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 랴오닝통신원 보도) 2010년, 랴오닝성(遼寧省) 펑청시(鳳城市) 법관인 파룬궁수련생 량윈청(梁運成)은 중공(중국공산당)의 모함으로 억울한 재판을 받고, 3년 동안 다베이(大北)감옥, 번시시(本溪市) 감옥과 다롄시 감옥에서 박해를 받았다. 그는 60일간, 비닐주머니를 머리에 씌운 채 가혹하게 구타하기, 구타해 부상을 입힌 뒤 고춧물 끼얹기, 손가락 끝을 바늘로 찌르기, ‘늘이는 침대’에 묶기(오마분시(五馬分屍) 고문과 흡사함) 등의 각종 잔인한 고문에 시달렸다.
1967년 출생한 량윈청은 랴오닝 안산(鞍山) 사범학원 기계학과를 졸업한 후, 방송통신 교육으로 지린(吉林)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95년에 펑청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전국 판사 자격시험을 통해 96년 정식 법관이 되었다. 그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뒤, 모든 방면에서 ‘진ㆍ선ㆍ인(眞ㆍ善ㆍ忍)’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며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건 처리를 위해 농촌을 방문할 경우 향, 진 정부가 제공하는 식사는 일체 먹지 않았다.
정직하고 선량한 그는 ‘진ㆍ선ㆍ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수리국(水利局)으로 배속되었고 1999년부터 지금까지 중공에 의해 5차례 납치, 2차례 불법 재판으로 모두 4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2006년에 번시 교양원과 안산 노동교양소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번시 교양원의 악독한 경찰은 그에게 “너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주겠다”며 늘이는 침대 고문을 했다.(자세한 경위는 ‘랴오닝 펑청시 법관 량윈청이 박해 당하다’를 참조하기 바람)
2010년 9월 5일 저녁, 승용차로 이동 중이던 량윈청과 취산린(曲山林) 등 5명은 바이치진(白旗鎮) 민주촌에서 바이치 파출소 소속 경찰에 붙잡혔다. 5명은 총을 겨눈 경찰과 그들과 결탁한 깡패들에 의해 바이치 파출소로 납치됐다. 차 안의 모든 진상 자료를 빼앗겼으며 2개월 후 불법 재판으로 량윈청은 3년형을 선고받았다
1. 다베이 감옥에서 독방 고문, 14일 동안 고문에 시달리다
2011년 4월, 량윈청과 취산린은 선양(瀋陽) 다베이 감옥으로 이송됐다. 다베이 감옥의 경찰은 죄수에게 명령해 두 사람의 옷을 벗겼고, 그들의 옷과 재판서류 등 서면 증거물을 빼앗았다. 두 사람이 불복하지 않자 경찰은 그들을 전기봉으로 전기충격과 함께 잔인하게 구타했다. 그 후 그들은 독방에 갇혔다.
악독한 경찰은 특수한 형구를 사용해 독방에 갇힌 량윈청을 벽에 채워 놓았다. 이 고문도구는 독방 벽에, 높이는 앉은 사람의 어깨보다 조금 높고, 너비는 어깨보다 더 넓은 2개의 수갑을 고정해 놓아 두 손을 따로따로 채워 놓고 등은 벽에 기댄 채 두 발에 족쇄를 채워 차가운 땅바닥에 앉혀 놓는 것이다. 파룬궁수련생 취산린(曲山林)은 다른 독방에서 같은 상황이었다. 이 고문도구의 특징은 오랜 시간을 사용할 경우 손과 팔이 마비되고 괴로움에 잠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선양의 4월 날씨는 매우 차다. 악독한 경찰은 죄수를 시켜 두 사람의 옷과 바지를 고의로 풀어 내리거나 찢어 추위에 떨게 했다.
량윈산과 취산린이 단식, 단수로 항의하자 이틀 뒤 감구역장 장화(張華)는 죄수를 시켜 두 사람의 수갑과 족쇄를 풀게 했다. 량윈청은 14일간 독방에 갇혔고, 취산린은 7, 8일간 독방에 갇힌 후 다베이 감옥에서 다른 곳으로 이송됐다.(취산린은 그 후 박해로 사망함)
2. 번시 감옥에서 ‘늘이는 침대’ 고문과 60일 단식
보름 뒤 량윈청은 번시 감옥으로 이송된 후 6감구역에 수감됐다. 6월 하순, 량윈청은 고소장을 작성해 6감구역의 교도관 감구역장 자오강(趙剛)에게 전달해 랴오닝시 고급인민법원에 직접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8월 8일, 자오강은 감옥 관리과에서 찾는다며 거짓으로 량윈청을 속여 독방에 수감했다.
고문 설명: ‘늘이는 침대’ -침대 위에 매달고 강한 빛을 쏘이다
번시 감옥의 독방은 단층집에 단독 별채로 되어 있다. 때문에 그곳에서 발생한 일을 다른 사람은 알기 매우 어려웠다. 독방 안에서 7~8명의 경찰과 죄수 3~4명이 관리과 가오(高)과장 및 경찰 톈융(田勇)의 지시 하에 강제로 량윈청의 옷을 벗겨 죄수복을 입혔고 머리를 박박 깍은 후 침대 위에 눕혀 고문을 가했다. 이 고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사람을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눕히고 두 손은 양편으로 잡아당겨 곧게 폈고 손목에는 각각 고정된 수갑을, 발에는 족쇄를 채웠다. 족쇄 사이에는 쇠사슬을 채웠고 그 중간 부분은 자물쇠로 고정 고리에 채웠다.(어떤 때는 쇠사슬의 중간을 채우지 않았다. 더욱 잔인한 고문 방법이다) 이 자세로 누워 다른 죄수가 먹여주는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했으며 대소변을 해결해야 했지만 끝내 형구를 풀어주지 않았다. 또 독방 천장에는 매우 밝은 전등이 설치되어 있었고 감시카메라가 주야로 감시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 감시카메라는 전 성에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어 랴오닝성 사법청과 랴오닝성 노개노교국이 수시로 감시할 수 있었다. 경찰은 이런 고문을 ‘늘이는 침대’라 불렀다.
고문 시연: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
량윈청은 단식, 단수(絕水)로 항의했다. 3~4일 후, 의사는 죄수를 시켜 량윈청의 코에 호스를 꼽고 음식물과 물을 주입했다. 주입한 음식물은 옥수수가루에 소금을 탄 죽이었다. 음식물 호스는 위 속에 넣어져 있었고, 4일에 한 차례 깨끗이 씻은 후 다시 넣어졌다. 의사는 가끔 그를 괴롭히기 위해 호스에 화학약품을 발라 그의 비강과 식도를 자극했다.
독방 안에서는 고문과 함께 파룬궁에 대한 무고하게 날조된 유언비어와 많은 파룬궁수련생에 대한 불법 재판과 노동교양 처분을 내린 ‘사례’를 반복적으로 방송했다. 어떤 때에는 사법국의 38조 및 랴오닝성에서 만든 38조 세부지침도 방송했다.
몇 십 일 동안 늘려지는 고문으로 량윈청의 많은 장기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게다가 베개도 베지 못하게 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희게 변했고 빠졌다. 어떤 때 그의 소변을 받은 후 바지를 추스려 올려주지 않아 고의로 추위에 떨게 했다. 그의 두 무릎은 류머티스성 관절염과 관절염 증상이 나타났다.
량윈청이 독방에서 60일간 단식하자 경찰은 그를 감옥 병원으로 옮겼다. 5일 뒤, 자오강(趙剛) 등은 그를 다롄시 감옥으로 이송했다.
3. 다롄 감옥에서 열쇠로 손등 긋기, 바늘로 손가락 찌르기 고문당해
2011년 10월 13일, 량윈청은 비밀리에 다롄시 감옥으로 이송됐다. 이 감옥과 번시시 감옥은 동일한 시급(市級) 감옥이다.(중국의 가장 낮은 급의 감옥으로 대우가 가장 좋지 않고 함부로 대하도록 하는 감옥) 감옥장 하오원솨이(郝文帥), 교도관 감옥장 장샤오위(張孝玉)는 모두 다롄시 노동교양소에서 파견되어 왔다.(이후 2012년 8월 경, 장샤오위가 전근되어 가고 청(程) 모란 사람이 교도관 감옥장을 맡게 됨)
량윈청은 4감구역으로 이송됐다. 이 감구역은 대대장 장웨이(張偉)와 교도원 가오웨이(高偉), 교도관 대대장 주안성(祝安勝), 그리고 30~40명의 경찰이 있다. 아래에는 3개 중대가 있고 3개 중대에는 중대마다 60~70명이 있다. 어떤 때에는 80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중대마다 1~3명의 파룬궁수련생이 수감되어 있다. 량윈청은 2중대에 수감됐다. 2중대장은 쑤이융즈(隋永治)이다. 악독한 경찰은 ‘바오자(감시자)’ 4명을 배치해 량윈청을 박해했다. 한 사람은 ‘임시주도자'(중대 모든 수감자를 관할하는 죄수로서 감구역장이 임명한다. 감옥마다 다른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대대장’, ‘기술원’ 등 남이 알기 어려운 명칭을 사용했다. 모두 감구역 경찰에 사주를 받고 수감자를 구타, 박해하는 죄수다.) 친옌(秦岩)이고, 한 사람은 ‘실장(室長,감방 우두머리)’ 리구이펑(李貴峰)이며, 다른 두 죄수는 톈칭(田清)과 저우펑(周芃)이다. 저우펑과 톈칭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주야로 번갈아 량윈청을 감시하고 박해했다.
바오자에게는 파룬궁수련생을 마음대로 구타하고 욕할 특권이 부여됐다. 이송 삼일 후 량윈청은 텐칭, 친옌에게 구타당했다. 10여 일 후 다시 톈칭에게 구타당했다. 이 후에도 량윈청은 바오자 또는 다른 관리 업무를 맡은 죄수로부터 최소 14~15차례 구타당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다음 몇 차례이다.
고문 시연: 가혹한 구타
2012년 5월, 친옌은 대대장 장웨이의 명령을 받고 죄수 5~6명과 함께 감옥 마당에서 공개적으로 구타했다. 며칠 뒤 장웨이는 바오자 류촨레이(劉傳磊, 전 바오자 저우펑과 양리궈를 대신함)에게 량윈청을 공개적으로 구타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튿날 작업실 안에서 류촨레이는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량 씨의 발등을 발로 밟고 얼굴을 구타했다. 그리고 빗자루가 부서질 때까지 구타했다. 그날 류촨레이는 또 장웨이, 쑤이융즈의 지시로 관리 업무를 맡은 죄수 린보(林博)와 함께 량윈청을 구타했다. 류 모는 량 씨의 손등을 열쇠로 힘껏 그어 순식간에 철철 피가 흘러 내렸다.(아직까지 손등 위에 많은 상흔이 남아 있다) 며칠 뒤 류 모는 또 장웨이의 지시 하에 죄수 양쉬린(楊緒霖), 쑨쉐리(孫學立)와 함께 량윈청의 손톱을 바늘로 찔렀다.
고문 설명도: 바늘 고문
4. 다롄 감옥의 비닐주머니를 머리에 씌운 채 구타하고 꼬집고 고춧물 끼얹기
2012년 중공 18기 인민대표대회 기간, 임시주도자 판광차이(范廣財, 친옌 후임)는 장웨이의 지시를 받고 갑자기 주먹으로 량윈청의 얼굴 부위를 사납게 구타했고 량윈청은 코피를 철철 흘렸다. 또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눈을 구타했고 위 눈꺼풀은 터져 선혈이 흘렀다.
악독한 경찰도 가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직접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했다. 중대장 쑤이융즈는 량윈청을 최소 3차례 구타했다. 가장 사악한 것은 대대장 장웨이이다. 그는 수차례 량 씨를 직접 박해했다. 그의 가장 사악한 박해는 두 차례나 된다. 엄동설한 한 겨울에 장웨이는 량 씨가 몸수색을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찰 사무실 복도 안에서 관리 업무를 맡은 죄수 린보 등에게 량 씨의 옷과 신발을 모두 벗기라고 지시했다. 팬티만 남긴 채 벌거숭이가 된 그의 손을 뒤로 묶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세워둔 후 모든 문을 열어 추위에 떨게 했다. 장웨이는 손과 신발로 량 씨의 뺨과 몸을 구타했고 죄수를 시켜 머리에 검은 비닐주머니를 씌운 채 몸과 사타구니를 구타하고 꼬집었고 음모를 손으로 잡아 뽑는 고문을 가했다. 그런 다음 비닐주머니를 벗기고 냉수 한 대야를 머리에 끼얹는 등 두 시간에 걸쳐 그를 고문했다.
중공 고문 설명도: 얼음냉수를 끼얹기
2013년 3월 말 어느 날, 4감구역 사무실 안에서 장웨이와 쑤이융즈, 바오자 톈칭 및 관리 업무를 맡은 죄수 위유푸(於有福) 등은 량윈청의 옷을 팬티만 남긴 채 모두 벗긴 후 손을 뒤로 묶었다. 그리고 방안의 창문을 열고 량 씨의 팬티 안에 많은 고추가루를 넣었다. 그런 후 장웨이와 쑤이융즈가 량 씨를 구타했다. 쑤이융즈는 손으로 구타했고, 장웨이는 고무몽둥이와 신발로 구타했다. 장웨이는 구타하면서 한 대야 가득한 차가운 수돗물을 량 씨의 머리에 끼얹었다. 죄수 위유푸는 화장실에서 물을 계속 나르거나 바닥의 고추가루 섞인 물을 대야에 담아 장웨이에게 건네는 일을 했다. 고추가루의 작용은 눈, 음부 및 부상을 입은 상처 표면을 따갑게 했다. 량윈청은 세 시간 넘는 고문으로 상처투성이가 됐다.
2012년 5월, 임시주도자 천옌은 장웨이의 지시로 바오자 톈칭, 류촨레이 등과 함께 5일간 량윈청을 잠을 재우지 않았다. 같은 해 연말 경에도 바오자들은 장웨이, 쑤이융즈의 지시로 4~5일간 잠 안재우기 고문을 했다.
감구역에서는 또 량윈청에게 밥을 조금만 배급했고 가족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 교도관 대대장 주안성(祝安勝)은 “성 노개노동국은 ‘전향’하지 않으면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량윈청은 다롄시 감옥에서 23개월간 수감되어 있는 도중에 가족을 면회할 수 없었다. 량 씨의 형이 많은 고생을 하며 고향에서 3-4백리 떨어진 감옥으로 면회를 왔으나 면회하지 못했다.
다롄시 감옥은 일은 매우 적게 하지만 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강제 ‘전향’시키는 ‘유다(猶大, 배반자)’를 양성했고, 그들에게 높은 점수를 줘 감형 받게 했다. 그들은 다롄시 감옥의 사악한 박해 하에 ‘전향’한 파룬궁수련생이다. ‘유다’들은 교육처 경찰의 교육을 받고 전문적으로 ‘전향’하지 않는 파룬궁수련생을 찾아 대화하며 허튼소리를 떠들어 댔다.
이것이 바로 국법을 짓밟는 깡패 소굴 다롄시 감옥이다.
문장발표: 2014년 3월 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3/6/2883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