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헤이룽장 허강시 탄 씨 부자 9년 전 박해로 사망(사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2월 27일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허강시(鶴崗市) 파룬궁수련생 탄옌쥔(譚延軍)이 박해로 사망한 지 9년째가 되는 날이다. 탄옌쥔 일가는 이 몇 해 동안에 중공(중국공산당)의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두 아들딸은 그가 사망할 때 겨우 초등학생이었고, 그의 부친 탄궈이(譚國義)도 박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현지 경찰은 지금까지 탄옌쥔의 여동생 탄옌웨이(譚延偉)에게 호구를 회복시켜 주지 않고 있다……

탄옌쥔이 박해로 사망한 경과

탄옌쥔(譚延軍)

탄옌쥔은 헤이룽장성 룽메이(龍煤) 허강(鶴崗)분회사 허광(鶴礦) 건축설치공정처 노동자였다. ‘퇴직’한 뒤, 가난하게 생계를 꾸리다가 과로로 좌골신경통이 걸렸다. 늘 쇼크 증상, 숨이 가쁜 증상이 나타났으나 병 원인을 검사해 내지 못했고 장시기 병 치료를 해도 호전이 없었다. 1996년에 탄옌쥔은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로 건강을 회복하고 일도 할 수 있었다.

중공이 끊임없이 교란하고 파룬궁을 박해하자 1999년 7월 19일 저녁, 탄옌쥔은 베이징으로 가서 파룬궁을 위해 청원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허강시 공농(工農)공안분국 신난(新南)파출소 소장 장핑(章平)에게 납치, 가택수색, 3개월 동안 불법 감금을 당했다.

2000년 3월 1일, 탄옌쥔은 또 신난파출소 소장 장쥔(張軍)에게 허강시 공안국 제1구치소로 납치돼 7개월 동안 불법 감금당했는데, 그 기간에 각종 고문학대를 심하게 당했다. 박해로 생활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었다. 감옥 의사가 그에게 혈압과 맥박이 없다는 진단을 내려서야 허강시 공안국은 탄옌쥔의 모친에게 사람을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2002년 1월 9일 아침 7시, 허강시 공농공안분국 신난파출소 소장 장쥔은 경찰 류빙(劉兵), 장진성(姜金升) 등을 데리고 탄옌쥔의 집에 갔다. 그들은 탄 씨의 아들이 학교에 가려고 문을 연 틈을 타 강제로 민가에 침입했다. 그리고 탄옌쥔을 신난 파출소로 납치했다. 그 후, 경찰은 두 차례나 탄옌쥔의 집으로 가서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감행했다. 당시 집에 사람이 없어 장쥔, 류빙, 장진성 등 경찰은 아래층 이웃 류펑더(劉鳳德)의 아내 쉬수메이(徐淑梅), 아들 류펑(劉鳳)을 시켜 사다리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탄옌쥔의 집 창문 유리를 부수고 들이닥쳐 가택수색을 감행하였으며, 파룬궁 서적, 저축통장, 현금, 가정용 전기 기구 등을 수색해 갔다.

신난 파출소에서 탄옌쥔은 공농공안국 국장 리수장(李樹江) 등에게 꼬박 하루 동안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했으며 구타를 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경찰은 그의 손가락을 잡고 10여 권의 공백 사건자료에 강제로 지장을 찍었다. 탄옌쥔이 허강시 제1구치소에 갇힌 뒤, 공농분국 국장 리수장은 매일 그에게 고문을 가했는데, 여러 차례 206개 뼈를 비틀어 떼어내는 고문으로 그를 학대했다. 리수장은 또 탄옌쥔에게 “시위(시위원회) 서기 장싱푸(張興福)가 말했는데, 파룬궁을 어떻게 대해도 지나치지 않고, 일이 생기면 상부가 알아서 감당할 것인바, 당신을 구타로 죽이면 인원수가 된다.”라고 말했다.

2002년 4월 18일, 신난파출소 경찰 장즈펑(張志鵬)은 신난 초등학교로 가서 탄옌쥔의 딸, 아들을 허강시 제1구치소로 붙잡아 갔다. 그리고 두 아이를 핍박해 탄옌쥔의 일을 말하게 했다. 두 아이는 탄옌쥔을 보았으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은 구타로 시퍼렇게 부어올라 물집이 생겼는데, 이미 감염되어 고름이 생긴 상태였다. 그는 걸상 위로 끌려가서 몸은 벽을 의지했으나 곧바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앉지 못했다. 탄옌쥔은 두 아이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구타를 당해 고막이 천공되었고 심장병에 걸렸으며 또 전신 관절이 손상을 입었는데, 시 병원에서 검사했다.”라는 것을 알려주라고 했다. 두 아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는 안으며 목 놓아 울었다.

2004년 9월 14일, 탄옌쥔의 가족은 거듭 허강시 공안국 제1구치소에 감정비를 바쳤고, 탄옌쥔은 고막 천공, 강직성 척주염, 두광대뼈 관절 골성관절염, 폐결핵, 두성심계항진, 류머티즘 증상이 있어서 걷지 못하고, 허리 부위, 두 하지는 활동할 수 없어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는 검사 결과가 내려졌다.

2004년 11월 15일, 허강시 공안국 제1구치소 소장 리잉천(李迎晨), 감옥 의사 양잔쥔(楊佔軍), 기사 장창(張強)은 피골이 상접한 탄옌쥔을 그의 모친 집에서 100미터 밖에 떨어진 골목 안에 던져버리고는 곧 거들먹거리며 떠났다. 탄옌쥔의 65세 모친은 어쩔 수 없이 탄옌쥔을 대문 밖으로 끌어서 데려갔다. 탄옌쥔은 기어서 집으로 들어갔다. 탄옌쥔은 누나에게 “저는 두 발로 걸어서 집 문을 나섰다가, 두 손으로 기어서 들어섰어요. 모두 공산당이 저를 해쳤습니다.”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탄옌쥔은 앉지도 눕지도 못했으며, 다만 벽에 반쯤 기대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밥을 먹지 못하고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또 늘 각혈하고 숨도 쉴 수 없는 상태로 해골처럼 여위었다. 2005년 2월 27일 점심, 탄옌쥔은 미성년인 딸, 아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뜬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겨우 40세였다.

부친 탄궈이가 억울하게 세상을 뜨다

탄궈이(譚國義)

탄옌쥔의 부친 탄궈이는 헤이룽장성 룽메이 허강분회사 허광건축설치 공정처 퇴직 노동자였다. 그는 건축 공사장에서 40년 동안 일을 했는데, 두 차례나(스팀을 들었음) 지하 도랑에 떨어져 다치는 바람에 등허리 골증식 증상이 나타나 등이 굽었다. 더군다나 십이지장궤양에 걸려 두 차례나 위출혈 증상이 나타나 몸이 아주 허약했다.

1997년, 탄궈이는 파룬궁수련을 시작하면서 십이지장궤양이 다 나아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물도 길을 수 있었다. 직장 동료 자녀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날, 사람들은 그에게 “탄 씨는 정력이 왕성해졌다. 등허리도 곧게 펴져 등이 펴졌고 키도 커졌다.”라고 했다. 그는 웃으면서 “파룬궁을 연마해 몸이 좋아졌다.”라고 말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은 파룬궁을 광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둥산구(東山區) 46위원회 주임 훠펑윈(霍鳳雲)은 둥산 공안분국 신이(新一) 파출소 경찰을 데리고 탄 씨 집으로 가서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감행했다.

2002년 6월 29일, 탄궈이는 신이파출소 소장 왕차이(王才), 양마오린(楊茂林), 샤오춘취안(肖春泉), 멍링쥔(孟令軍) 등에게 납치되고 가택수색을 당했다. 그리고 허강시 제2구치소에 갇혀 신체 능력을 초과한 혹형과 학대를 당했고, 매일 겨우 만터우 하나만 먹었다. 그 후, 그는 폐결핵에 걸려 늘 열이 오르고 각혈해 룽메이 허강분회사 결핵병원에 보내졌다. 구치소 경찰은 가족에게 입원 치료비를 바치도록 했다. 탄궈이의 아들 탄옌쥔, 딸 탄옌웨이 등 자녀 몇은 당시 모두 감옥에 붙잡혀 들어갔기에 의료비를 가져올 사람이 없었다. 제2구치소 소장 장푸훙(張福宏)은 곧 탄궈이를 신이파출소로 되돌려 보냈다. 탄궈이는 그 후에 집으로 보내져 돌아왔다. 둥산구 신안 지역회사 주임 천펑롄(陳鳳蓮)은 날마다 탄궈이의 집으로 가서 감시했는데, 심지어 2003년 설에도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

중공 인원이 날마다 교란하고 공갈협박 하는 상황에 탄궈이의 몸은 건강을 회복할 수 없었다. 그는 늘 열이 오르며 각혈했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으며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다. 더군다나 노인은 9년 판결을 당한 아들, 불법 노동교양 3년을 당한 넷째 딸을 그리워했고, 지명수배를 당한 큰딸과 수시로 붙잡힐 위험에 노출된 셋째 딸이 걱정되었다. 게다가 보살펴 줄 수 없는 두 손자와 병 있는 아내를 걱정하느라 그의 병세마저 점점 심각해졌다. 2004년 7월 3일 이른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각, 탄궈이는 친인들에 대한 근심을 품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67세였다.

여동생 탄옌웨이는 악독한 경찰에게 사사로이 호구를 이동 당하다

마음씨가 착한 탄옌쥔이 경찰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해 사망한 뒤, 남겨진 어린 두 아들딸과 하루하루 연로해 가는 모친은 세상의 몰인정을 실컷 당했다. 그의 친인은 또 끊임없이 경찰에게 교란, 박해를 당했다.

2008년 9월 8일, 탄옌쥔의 여동생 탄옌웨이는 집에서 둥산 공안분국 신이파출소 경찰 장주린(張祖林)에 의해 파출소로 납치당했다. 그리고 강제로 노동교양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당했다. 장주린, 멍링쥔(孟令軍) 등 경찰은 탄옌쥔의 집으로 가서 불법 가택수색을 감행했는데, 다 뒤져도 모함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장주린은 또 탄옌웨이의 모친에게 딸의 호구를 옮기면 그녀에서 최저생활보장 수속을 밟아준다고 거짓말을 했다.

2009년 9월 10일, 탄옌쥔의 모친이 둥산 공안분국 신이 파출소로 가서 다 찍은 신분증을 찾으러 갔을 때, 장주린은 그녀의 손에서 호구를속여 뺐어 사사로이 탄옌웨이의 호구 페이지에서 ‘옮김’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이때부터 탄 씨 가족은 여러 차례 신고, 청원하면서 호구를 회복해 달라고요구했다. 그러나 관련 부서는 지금까지도 탄옌웨이가 파룬궁을 수련해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는 것을 구실로 해결해 주지 않고 있다.

문장발표: 2014년 2월 4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2/4/287165.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