수밖에 없었다. 장옌차오는 콩밭을 배추밭으로 바꿔 심었다. 농가에서 보기에는, 채소를 심은 수입은 경제 작물 콩의 수입과 비교할 수 없는바, 장 씨 집의 경제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닐것이라 모두 걱정했다.

장옌차오의 집 배추는 매우 빨리 싹이 텄고, 채소 모종은 매우 건실했다. 마을 사람들은 장옌차오에게, 화학비료를 사서 따라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가을이 되어도 통이 내려앉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옌차오는 모두의 건의를 인정하고 진으로 가서 화학비료를 구매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다른 처리할 일이 생겨 화학비료도 제때에 주지 못했다. 그가 시간이 있어서 화학비료를 사려 했을 때에는, 하늘도 무심하게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는 3일 동안이나 내렸는데, 배추가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게 뻔히 보였다. 비가 멎고 날이 개이자, 푸르싱싱한 배추는 자라나서 밭이랑을 막아놓아, 사람이 밭에 들어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옌차오가 화학비료를 사서 돌아와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자 아내는 장옌차오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장옌차오는 아내에게 “일체는 자연스러움에 따릅시다. 땅위에 심었지만, 거둬들임은 하늘에 달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내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약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은 것 때문에 배추가 통이 내려앉지 않게 된다면, 반 헥타르(半坰)가 넘는 땅의 배추를 누구에게 팔겠는가? 그때면 땅위에서 썩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은 배추가 자라는 속도는 사람을 기쁘게 했다. 키도 컸을 뿐만 아니라, 모두 통이 내려앉았다. 가을이 되자 포기마다 모두 통이 꽉 차서 내려앉았고, 포기마다 크고 속이 꽉꽉찼다. 장옌차오가 심은 통배추에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맛도 좋아 생것으로 먹어도 단맛이 났고, 익힌 뒤에도 부드럽지만 물렁물렁하지 않았다. 전 촌의 사람들은 모두 장옌차오의 통배추를 사서 겨울에 저장하고 배추절임을 담갔다. 당연히 배추의 질이 좋아 자연히 또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맨 마지막에 결산했는데, 수확이 콩보다 나았다.

모두 몹시 기뻐했는데 결과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보기에는 ‘일마다 순리롭지 못하고 걸음마다 고비’인 장옌차오가, 어떻게 우연하게 하느님의 총애가 있는지? 장옌차오의 외삼촌댁은 사람이 말을 시원시원하게 했는데, “선악에는 인과응보가 있는바, 좋은 사람은 좋은 보상을 받습니다. 우리 장옌차오가 대법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으로 되려 했습니다.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그림자마저 모두 그를 좋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좋은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전 촌의 사람은 장옌차오의 이야기를 통해, 파룬따파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수박을 심은 이야기

장옌차오가 심은 수박은, 현지에서 명성이 매우 높았다. 그의 좋은 명성은 그의 진실함과 선량함으로 세워진 것이다.

어떻게 수박을 잘 심을지는 일 년 내내 농촌에서 생활하는 농민들에게는 몹시 어려운 기술이 아니었고, 또 절대 무슨 최상의 비밀적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심태였다. 어떠한 심태로 수박을 심느냐가 중요했는바, 질이 좋고 나쁨, 맛있고 맛이 없다는 것의 구별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반적인 수박은 농종(農種)인데, 빨리 자라게 해서 수확을 높이기 위해 모두 화학비료로 성장을 촉진했다. 이러한 수박은 맛이 보통이고 또 오래 보존할 수 없었으며 쉽게 부식되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심은 수박은 걱정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었고 간단했으며, 인력 물력도 적게 들었다. 때문에 절대다수의 수박농(瓜農)은 모두 이런 재배방식을 채용했다.

대법을 학습한 뒤, 장옌차오는 좋은 사람의 심태로 수박을 심었다. 첫 번째는 바로, 그는 전통적인 재배 방식을 회복해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농가 비료를 사용하려고 결정했다. 그는 집마다 가서 닭똥 및 기타 유기 비료를 사들여서 땅에 묻어 밑거름을 했다. 비료 원료가 크게 바뀌어, 장옌차오의 생산원가, 경제적, 물질적, 인적인 부담이 컸다. 친척, 친구마저 그를 대신해 ‘가치가 없다’,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한다’, ‘부질없는 짓을 한다’고 말들이 많았다.

장옌차오는 태연히 웃고 넘어갔으며, 그것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매일 부지런하게 땅을 갈고 김을 매면서 바쁘게 보냈다.

얼마만큼 부지런하게 일하면 얼마만큼의 수확이 있는 것이다. 장옌차오는 수확의 계절을 맞이했다. 장씨 집의 수박은 즉시 잘 팔렸다. 사람들은, 단맛이 딱 좋고 크며 껍질도 얇고 장시간 보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이런 수박을 심는 사람이 없었다며, 마을 사람들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소식은 매우 빨리 전해졌다. 장옌차오의 고향과 몇 리 떨어진, 어느 한 군용 비행기장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 뒤, 군용차를 파견해 하루걸러 한 번씩 와서 한 차씩 사갔는데, 매 번에 모두 천근을 넘게 사갔다. 정말 좋은 물건은 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씨 좋은 사람은 바른 심태로 수박을 심고, 질 좋은 수박을 수확하니 잘 팔려 돈이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이번에 더욱 깨달았다. “장옌차오가 심은 수박은, 그것은 바로 좋은 마음으로 좋은 보상을 받은 것이다!”

위폐를 찢은 이야기

장옌차오는 수박을 팔기위해 하얼빈 도시 지역으로 왔다. 수박 한 차는 순조롭게 잘 팔았다. 저녁 무렵에 돈을 정리할 때, 그는 위조를 알아보기 어려운 3, 4백 위안의 위폐를 발견했다. 장옌차오는 현장에서 곧 이 위폐들을 찢어버렸다. 어떤 ‘마음씨 좋은 사람’은 그에게 “찢지 마세요. 이 돈은 매우 비슷하네요. 써버릴 수 있어요!”고 권고했다. 장옌차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에게 “나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해쳤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해치면 안 됩니다.”고 말했다. 말을 하는 사이에 근 4백 위안의 위폐는 종이 부스러기로 되어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그가 너무 바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더욱 많은 사람은 이에 대해 인상이 깊었다.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확실히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다!’

‘우리 집 차’에 대한 이야기

장옌차오의 집에는 자동차 두 대가 있는데, 이것은 전 촌의 어른이나 아이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총각은 친절하게 이 두 대의 차를 ‘우리 집 차’라고 불렀다. 이것은 전 촌의 사람이 누구나 일이 있으면 장옌차오의 차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두 싱글벙글하며 모두의 요구를 만족시켰고, 누가 부탁해도 빌려주었다. 이 일로 친척들이 확실히 장옌차오를 좀 ‘멍청’하다고 말했다.

과일과 채소가 여무는 계절이 되면, 일부 차가 없는 이웃은 장옌차오에게 자기 집 농산품을 그의 차에 실어, 가는 김에 장으로 가서 팔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저녁 무렵에 그는 또 사람을 태워 돌아오기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이 일체는 모두 무료였다. 이러한 일은 수시로 발생했다. 얼마나 했는지를 장옌차오 자신도 똑똑히 말하지 못했다.

어떤 때에는 이런 일도 일어났다. 어느 한 번, 한 이웃은 장옌차오에게 몇 포의 화학비료를 부탁했다. 돌아올 때 이웃은 일이 좀 있어서 따라 돌아오지 못했다. 화학비료를 집까지 싣고 가서 몇 십 포의 화학비료를 집안까지 옮겨주었다. 그는 지쳐서 땀에 흠뻑 젖었으며 신고 있던 그 포말 슬리퍼마저 비틀려 터졌다. 이웃은 천만 번 사례를 드렸으나, 장옌차오는 그의 집 물 한 모금도 마실 줄 몰랐다.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하다

1999년 7월, 중공(중국공산당)은 파룬궁을 박해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대변인 매체에서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모독함이 천지를 뒤덮을 듯이 중화대지에 해를 끼쳤다.

2000년 초 겨울, 장옌차오는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자신이 파룬따파를 수련해 심신에 이로움을 얻은 실제 상황을 알렸다가 베이징에서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당시 라린(拉林)분국, 진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의 악독한 경찰 추이얼(崔二)이 소식을 들은 뒤, 장옌차오의 장모에게 “당신의 사위는 반혁명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베이징으로 마중하러 가는데, 당신의 집에서 노비를 꺼내야 합니다.”고 말했다. 생활이 극히 어려운 장인집에서는, 추이얼에게 2백 위안을 갈취 당했다. 장옌차오는 베이징에서 붙잡혀 돌아온 뒤, 우창(五常) 신화산(杏花山) 제2구치소에 갇혔다. 장인은 또 관계자를 찾아 늙은 소 한 마리를 팔아 부탁하여, 또 악독한 경찰에게 천 위안을 갈취 당했다. 그제야 장옌차오는 돌아왔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뒤, 장옌차오는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는 수련의 여정을 시작했다. 2002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장옌차오와 다른 한 대법제자는 영하 30도의 추운날씨를 무릅쓰고 인근 마을로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하러 갔다. 막 뤄자(羅家) 워바오툰(窩堡屯)에 도착해서, 곧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과 마주쳤다. 그가 함부로 외친 것 때문에 마을의 진상에 명백하지 못한 한 무리의 촌민들이 덮쳐 장옌차오를 한 바탕 혹독하게 구타했다. 귀는 또 칼에 찍혔다. 장옌차오는 손으로 피가 흐르는 상처를 막으면서 큰 소리로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고 외치면서, 진상자료를 꺼내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게다가 상세하게 마을 사람에게 파룬궁이 박해당한 진실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촌민은 진상을 명백히 안 뒤, 장옌차오가 그들에게 선사한 진상 자료를 들고 부끄러워하며 잇달아 떠났다.

부상을 입은 장옌차오가 집으로 돌아온 뒤, 선혈은 이미 솜옷을 흠뻑 적셨다. 장모는 그에게 좀 조용히 있으라고 권했으나, 그는 오히려 “대법제자의 사명은 마땅히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대법제자의 자격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부상당한 아픔을 참으면서, 또 진상자료를 찍으러 갔다.

좋은 사람이 박해당하다

바로 이렇게 일생을 모두 마을 사람들을 위해 성실하게 대가를 치르고도 보답을 구하지 않은 좋은 사람은, 오히려 파룬따파를 수련했다는 이유 때문에 사당의 악독한 경찰에게 이유 없이 납치당했고, 또 고문박해로 사망했다.

2002년 3월 28일 오전, 우창시 훙치향(紅旗鄉)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 구지웨이(賈繼偉) 한 패는 허우황치(後黃旗) 인근에서 장옌차오(張延超)를 납치했다. 그리고 장옌차오가 자가용 진와패(金蛙牌) 농업용 삼륜차를 판 돈 2천 8백 여 위안을 강탈해갔는데(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음), 장옌차오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구지웨이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오히려 화를 내며 “당신들 대법제자는 때려 죽여도, 당신은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는데, 당신이 아직도 감히 우리와 맞서.”라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훙치파출소에서 장옌차오는 구지웨이 등 여러 사람에게 악독한 구타를 당했다. 악독한 경찰들은 무차별폭력을 가한 뒤에 또 흰 플라스틱관(소백룡이라고 속칭함)으로 장옌차오를 혹독하게 구타했다. 이런 형의 형구는 일곱 개의 구멍(눈ㆍ귀ㆍ코 및 입을 합한 일곱 개의 구멍)에서 피가 나게 할 수 있으나, 오히려 외상흔적은 없었다. 악독한 경찰들은 악행을 행한 뒤, 상처투성인 장옌차오를 우창시 공안국 제2구치소로 납치해갔다. 당시 제2구치소에서 늘 대법제자를 구타하는 악독한 경찰이, 장옌차오가 이렇게 심각하게 구타당한 것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와, 좋아! 이 훙치의 구지웨이가 우리에 비해 더 악독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다 한 뒤, 이 인간의 쓰레기는 또 다른 악독한 경찰과 결탁해 또 장옌차오에 대해 무차별폭력, 전기고문을 가했는데, 한 시간 넘게 광적으로 폭행을 가했다. 그들은 구타하다 지쳐서야 손을 멈추었다.

그날 오후, 훙치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은 또 장옌차오를 우창시 감옥으로 압송했다. 장옌차오는 그곳에서 또 우창시 공안국 악독한 경찰 천수린(陳樹森), 잔즈강(戰志剛), 우창시 ‘610’의 악도 황잔산(黃占山), 주셴푸(朱憲福), 푸슈춘(付秀春) 등 한 패에 의해 폭력적인 학대를 당했다.

넷째 날인 3월 31일, 세 차례나 고문학대를 당해 이미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왼쪽 다리가 구타로 부러진 장옌차오는, 죄수 호송차에 끌려 하얼빈시공안국7처로 압송 당했다.

4월 1일, 하얼빈공안 7처의 사람들이 모르는 40여 종의 형구를 사설한 고문 방안에서, 악독한 경찰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장옌차오에 대해 잔인무도한 고문으로 괴롭혔다. 큰 괘에 올리기 고문(上大掛), 호랑이의자 고문, 소백룡으로 구타하기, 전기 고문 등으로 괴롭혔는데, 겨우 하루사이에 장옌차오는 학대로 사경을 헤맸다.

4월 6일, 악도들은 장옌차오의 시신을 하얼빈시공안국 구치소(야쯔취안(鴨子圈)이라고 속칭함) 비정상적 사망 해부실로 옮겼다.

장옌차오가 실제 사망한 날짜는 지금까지 분명하지 않다. 우창시 ‘610’악도 푸슈춘은 사건이 발생한 뒤에 다른 사람에게 “장옌차오는 하얼빈공안국 7처에서 이틀도 되지 않아 구타로 죽었습니다.”고 한 적이 있다.

강제로 화장하다

장옌차오가 하얼빈으로 보내진 뒤부터, 가족에게 그의 소식이 끊겼다. 그의 아내 관잉화(關英華)는 사처로 가서 알아보다가, 그도 불행하게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당해 악명이 극히 높은 완자(萬家) 노동교양소로 납치당해 2년 동안 박해를 당했다. 그녀는 2004년 1월 17일에 출소한 뒤, 지금까지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

2002년 4월 27일 저녁, 우창시 공안국 라린(拉林)공안분국에서는 갑자기 장옌차오의 가족에게 통지를 내려, 장옌차오는 단식을 한 이유로 사망했다고 하며, 가족에게 즉시 가서 시신을 식별해 화장하도록 했다. 4월 28일, 29일에 장옌차오의 두 남동생과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가 하얼빈 공안국으로 가서 이틀을 기다려도, 장옌차오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 단지 몇 번이나 그들에게 화장한 서명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지만 친인들은 당연히 서명을 하지 않았다.

4월 30일, 가족과 소식을 듣고 서둘러 온 마을 사람들의 강력한 요구로 마지못해 시신을 보는 것을 허락했다. 조건은, 단지 가족이 가는 것만 허락했을 뿐이고, 시신을 본 뒤에 반드시 서명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자신이 감당하라는 것이었다.

장옌차오의 가족은 하얼빈시공안국 구치소로 끌려갔다. 뒤이어 서둘러 온 마을 사람은 밖에서 엄밀한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가족을 마중한 사람은 60여 명의 완전 무장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경찰이었는데, 그날 하얼빈시 다오리구(道裡區)와 둥리구(動力區)공안분국에서 임시 파견해 온 사람이라 했다.

장옌차오의 가족은 20여 명 경찰에게 소름이 끼치고 공포적인 방안으로 끌려갔다. 어두컴컴한 등불 아래에서 그들은 방안에 몇 십 개의 시체가 있었는데, 따로따로 유리 창문이 있는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친인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위에 장옌차오의 시신이 있었는데 참혹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한 쪽 눈은 없었으며, 입은 벌리고 있었고 치아는 완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래턱은 구타로 깨졌고 한 쪽 다리는 구타로 부러졌다. 현장에서, 이 사람은 온 지 이미 21일이 된다고 했다.

가족의 참사에 직면해, 비통하여 죽고 싶은 가족은 단호히 화장서 위에 서명함을 거부했다. 하얼빈시공안국 7처의 악독한 경찰들은 즉시, 만약 협력하지 않고 소란을 피운다면 곧 반혁명으로 간주해 붙잡겠다고 위협했다. 악독한 경찰은 거듭 장옌차오는 단식으로 사망했다고 딱 잡아뗐다. 게다가 가족 앞에서 장옌차오의 해부당한 시신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내장을 꺼내 가족에게 보여주어, 친척들은 모두 멍해졌다.

악독한 경찰의 위협 하에, 주견이 없는 장옌차오의 둘째 삼촌은 부들부들 떨면서 화장서 위에 서명을 했다. 이때 악독한 경찰은 놀라 멍해진 가족에게 위선적인 웃음을 드러내며, “당신들은 협력을 매우 잘했습니다. 화장하는 일체 비용과 차비는 우리가 전부 도맡아 처리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이 장면을 친인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라린 공안분국 판리웨이(範立偉), 훙치향 정부의 간부 구충(賈從), 우창시 공안국 악독한 경찰 잔즈강, 훙치향 시황치대대 사당 지부서기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이 비참한 장면을 목격했고, 이 사람들도 이번 폭행 참여자와 사정을 아는 사람이다.

동시에 이것도 친인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의혹스럽게 한 장면이다. 구타로 20여 일 동안 사망한 사람을, 당국에서는 무엇 때문에 기어이 그에게 배를 갈랐는지? 해부한 지 20여 일 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또 선혈이 낭자한지?

좋은 사람의 장례

당시 장엔차오의 아내는 납치감금을 당했고, 그의 딸은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장옌차오의 다른 친인이 그의 유골을 받들고 시황치촌으로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장옌차오의 장례에 참가했다. 한 노인은 심각한 기관지염, 천식에 걸려 빨리 걷지 못해 다른 사람이 모두 묘지에 도착했으나 노인은 그제야 절반을 걸어갔다. 한 사람이 노인에게 가지 말라고 권고하자, 노인은 “이 보기 드믄 좋은 사람을 내가 그를 보내러 가지 않으면, 나는 양심에 찔리네!”라고 했다.

전 마을 사람은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며, 근 2백 명 되는 사람이 장옌차오의 장례에 참가했다. 작은 유골함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20여 일 전에만 해도 얼굴이 싱글벙글하고 씩씩하던 젊은이가, 전 마을 사람이 모두 좋아하고 신뢰하던 좋은 사람이, 뜻밖에 애매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그를 낳아주고 키워준 시황치촌을 떠났음을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위로는 8,90세인 노인에서 아래로는 5,6세인 아이까지, 다시는 마음속의 비분을 억제하지 못했다. 장례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은 대성통곡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거세게 흐르는 황소하(牤牛河)는 노호하고, 구불구불한 라린하(拉林河)는 울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울음소리는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들었다. 소식에 따르면, 10여 리 밖의 촌마을에서까지 모두 시황치촌 사람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한다. 이 비분의 울음소리는 푸른 하늘을 향한 성토였다.

장옌차오가 구체적으로 희생당한 날이 지금까지 분명하지 못하다. 그는 2002년 3월 28일에 납치를 당했는데, 그날부터 친인들은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매년 3월 28일은, 시황치촌의 마을 사람들이 장옌차오에게 제사를 지내고 추모하는 날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분명히 알 수 없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뜻밖에 경찰에게 이렇게 무참하게 구타당해 죽었는지? 그래 좋은 사람이 되려한 것이 왜 또 유죄인가? 옌차오야! 너는 억울하게 죽었다!’

문장발표: 2014년 3월 22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3/22/28900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