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허난 허비시 치현 추이수융, 박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남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난보도) 허비시(鶴壁市) 치현(淇縣) 차오멍향(橋盟鄉) 추이좡촌(崔莊村) 파룬궁수련생 추이수융(崔樹勇)은 6년의 무고한 판결을 당했다. 구치소에 불법적으로 감금당한 기간에 박해로 폐결핵 증상이 나타나자 감옥에서는 수감을 거부해,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또 불법조직인 ‘610’의 교란과 공갈협박으로 병이 차츰 가중되었다. 결국 2013년 11월 20일(음력 10월 1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1999년 7월, 중공(중국공산당) 장쩌민 정치 깡패집단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한 후부터, 추이수융은 끊임없이 치현 610사무실, 치현 공안국 국가보안과, 허난성(河南省) 제3노교소 등 부서에서 박해를 당했다.

1999년 겨울, 추이수융은 치현 차오멍향 파출소 경찰에게 진상을 명백히 알리려고 그들에게 진상 자료를 보냈다. 치현 차오멍향 파출소 경찰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중공(중국공산당) 사당의 세뇌로 오히려 추이수융을 불법 구류시켰다. 그 후에는 치현 공안국 국가보안과로 옮겨 구류시켰다. 국가보안과를 주관하는 부국장 황슈메이(黃秀梅)와 국가보안과장 리슈청(李秀成)이 박해에 참여했고, 또 추이수융에게 고문을 사용했는데, 장시간 두 손을 매달아 발이 땅에 닿지 못하게 했다. 그 후, 또 치현 구치소에 설이 될 때까지 불법 감금하고서야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2000년 3월, 추이수융과 치현의 다른 파룬궁수련생은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톈안먼 인근의 파출소에 구류 당했다. 이름과 주소를 말하지 않자, 파출소 경찰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추이수융은 치현 공안국 경찰에게 납치당해 현지로 끌려왔고, 그 뒤에 치현 ‘610사무실’의 지시를 받은 치현 법원이 추이수융에게 4년의 무고한 판결을 내렸으며, 추이수융은 허난성 정저우 감옥[정저우 신미시(新密市)에 위치]으로 옮겨져 박해를 당했다.

2004년 6월에 출소해 집으로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은 2005년에 설에 자기 집 주련에 ‘선악에는 인과응보가 있는바, 진심으로 양심을 바꾸자’라고 쓴 것 때문에 또 치현 공안국 불법 인원이 부른, 허비시에서 온 3명에게 혹독하게 구타를 당했다. 구타를 당한 뒤에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떠나기 전, 그는 이미 말하는 것도 아주 힘겨워했다. 그는 아내에게 “나는 이번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라고 겨우 힘겹게 한 마디 말했다. 그 후, 2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2005년 4월에 허난성 제3노교소로 납치돼 박해를 당했다.

노동교양소의 악독한 교도관 자오즈민(趙志民, 대장), 선젠웨이(沈建偉, 지도원), 멍광루(孟廣路, 경찰)는 추이수융에게 ‘3서’를 쓰도록 핍박했다. 악독한 이 세 명은 추이수융을 밧줄로 장시간 묶어서 혹독하게 구타했는데, 밧줄이 두 갈래로 끊어졌고 고무몽둥이도 구타로 두 동강이 났으며, 추이수융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악독한 교도관 선젠웨이는 가죽 구두로 추이수융의 얼굴을 필사적으로 구타했다. 가죽 구두가 파손될 정도였으며, 얼굴은 구타당해 변형되었다. 5월 5일, 큰비가 내리고 있었다. 악독한 교도관 선젠웨이는 추이수융의 얼굴을 연속 구타해 코가 시퍼렇게 되었고 얼굴이 부어올랐으며 온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게다가 추이수융을 밖으로 끌고 가 비에 젖게 했다. 그 후, 바오자 왕융강(王永剛), 리푸빈(李付賓), 리훙즈(李宏志)는 그의 몸에 소변을 누고 얼굴에 가래를 뱉었다.

이렇게 보름 동안 박해를 당했다. 추이수융은 구타로 서지도 못했다. 일주일 후에 악인들은 또 박해를 계속했다. 그들은 추이수융에게 대법 사부님을 모독하고 사당의 말을 옹호하는 말을 하도록 하며, 말하지 않으면 곧 이어서 구타했다. 밤에는 구타하고 낮에는 또 일을 시키며 잠을 자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름에는 옷 세탁도 허락하지 않았다. 맨 마지막에 더욱 악독한 수법을 사용했다. 악독한 교도관들은 고무몽둥이로 혹독하게 그의 가슴을 두들겨 팼다. 그런 다음 다시 잡았는데, 잡힌 추이수융은 연이어 비명을 질렀다. 교도관 장 모는 밖에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빗자루로 추이수융의 입을 막았다. 이 기간에 구타로 고무 몽둥이 하나가 두 동강났고, 손가락 굵기인 끈마저 끊어졌다.

노동교양소의 악독한 교도관들은 추이수융을 50여 일 동안 또 잔혹하게 박해했다. 그 후 1년 넘게 다리가 거동하기 불편했다. 그 기간에 노동교양소는 2만 위안(약 160만원)의 돈을 주면 석방해주겠다고 했다.

2012년 음력 섣달 그믐날, 추이수융은 인근의 쓰더촌(思德村)에서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이 촌 촌장의 아들에게 악의적인 신고를 당해 허비 구치소로 납치당했다. 납치에 참여한 이는 가오촌(高村) 파출소와 차오멍 파출소의 경찰이다. 그 중 차오멍 파출소의 한 경찰은 추이진광(崔金光)이라고 불렀다. 그 후, 추이수융은 치현 법원에 의해 6년의 무고한 판결을 당했는데, 구치소에서 불법 감금당한 기간에 박해로 폐결핵 증상이 나타나 감옥에서 수감을 거부해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뒤에 또 610 불법 인원의 교란과 공갈협박을 당해 병 상태가 점차 가중되었다. 결국 2013년 11월 20일(음력 10월 1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추이수융을 박해하는 데 참여한 허난성 제3노교소 교도관과 해당 부문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4년 1월 29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29/286568.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