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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억울한 옥살이 학대에 바이인시 검찰원의 젊은 청장, 정신이상 되다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간쑤보도) 원 바이인시(白銀市) 검찰원 경제청 청장, 당시 나이 30여 세인 창쥐빈(常具斌)은 11년의 불법 판결을 받고는, 감옥에서 수차례 영창실, 감방, 독방 등을 전전하며 심신이 시달렸다. 2013년 8월 31일 출소했지만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실성해서 아내, 아들과 함께 정상 생활을 하지 못하고 길거리를 헤맸다. 소식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법원에 이혼 서류를 제출했다고 한다.

현재 47세 가량 된 창쥐빈은 성 정법학원을 졸업했다. 파룬궁을 수련해 ‘진ㆍ선ㆍ인(眞ㆍ善ㆍ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었고, 도덕과 사상경지를 제고했다. 1999년 7월에 파룬궁이 모욕, 박해 당하자 그는 10월 26일에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12월 7일에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아 간쑤성 핑안타이(平安台) 노동교양소에서 박해 당했다. 직장에서는 그를 강박해 강제로 사퇴시켰다. 당시 창쥐빈은 5차 불법 구류를 당했는데 도합 145일간 구류되었다.

2002년 8월 17일, 18일, 19일에 간쑤 란저우(蘭州), 톈수이(天水), 바이인 지역의 유선 텔레비전방송국에서 대법진상 프로그램을 스팟 방송했는데, 《역사의 심판》, 《견증》 등의 프로그램이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7일 저녁 7시 30분경 10만 명가량 시청하는 바이인시 바이인 회사 유선 텔레비전방송국에서 파룬궁 진상프로그램 《역사의 심판》, 장쩌민(江澤民)깡패, 악질 토호, 하수인의 악독한 몰골을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펼쳐보였다.

뒤이어 간쑤성 공안청, 란저우시 공안국, 바이인시 공안국이 결탁해서파룬궁수련생을 납치했고, 일부 파룬궁수련생에게는 구족을 연좌해 불법으로 친척을 함부로체포하는 동시에 모진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창쥐빈은 이전에 두 달간 악독한 경찰의 박해가 끊이지 않아 유랑생활을 했고, 또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당했다. 그의 연공하지 않는 아내도 공안국으로 납치돼 하루 동안 불법 감금당했다.

2002년 9월 6일자, 자유 아시아방송국 보도에 따르면, 바이인시 바이인 회사의 유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9월 6일 7시 15분경 파룬궁 진상녹화를 스팟 방송했다고 한다. 내용은 장쩌민이 잔혹하게 파룬궁을 박해한 화면을 대략 15분 동안 지속 방송했다. 유한 텔레비전의 전파 범위는 대략 3킬로미터로, 바인 회사의 10만여 직원과 가족은 모두 볼 수 있었다.

창쥐빈과 바이인 회사의 파룬궁수련생 장광리(張廣利)는 2002년 9월 상순, 중순에 잇달아 란저우에서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그 후에 바이인으로 옮겨져 비밀리에 감금당했다.

2002년 10월 27일, 란저우시 청관구(城關區)법원은, 유선 텔레비전방송을 이용해 제작한 ‘파룬궁 진상시디’를 스팟 방송했다하여, 7명의 파룬궁수련생에게 불법으로 10년~20년의 중형을 내렸다. 그 중 리원밍(李文明), 왕펑윈(王鵬雲), 웨이쥔런(魏俊仁)은 20년, 쑨자오하이(孫照海), 창샤오이(強曉宜), 류즈룽(劉志榮), 쑤안저우(蘇安洲)는 각각 10~19년을 선고 받았다. 바이인시 바이인구 법원도 같은 이유로 파룬궁수련생 장광리(張廣利)에게 12년, 창쥐빈에게 11년의 불법 중형을 판결했다.

창쥐빈은 란저우 감옥(즉 다사핑(大砂坪)감옥)에 납치돼, 수차례 영창실, 감방에 감금당했는데, 박해를 저지했다하여 줄곧 면회를 불허했다. 그러다 2005년 8월, 성 노개국의 사람과 이야기할 때 창쥐빈은 이렇게 폭로했다. 란저우 감옥은 회의하여 파룬궁수련생을 영창실, 감방에 감금했는데 줄곧 2008년까지 감방에 갇혀 나오지 못하게 하는 박해를 가했다. 창쥐빈은 란저우감옥 4감구역 방안에 불법 감금당했고, 악독한 경찰은 강제로 ‘전향’시키려 했다.

演示:关小号 

시연: 독방에 가두기

2008년 7,8월경 저녁에 출석을 부를 때 인원수를 보고하지 않았다고 창쥐빈은 또 영창실에 2개월 동안 갇혔다. 나온 뒤에 죄수에게 감시당한 채 아래층으로 내려가 활동을 허락받지 못했다. 줄곧 3층의 독방에 갇힌 채 죄수 6명 이 전문적으로 감시했다.

2009년 7월, 창쥐빈은 또 4감구역 구역장 가오전둥(高振東)에 의해 쇠 침대에 채워져 고문 박해를 당했다. 또 다른 한 파룬궁수련생도 함께 박해 당했다.

2009년 11월 11일, 창쥐빈의 노모는 고향 후이닝(會寧)에서 홀몸으로 란저우 감옥으로 그를 면회하러 왔다. 감옥 면회실에서 창쥐빈을 박해한 4감구역의 경찰은 모친에게, 차위빈이 그들을 구타하고 욕했기에 가족과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게다가 강제로 창쥐빈의 모친을 면회실에서 밀어냈다. 이튿날, 창쥐빈의 모친이 란저우감옥 관리국을 찾아가 왜 아들과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지 묻자 관련 책임자는 란저우감옥에 전화를 했다. 모친은 창쥐빈은 이미 영창실에 3개월 7일 동안 갇혔다고 말하는 전화내용을들었다. 셋째 날, 창쥐빈과 노모가 만났을 때 죄수 바오자(包夾) 2명이 바싹 뒤따르고 있었고, 창쥐빈은 박해로 얼굴이 부어오르고 다리 부위에 이상증세가 있음을 보았다.

2010년 3월, 창쥐빈은 바이인시 검찰원(창쥐빈의 원래의 직장)에 편지 한통을 써서, 소대장에게 전해달라고 했으나 소대장은 대답하지 않고 편지를 중대장 가오융핑(高永平)에게 갖다 주었다. 중대장은 또 편지를 교도원 쑤둥하이(蘇東海)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맨 마지막에 편지는 부 정위 장취안민(張全民)의 손에까지 전달되었다. 장취안민은 편지를 본 뒤에 창쥐빈을 독방에 가두었다. 그리고 또 꿰매기 고문(穿刑, 족쇄와 수갑을 철사로 한데 꿰맸는데, 사람은 단지 허리를 굽힐 뿐 몸은 펼 수 없었다. 창쥐빈은 76일 동안 독방에 갇혔다. 창쥐빈은 박해로 앞을 보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했다. 악독한 경찰들은 창쥐빈이 위독해지자 독방에서 풀어주었다.

中共酷刑示意图:手铐脚镣

중공 고문 설명도:수갑 족쇄 고문(手銬腳鐐)

란저우 감옥(즉 다사핑(大砂坪)감옥)은 란저우 황하 북쪽에 위치한다. 감옥의 생산 구역과 생활 구역은 서로 떨어져 있는데, 생산 구역은 전체 생활 구역을 둘러싸고 있었다. 감옥의 총 면적은 34.9만 평방미터이고, 수감 인원은 4천여 명, 교도관은 1천여 명이다. 그곳에서는 수감인원에게 보석을 갈고, 축구공을 깁고, 전등, 등롱을 만들고, 카펫을 짜고, 털옷을 짜고, 쇠문 쇠창 등의 노역 노동을 시켰다. 이 사악의 소굴은 2001년부터 간쑤성 남성 파룬궁수련생들을 불법 감금하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불법 감금당한 파룬궁수련생이 가장 많았는데, 120여 명이 되었다. 당시 감옥에 들어가면 파룬궁수련생은 먼저 입감대에 3개월 동안 갇혀, 강제로 세뇌 ‘전향’, 해바라기를 벗기고 마늘을 벗기는 노역 노동 등을 당했다. 만약 감옥 규정을 외우지 않으면 곧 작업실 중간에 매달았다. 모든 파룬궁수련생에게는 ‘바오자’ 죄수 한 사람 이상을 배치해 감시했는데, 일거일동을 기록해 교도관에게 주었다. 그리고 연공을 못하게 했고 어떠한 사람과도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죄수를 포함). 악독한 경찰은 형기를 줄이고, 감점하는 등 악랄한 상벌수단으로 죄수가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도록 격려했다.

‘영창실’은 처음에 생산구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한 줄에 30여 동의 단층집이 있었고 양쪽으로 문을 열었다. 영창실은 6평방미터인데, 시멘트 침대는 돌을 쌓아 올려 높낮이가 고르지 않았다. 앞은 큰 변기인데, 30~40센티미터 가량의 물통이 있었고, 창문이 없었다. 문밖에 있는 공간은 4평방미터 가량의 쇠 우리가 있었고, 전문적으로 한 무리의 죄수를 배치하여 8명에서 10명이 24시간 동안 떠나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영창실에 가둔 사람에게는 ‘쇠고랑이’를 내리치고, 수갑을 채우고, 체벌을 가하는 등을 책임졌다. 그리고 당직 교도관은 매일 두 사람이었다. 그 후 영창실은 생활 구역에 설치되었고, 윗면에는 한 층의 단층집이 있었다. 영창실은 지하실에 설치해, 안에 사인 침대(死人床), 쇠의자, 포말 벽을 설치해 밖에서 영창실에서 나는 약간의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영창실은 환경이 극히 악랄했을 뿐만 아니라, 매일 두 주먹 크기의 만두 두 개를 점심과 저녁밥으로 주었을 뿐, 이외에 요기할 다른 것이 없었다. 한겨울에는 파룬궁수련생을 실외의 노천에 가두어 놓아 추위에 떨게 했고, 이글거리는 한여름 혹서에는 문과 창문을 꽉 닫아놓아 실내는 찜통 같았다.

2004년, 란저우 감옥에서는 감옥 ‘610’과를 만들어 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 박해를 책임졌다. 이 과는 간쑤성 610과 성 감옥 관리국 교육처에서 영도했고, 처장 판신성(潘新盛)이 주요책임자였다. 란저우 감옥 부감옥장 류위안전(劉元珍)은 전문적으로 이른바 ‘전향’을 책임졌다. 가장은 자오쥔(趙軍)이라 불렀는데, 감옥의 파룬궁수련생 박해를 전임했다. 2005년 11월 1일, 감옥 측은 또 한 차례 광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했다. 어떤 파룬궁수련생은 방안에 갇혀 4명의 죄수가 윤번으로 지키며 잠을 못 자도록 감시했다. 그리고 하루에 만두 한개, 물 한 컵만 주고는 세뇌를 진행해 정신적 박해를 감행했다. 어떤 파룬궁수련생은 영창실에 갇혀 족쇄, 수갑을 찼으며, 어떤 파룬궁수련생은 공중에 매달리는 고통을 당했고, 또 어떤 파룬궁수련생은 박해로 생명이 위독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란저우감옥은 1999년 7월부터 차례로 대략 200여 명의 파룬궁수련생을 불법 감금했다. 젊고 유능한 한 멀쩡한 청년을 1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시키고 박해해 정신이상자로 만들어 돌아갈 집이 없이 생활능력도 박탈한 채 길거리를 헤매도록 했다. 이것은 다만 중공사당이 만든 수만 건 이상의 인간 비극 중 하나에 불과하다.

문장발표: 2014년 2월 2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2/24/2880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