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지린성 보도) 파룬따파(法輪大法)가 1992년에 대륙에서 전해져서부터 1억이 넘는 사람이 직접 이로움을 얻었다. 하지만 중공(중국공산당)은 세력을 믿고 전횡하며 윗사람을 속이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겨 파룬따파를 박해한 후, 억만이 넘는 사람을 불법 감금, 노동교양, 판결, 고문 학대에 직면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국 민중도 거짓말 세뇌와 공포 속에 휩싸이게 했다.
2002년 4월, 5명 용사의 정의로운 의거는 거짓말 철의 장막을 찢고 허강(鶴崗) 텔레비전에 20분 동안 진상 방송을 삽입했다. 이 5명 용사는 파룬궁수련생 장웨밍(張躍明), 왕수린(王樹森), 궈중취안(郭忠權), 궈싱궈(郭興國) 및 양융잉(楊永英)이다.
2002년 4월 20일, 이 5명 파룬궁수련생은 허강 지역 유선텔레비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중공 ‘천안문 분신자살’ 가짜 사건 기만극을 폭로한 동영상을 방송했다. 당시 삽입 방송한 진상 프로그램을 20분쯤 방송했다. 많은 국민은 모두 진상 프로그램을 시청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 프로그램은 정말 좋았어요. 의문점을 분석함에도 이치가 있고 근거가 있었어요. 한창 보는 것에 정신을 팔려 있는데 갑자기 정전됐어요.”라고 말했다. 이후에 그제야 허강시 중공 시위원회에서 국민이 진상을 알까 봐 두려워 관련 부서에서 강제로 전원을 차단했음을 알게 됐다!
중공은 파룬따파 진상이 두려워 온갖 잔혹한 수단으로 삽입 방송 용사들을 박해했다. 4월 20일, 파룬궁수련생 장웨밍(19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음), 왕수린(18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음), 궈중취안(13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음), 궈싱궈(15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는데, 후란[呼蘭]감옥의 박해로 사경을 헤매게 되어서야 석방돼 집으로 돌아감. 오래지 않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음)을 납치했고, 2006년에 양융잉이 납치돼 17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다. 본문의 주인공은 파룬궁수련생 양융잉이다.
양융잉(50세)은 전 헤이룽장 허광(鶴礦)그룹 석탄판매소 노동자다. 1995년 6월, 양융잉은 운 좋게 대법수련을 시작했다. 대법을 수련하기 전, 그는 예전에 여러 가지 질병에 걸렸고 또 불량한 생활 습관(담배를 피우고 주정을 부리며 도박하는 등)이 있었다. 대법을 얻은 뒤 온몸의 병은 치료하지 않고도 자연히 완쾌되어 직장의 의료비를 절약해 주었다. 게다가 불량한 생활 습관도 그를 멀리 떠났다. 그는 엄격하게 ‘진선인(眞ㆍ善ㆍ忍)’에 따라 자신을 요구해 좋은 사람이 되어 직장에서는 좋은 노동자이고 집에서는 좋은 남편이며 노인에게는 좋은 아들이었다.
1. 텔레비전 삽입방송으로 거짓말을 폭로해 17년 억울한 판결을 당하다
(1) 진상 삽입방송을 하여 핍박에 못 이겨 유랑하다
2002년 4월 20일, 더욱 많은 민중에게 파룬따파(法輪大法)와 중공(중국공산당)이 거짓말로 파룬궁을 모함한 진상을 이해시키고 또 민중에게 알 권리를 돌려주기 위해 양융잉과 기타 5명 파룬궁수련생은 텔레비전을 이용해 ‘분신자살’ 진상을 삽입 방송했는데 20분 동안 ‘진상 영상이 방송됐다.
2002년 4월 21일 저녁, 양융잉이 거주한 곳의 지역 사회 인원, 구역 경찰, 분국의 악독한 경찰 등이 양융잉의 집에 들이닥쳐 불법적으로 가택수색을 감행했다. 양융잉은 핍박으로 3년 넘게 유랑생활을 했다. 명절 때면 양융잉의 친척의 집은 모두 악인에게 미행당하고 전화는 장시기 감청당했다. 시 공안국 국장 런루이천(任銳忱)을 우두머리로 해서 두 개 팀을 설치해 양융잉의 친척을 감시했다. 그 기간에 문약한 서생인 양융잉은 유랑생활을 하며 성과 이름을 감췄고 집이 있어도 돌아가기 어려웠다. 그는 공사장에서 육체노동자 등을 했는데 고생스러움은 언어로 말할 수 없다.
(2) 거듭 납치, 꼬박 7일 동안의 처참한 고문
2005년 9월 7일 오전 9시경, 양융잉 등 파룬궁수련생은 한 주민루에서 모였다가 들이닥친 허강시 샹양(向陽) 공안국의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동시에 납치당한 사람은 50여 명 파룬궁수련생이다. 모두의 핸드폰, 개인 재산 등을 깡그리 강탈당했는데 가치는 수만 위안에 달했다.
이날 저녁, 양융잉은 시 제2 구치소로 납치돼 3호실에 갇혀 엄격한 관리를 당해 강제로 ‘반성’ 당했다. 시멘트 바닥 위에밤 10시, 11시부터 이튿날 5시까지 앉아야 했으며 6시에 강제로 일어났다. 이튿날 양융잉은 시 제2 구치소의 2층 회의실로 납치당했다.
이때 2002년에 ‘텔레비전 삽입 방송’으로 인해 성립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전문사건팀’이 아직 철수하지 않았다. 사당의 시 경제범죄수사지대(經偵支隊) 부대장 리(李) 모를 부대장으로 해서 양융잉에게 꼬박 7일 동안의 처참한 고문 학대를 했다. 채용한 수단은 매달기, 뒷짐결박, 밤을 지새워 잠재우지 않기, 생수병으로 머리 부위를 구타, 당구 몽둥이로 각 관절을 두드리기, 탁구채(세웠음)로 어깨를 구타하기 등이다. 양융잉이 기절한 후 악독한 경찰들은 정신을 차릴 때까지(눈을 뜸) 물을 뿜었다. 그들은 모진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고 유도 심문으로 자백하게 했다.
중공 고문 설명도: 매달기 고문
꼬박 7일 후, 양융잉은 3층 감방으로 끌려 돌아갔다. 이튿날 파룬궁수련생 쉬즈청[(徐志成, 전 난산광(南山礦) 직원임]이 3호 감방으로 납치당해 왔다. 들어온 후 쉬즈청은 곧 단식했다. 부소장 장 모와 감옥 의사의 교사하에 강제로 쉬즈청에게 음식물을 주입했다. 옥수수가루에 소금 한 봉지를 섞었는데 그는 주입 당해 3일 만에 사망했다. 실제 식도 안으로 주입해 사레가 들려 사망한 것이다. 듣기로는 제1 인민병원에서 사망 증명서를 발급했는데, 말로는 ‘정상적인 사망’이라고 말했다. 업무 담당 단위인 난산 공안 분국은 인명을 초개같이 여기며 8만 위안(약 1,380만 원)의 배상을 지불했다. 그날 당직 소장은 리수린(李樹林)이다.
(3) 불법 법정 심리, 17년의 억울한 옥살이
2006년 6월 30일, 중공 허강시 샹양구 법원은 양융잉에 대해 17년 동안 감금한다는 불법 판결을 내렸다. 당시의 재판장은 천쉐강(陳學剛), 판사는 천민(陳敏), 왕지둥(王繼東), 서기원은 왕샤오쥔(王曉軍)이었다.
2006년 7월 중순, 양융잉은 시 중급인민법원에 상소했다. 2006년 9월 22일, 사당 허강시 중급인민법원은 상소를 기각하고 ‘원판결을 유지’했다. 재판장은 류창푸(劉長福), 판사는 하오리주(郝立珠)이고 대리 판사는 쑨보(孫波), 서기원은 리웨이(李蔚)였다.
(5) 하얼빈 감옥, 후란감옥을 전전해 감금, 혹독한 구타, 노역 박해
2006년 11월 8일, 양융잉은 사당에 의해 하얼빈 감옥으로 불법 이전됐다. 그 기간에 감옥에서는 강제로 양융잉에게 노역시켰는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곧 밤 11시부터 자정 이후 1시까지 반성 당했다.
2006년 12월 1일, 양융잉은 또 후란감옥 ‘집중훈련대’(13 감금구역)로 옮겨져 수감당했다. 이 소굴 안에서 새벽 6시에는 곧 강제로 일어나 노역했는데 저녁 8시 반이 되어서야 일을 끝냈다. 강제로 수공차 방석을 짰는데, 만약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반성’하는 것은 말하지 말고도, 죄수에게 지시 내려 흰 비닐관(小白龍)을 가지고 머리 부위, 둔부를 향해 몇 번이나 후려쳤다. 내일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구두로 보증해서야 구타를 중지했다.
‘반성’할 때 신발 신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시멘트 바닥 위에 세워두었는데 둔부와 두 다리는 직각으로 90도 되게 했다. 임무를 완수했을 때 2인용 침대에서 잠잤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4명, 5명, 7명, 8명, 가장 많이는 9명이 한 침대(길이가 2m, 너비가 1.6m)에서 잠잤는데 1년 4계절이 이러했다.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더욱 참기 어려웠던 것은 이가 범람한 것이다! 1개월 만에야 목욕을 한 차례 했고 대변 볼 때에는 강제로 세 가지 수 ‘123’을 외쳐야 했다. 그리고 파룬궁수련생 사이에 말함을 허락하지 않았고 강제로 파룬궁수련생을 ‘전향’했다. 장시간 지속적인 박해로 수련생이 정신이 흐리멍덩할 때 강제로 지장을 누르게 했다(악독한 경찰은 미리 준비해 둔 각종 자료 위에).
집중훈련대 중대장은 쉬루예(胥如野), 부교(副教, 교육, 개조) 왕젠(王健)은 예전에 솔직하게 “이곳은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기지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07년 9월부터 감옥의 악독한 경찰은 죄수를 교사해 2교대 하며, 파룬궁수련생을 바오자(包夾, 밀착감시)하며 파룬궁수련생이 잠자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야근 잡역부 허옌(何岩)은 양융잉에 대해 ‘밀기(推), 비틀기(掰), 쳐들기(撅)’를 감행했는데, 치아 한 대는 구타로 흔들렸고 그 후에는 빠졌다. 이 사람은 이미 솽야산(雙鴨山) 비자산(筆架山) 감옥으로 전근됐다. 죄수 선강(沈剛)은 낮에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파룬궁을 모함, 중상했으며 강제로 파룬궁수련생에게 관람함을 책임졌는데 2007년 11월 1일부터 줄곧 지금까지 책임졌다.
혹독한 구타[‘밀기(推), 비틀기(掰), 쳐들기(撅)’]
해마다 감옥에서 대회를 열 때면 원래 개조를 책임졌던 감옥장 장수민(張樹民)은 모두 허울 좋게 파룬궁수련생을 포함해 죄수에 대해 ‘8, 5, 1, 1’ 관리 형식을 실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즉 하루 8시간노동하고, 매주 노동시간은 5일이며. 하루는 학습하고 하루는 휴식한다는 것이다. 파룬궁수련생은 매일 작업실 안에서 노동한 시간은 12시간이나 됐다. ‘8, 5, 1, 1’도 역시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2. 남편은 억울한 옥살이, 아내는 시달림을 겪고, 아들은 더욱 강인해져
언급할 만한 것은 양융잉에게는 현숙한 아내와 철든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내 류춘란(劉春蘭)은 파룬따파를 수련한 이유로 진선인을 믿었다. 2002년, 류춘란이 7년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는데 남편은 한창 핍박으로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고, 아들은 겨우 13~14세로 막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런 무고한 상해는 아이에게 극심한 상처와 그림자를 주었다.2009년, 류춘란이 집으로 돌아온 후 남편 양융잉은 이미 17년 불법 판결 당했다. 아들은 친척의 도움으로 이미 이상적인 대학에 합격했다. 아들은 매우 철이 들었고 또 아주 소박했다.류춘란은 의류가공 겸 세탁소를 스스로 경영함으로 생계를 유지해 감옥에 있는 남편과 대학 공부하는 아이의 생활을 공급했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늦게까지 바삐 보냈다. 2011년 3월 11일, 류춘란은 6~7명의 사람에게 소방 불합격이라는 구실로, 허강 세뇌반으로 속임 당해 가서 구타당해 쓰러졌다. 6일 석방,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리는 걷지 못했고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현임 개조 감옥장: 난성(南生)
13 감금구역:
감금구역장: 진스빈(金世彬)정교(政教): 왕옌둥(王沿東)부교(副教): 페이더린(裴德林)부감옥장: 양위밍(楊玉明, 생산)
1 분감금구역: 교도원: 쑨위안쩌(孫元澤) 중대장: 왕칭위(王慶瑜)2 분감금구역: 교도원: 쑨지한(孫吉漢) 중대장: 왕즈융(王志勇)간사: 인둬(尹鐸), 추이원위(崔文宇), 추이처(崔策), 원(溫) 모본 감옥 전화: 0451-57307106시간: 아침 7시-저녁 6시
감방(監舍): 0451-57307109 쉬루예(胥如野): 현임 옥정과(獄偵科) 과장, 왕젠(王健): 현임 형벌 쟁행과 과장
허옌(何岩)의 전화: 13314501008
문장발표: 2014년 3월 1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3/13/2886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