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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가지 고문당한 쓰촨성 옌중팡 박해로 사망(사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쓰촨 보도) 쓰촨(四川)성 광위안(廣元)시 창시(蒼溪)현의 65세 파룬궁수련생 옌중팡(閆宗芳)은 2013년 6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한동안, 그녀는 감옥의 고문학대로 다치고 약물 박해를 당해 견디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으로 끊임없는 비명을 냈다. 동시에 중공(중국공산당) 국가보안 특무와 사회구역의 악인은 그녀 가족에게 공갈·협박을 했고 파룬궁수련생이 그녀에게 접근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610’에서 ‘감옥 밖 노동교양처분’을 내린 것이 만기 되지 않았다.

중공이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박해한 14년 사이에 옌중팡 노인은 대략 11년의 세월을 사악한 강제수용소에 불법 납치당해 정신과 육체적 학대를 당했다. 전기봉으로 전기충격 당하기, 경찰봉, 족쇄, 수갑, ‘사형수 침대’, 매달기 고문, 군대자세로 세워두기, 군대자세로 앉히기, 무차별 폭력, 독방에 가두기,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세수를 허락하지 않기, 화장실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야만적인 음식물주입, 약물주입, 뙤약볕 쪼이기 등 수십 가지 고문박해를 당했다.

옌중팡 노인은 1997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모든 질병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녀는 대법을 실증하기 위해 장쩌민 깡패집단의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그녀는 세 차례에 모두 4년 6개월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고 두 차례에 모두 6년 불법 노동 개조를 당했다. 그녀가 박해 시달림을 당해 스스로 생활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중공의 악도는 박해를 멈추지 않았다. 맨 마지막 한 차례는 ‘610’ 악인이 국가보안 특무와 결탁해 그녀를 감옥 밖에서 노동교양 형기를 집행하게 했다. 사회구역 주민위원회도 ‘610’ 악도와 서로 한패가 되어 끊임없이 교란했다.

2013년에 그녀의 가족이 없는 상황에 한 파룬궁수련생이 그녀를 문안하러 갔다가 그녀가 이미 생명이 위독해져 소파 한 모퉁이에 몸을 구부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침대 위에 바로 누워 잠을 잘 수 없었고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가족이 병원에 보내 응급처치를 받게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 채 결국 2013년 6월 5일 오후 4시에 세상을 떠났다.

1.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혹독한 구타, 노동교양소의 고문 학대를 당하다

 闫宗芳
옌중팡(閆宗芳)

옌중팡 여사는 광위안지역 창시현 러우롄공장(肉聯廠)의 퇴직 노동자로, 창시현 류자강(劉家巷) 둥몐공장(凍兔廠) 숙소 2단원 4층에서 살고 있다. 1997년 3월, 몸에 각종 질병을 앓았는데 여러 방면의 치료를 받아도 호전을 보지 못해 생명이 위독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인연이 있어 파룬궁을 만날 수 있었다. 동시에 파룬궁을 배우고 연마한 후에 심신이 건강해졌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사당(邪黨)은 전국에서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다. 정부 부서에 진상을 알려 파룬궁수련생은 좋은 사람이 되려 하며 대법을 수련하면 사회와 가정에 모두 백 가지 이로움만 있지 한 가지 해로움이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 옌중팡은 2000년에 설날 때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 하지만 그 결과 납치를 당했는데 당시 톈안먼 광장에서 경찰은 천지를 뒤덮을 듯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했다. 옌중팡은 톈안먼 금수교(金水橋)로 가서 진상 현수막을 펼쳤다가 베이징 경찰에게 톈안먼파출소로 납치당했으며, 강제로 사진을 찍힌 후 혹독한 구타를 당했다. 베이징 주재 광위안 사무실과 창시 국가보안이 그를 창시 구치소로 붙잡아 들여다가 박해를 가했다. 박해에 참여한 악인은 창시 ‘610’의 커다지(柯大吉), 국가보안대대 뤄샤오룽(羅小龍), 국가보안 악독한 경찰 리핑(李平), 양충(楊聰), 쥐둥성(苟東升), 공안국 정위 장치웨이(張啟維), 구치소의 악독한 경찰 허융푸(何永富), 구치소의 악독한 경찰 정쩌취안(鄭澤泉)이다.

그 후 옌중팡과 리광칭(李光靑), 커우즈슈(寇志秀), 뤄창화(羅長華)는 창시법원에 의해 1년 6개월의 노동교양처분을 받았으며 불법적으로 쯔중(資中) 난무쓰(中楠木) 노동교양소로 보내져 잔혹한 박해와 학대를 당했다. 잠재우지 않기, 화장실 가기 불허하기, 혹서에 목욕 허락하지 않기, 뙤약볕에 쪼이기, 군대자세로 앉히기, 군대 훈련, 혹독한 구타, 손발로 수갑을 채우는 등 고문 학대를 가했다. 악독한 경찰은 강압 전기봉으로 파룬궁수련생 머리 위를 함부로 구타했고 각종 사악한 수단을 취해 강제 전향을 감행했다. 중대의 악독한 경찰은 대장 리(李) 모(50여 세), 친(秦) 모, 장샤오팡(張小芳) 등 악인이다. 옌중팡은 2001년 8월에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拳打腳踢
무차별폭력

옌중팡 여사는 생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치소에서 5개월 가둔 뒤 우리 4명은 난무쓰 여자노동교양소로 보내졌어요. ……마침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하는 7중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백여 명입니다. 경찰대장 리 모(50여 세), 부대장 장샤오팡(張曉芳, 20여 세), 친차오샤(奏朝霞, 40세), 후(胡) 모 등 그녀들은 모두 독하고 악랄했어요. 또 과장 리즈창(李自强)이 있었는데 그녀(그)들은 매우 음험하고 악독했어요. 그녀들은 많은 마약 복용범을 골라 방교(幫敎-교육원)로 삼아 강제로 전향을 감행했는데, 아침 5시부터 저녁 12시까지 전향을 시켰어요. 뙤약볕 아래에서 군대훈련 시키기. 매달기 고문, 작은 의자에 앉히기, 뙤약볕에 쪼이기, 독방에 가두기, 비를 맞히기, 화장실 가기 불허하기, 잠자기 불허하기, 세수 제한하기(일반적으로 삼복날에), 전기봉, 경찰봉, 강제로 음식물 주입하기 등 고문을 당했어요. 대법제자가 전향하지 않고 사악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노동교양소는 또 중앙 방교단을 파견해 왔어요. 저도 불려 갔습니다. 저는 ‘하루를 모신 스승이라도 평생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여 모셔야 해요. 제가 진선인(眞ㆍ善ㆍ忍)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려한 것은 잘못이 없고, 저는 파룬궁을 연마해 몸이 건강해요.’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녀들을 따르지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경문을 외워 박해를 저지했어요.”

“당시 따르지 않고 전향하지 않은 이는 모두 무더위에 뙤약볕을 쪼였어요. (실내 온도가 50도) 왕훙샤(王紅霞), 장원훙(張文宏)은 매일 24시간 동안 춘하추동을 막론하고 밖에서 거의 1년 넘게 앉았어요. 당시 악독한 경찰은 일부러 옴이 가득 생겨난 사람과 전향하지 않는 사람을 1인용 침대 하나에서 잠을 자게 했어요. (8평방미터 되는 방안에 16명) 우리 온 방 안의 사람들도 옴이 생겨 온몸은 극심하게 가려웠고 머리까지 가려웠어요. 천천히 7중대는 옴 중대가 되었고 악독한 경찰마저 당황하여 순시하기 두려워했으며, 마약 복용범은 더욱 두려워했어요. 노동교양소에서는 그제야 당황해 대량의 약물을 사와 강제로 우리에게 발랐어요. 그런 공포적인 환경하에서 저는 대법에 대한 확고함에 따라, 사부님에 대한 굳은 믿음에 따라,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호로 걸어 나왔어요.”

2. 불법 노동교양처분, 지명 수배, ‘사인상(死人床)’ 위에서 59일

2001년 12월에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옌중팡은 창시(蒼溪) 룽산(龍山)진으로 가서 세인에게 진상을 알리고 진상자료를 배포하다 룽산파출소 소장 허우샹위(候祥宇)와 몇 명 경찰에게 창시 공안국으로 납치돼 박해를 당했다. 그리고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해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당시 국가보안대장 쿵윈(孔雲), 이 악도는 파룬궁수련생[그의 모친 차이완전(蔡萬珍)도 파룬궁을 연마함]에 대해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다. 그는 법원과 함께 옌중팡을 모함해 불법적으로 억지로 2년 노동교양처분을 내렸고 2002년 6월에 불법적으로 젠양 감옥에 보냈는데 옌중팡은 도중에 탈출했다.

당시 창시 공안국에서는 전문사건팀을 조직해 인터넷에서 옌중팡을 지명 수배했으며 많은 자금을 들여 전국 각지, 그녀의 모든 친척이 있는 곳을 포함해 체포를 감행했다. 2002년 8월, 옌중팡은 또 악독한 경찰에게 창시 구치소로 납치당했다. 구치소에서는 그녀를 사형수 침대 위에 대(大)자형으로 묶어놓고 2개월 동안 침대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잠을 잤는데 등에는 욕창이 생겨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당시 옌중팡 박해를 지휘한 사람은 정법위 서기 쉬룽중(胥榮宗, 이미 보응을 당했음)이다. 악독한 경찰은 옌중팡과 쩡위셴(曾玉賢), 그리고 또 외지 파룬궁수련생 자오(趙) 씨를 트럭에 압송해 조리돌림을 시켜 모욕했다. 악독한 경찰은 나쁜 일을 저지른 뒤 배후 조종자인 ‘610’에게 큰 상을 받았다.

酷刑演示:銬在床上
고문시연: 침대 위에 매달기

옌중팡 여사는 생전에 말했다. “거금을 들여 곳곳에서 저를 붙잡으려했는데, 결국 붙잡혀 구치소에 감금됐어요. 장룽(張榮) 등 몇 사람은 또 제 큰아들을 창시 구치소로 납치했고, 정쩌취안(鄭澤泉)은 저를 족쇄와 수갑으로 ‘사형 침대’ 위에 59일 동안 묶어놓았어요. 소장 허융푸(何永福)가 오자 저는 ‘당신들은 마땅히 날 풀어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는 ‘살인범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당신은 안됩니다. 당신이 연공을 안 한다는 보증서를 쓰면 가능하겠죠.’라고 말했어요. 제가 ‘쓰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나는 전문 차량으로 직접 당신을 보내 노동교양을 시킬 겁니다.’라고 말했어요. 이 일로 공안국에서는 전문적으로 한 팀을 조직했는데 정쩌취안, 장룽 등 8명이었어요. 그들은 또 사진을 찍어 이 일을 간행물에 게재했는데, 듣기로는 저우융캉(周永康)이 비밀지령을 내리고 25만 위안(약 4,340만 원)을 지불해 그들이 곳곳에서 저를 찾았다고 했어요. 베이징, 저의 모든 친척 형제자매 집마저 간 적이 있어요. 제가 납치당한 후 악독한 경찰은 각각 거액의 상금을 받았어요. 제 큰아들은 몇만 위안의 벌금을 물어서야 풀려났고 저의 매부도 저 때문에 붙잡혀 또 1만여 위안(약 174만 원)의 벌금을 물어서야 풀려났어요.”

“공안국, 구치소의 한 무리는 억지로 구치소로 절 끌고 가서 동영상을 찍어 창시 텔레비전에 선전했어요. 소장 허융푸(何永富), 정쩌취안, 그리고 공안국 파출소 사람은 저와 이외의 몇 명 수련생을 법원 입구까지 끌고 가서 대회를 열어 대중 앞에서 모욕을 가했어요. 게다가 우리를 큰 트럭에 끌어올려 전 성에서 조리돌림을 시켰어요. 저는 줄곧 머리를 숙이지 않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쳤어요. 장시기 ‘사인상(死人床)’ 위에 대자형으로 묶여 있었던 이유로 구치소로 돌아와서 두 손을 풀어주어도 손을 들 수 없었어요. 그들이 억지로 저를 잡아당겨 저는 아파서 눈물을 흘렸어요. 소장 허융푸는 간사하게 웃으며 ‘당신이 외쳐보지, 당신은 아픈 척을 하는 거야!’라고 말했어요.”

그 후 옌중팡은 또 3년 6개월의 불법 판결을 받았는데 구치소에서 가둔 6개월은 계산하지 않았다. 악독한 경찰 허융푸, 펑위춘(馬玉春)은 족쇄와 수갑으로 그녀를 차 위에 단단히 채워 젠양(簡陽) 양마허(養馬河) 여자감옥으로 보냈다.

3. 젠양 양마허 여자감옥에서 박해를 당하다

감옥에서는 파룬궁수련생을 전향하기 위해 각종 사악한 수단을 전부 사용해 각종 고문을 가했다. 사악한 세뇌, 독방에 가두기, 큰 철문을 사용해 파룬궁수련생을 매달기, 두 팔을 곧게 펴게 하기, 몸을 일자형으로 되게 하여 발을 땅에 닿지 않게 하기 등 고문을 가했고, 또 명주실로 감는 학대를 가했다. 강제로 모내기 노역노동을 하루에 10여 시간을 시켰는데, 아침 5시 반부터 저녁 12시 이후까지 시켰다. 옌중팡은 8차례 독방에 갇혀 한 시멘트 받침대에서 엷은 이불을 덮었고 겨울에 또 추웠지만, 밥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

中共酷刑示意圖:吊銬
중공 고문 설명도: 매달기 고문

옌중팡 여사는 생전에 말했다. “2감금구역 대장은 탕(唐)씨이고 부대장은 뤄(羅)씨이며 저를 담당하는 사람은 리(李)씨였어요. 당시 한창 세뇌반을 조직하고 있었는데, 또 저를 전향반으로 보냈어요. 주임 위(余)씨가 책임졌어요. 1개월이 지난 뒤 제가 시종 전향하지 않자 또 저를 2감금구역으로 되돌려 보냈어요. 노동을 심하게 시켰는데 아침 6시부터 저녁 12시가 넘을 때까지 신발 양측을 붙이는 일을 했어요. 연세가 많은 이는 일반 일을 했어요(한 사람이 2~3대 기계를 다뤘는데 전혀 해내지 못했음). 그 후 저는 죄수가 아니기에 사악의 박해에 협력할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 저는 인원수를 보고하지 않았고 죄수복을 입지 않았으며 노동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연공을 하고 대법을 외우고 진상 알리기를 시작했어요. 악독한 경찰은 곧 저를 독방에 가둬 채웠어요. 어느 한 번 감금구역에서 연공을 했다가 위씨 교도관에 의해 대문 입구에 채워졌어요. 손은 당겨져 곧게 펴지고 발은 땅 위에서 떨어졌으며 손발은 잠깐 후에 곧 부어올랐어요. 몸은 극히 괴로워 정말 죽기만도 못한 느낌이었죠. 이렇게 몇 차례나 매달려 있었어요. 감금구역에서는 저를 전향할 수 없게 되자 곧 저를 9감구역에 배치했어요.”

“9감구역 대장은 라이(賴)씨었고 두 바오자(包夾-수감자로 이뤄진 밀착감시원)가 24시간 윤번으로 저를 지켰어요. 저는 그들이 주의하지 않으면 곧 연공을 하고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으며,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말했죠! 중대에서는 늘 대법을 비난하는 텔레비전을 틀어놓았어요. 저는 곧 큰 소리로 그것은 비난과 유언비어 날조라고 외쳤어요. 그 결과 그들은 저를 독방에 가둬 넣었어요. 안에는 다만 시멘트 판 하나밖에 없었고 세수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밥은 절반만 주었고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겨울에는 또 얇은 이불 하나(가로 덮을 수밖에 없었음)밖에 없었고 잠을 잘 때는 두 손을 등 뒤로 채웠어요. 저는 단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했어요. 이틀 후 그녀들은 그제야 수갑을 풀어주었어요. 9감구역에서 저를 전향하지 못하자 또 저를 2감구역으로 되돌려 보냈어요. 저는 아침저녁으로 여전히 연공을 견지하면서 전향하지 않았어요. 한 번은 감구역에서 대회를 열었는데 저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외쳤다가 독방에 갇혔어요. 그 후 밖에서 참관하러 오는 사람이 있자 교도관은 저를 다른 구역에 가뒀죠. 뤄 대장은 ‘이후에 우리는 당신에게 요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어요.”

4. 거듭 노동교양 박해를 당해 내장에 중상을 입다

젠양 감옥에서 돌아온 후 옌중팡은 또 세인에게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하다 악인에게 모함을 당해 또 1년 6개월 노동교양처분을 받았으며 쯔중 난무쓰(楠木寺)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이 노동교양소는 예전보다 더욱 사악했다. 폐쇄식 관리를 하며 4~5명이 한 명의 파룬궁수련생을 감시해 문을 나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강제로 전향하도록 핍박하고 잠자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또 매일 다만 3차례만 화장실에 가게 했고 사악한 전향을 협력하지 않는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화장실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대소변을 바지에 누게 했다. 그리고 또 군대자세로 세우고 늘 혹독한 구타를 가했다. 확고한 파룬궁수련생은 박해로 불구로 됐고 몇 명의 악도는 늘 옌중팡을 혹독하게 구타했다. 악독한 경찰 대장은 장펑밍(張鳳鳴), 돤위안위안(段媛媛)이다.

옌중팡 여사는 생전에 말했다. “창시(蒼溪) 링장(陵江)파출소 소장 타오(陶)씨는 몇 명의 경찰을 거느리고 쑤이닝의 제 아들 집에서 저를 구치소로 납치했으며 또 저에게 불법적으로 1년 6개월 노동교양처분을 내려 난무쓰 여자노동교양소 7중대로 보냈어요. 대장 런펑밍, 돤위안위안, 장(姜)대장, 그리고 몇 명의 교도관이 있었어요. 바오자는 전부 마약 복용범이었고 저에게 2~4명의 바오자(양화리, 덩샤오링,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음, 양화리는 악인명단에 오른 사람으로 가장 악독함)를 배치해 문을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게 했어요. 아침 5시부터 저녁 1~2시까지 군대자세로 세우기 고문(두 발은 모으고 똑바로 서서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음), 군대자세로 앉히기 고문(두 다리는 모으고 허리는 곧게 펴게 했음)을 가했어요. 어떠한 자유도 없이 끊임없이 사오한 인원이 와서 저를 전향시켰어요. 특별히 그 왕위안(王淵)과 악독한 경찰은 함께 박차를 가해 저를 박해했어요. 제가 듣지 않고 대법을 외우고 단식을 하자 바오자는 곧 저를 사납게 구타했어요. 특별히 그 룽잉(龍影), 장단(張丹)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가장 악독했어요. 이 외에 또 두 명의 바오자 양민(楊敏), 옌빈(顏彬)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저와 대법제자 샤오구이잉(肖桂英)을 314호 방안에 가뒀는데, 말로는 제가 그들에게 단식을 시켰다며 검토문을 쓰라고 했어요. 제가 쓰지 않자 룽잉은 곧 저를 죽도록 때렸어요. 어느 한 번 룽잉은 저를 화장실로 불러서 문과 창문을 닫고 제 목을 조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죠. 그리고 목에 한 줄기 상처가 남게 했어요.”

“이로부터 제 목은 늘 끊임없이 고름이 흘렀어요(줄곧 세상을 뜨기까지). 늘 샤오구이잉을 때렸는데 심장을 때리고 아랫다리를 구타했으며 벽 위에 부딪혔어요. 그리고 화장실로 가서 구타하며 문과 창문을 닫았어요. 저는 늘 구타를 당해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고 배의 내장은 말할 수 없이 그렇게 괴로웠어요. 또 화장실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우리는 오줌과 대변을 모두 바지 위, 침대 위에 누며, 온종일 편안한 날을 보내지 못했어요. 양민과 옌빈은 이러한 악독함을 차마 보지 못해 두려워하며 가려 했어요. 그 후 그녀들은 인명 사고라도 나타날까 두렵다고 보고하러 가자 장 대장은 급히 룽잉을 작업실로 옮겨가서 형기를 20일 연장했어요. 그 후 저는 315호 방안으로 옮겨갔는데 우리는 수련생이 6명이 있었어요. 저는 노동에 참가하지 않고 인원수를 보고함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매달 개인 간력을 등기했는데, 저는 탈당했기에 저와 샤오구이잉은 모두 쓰지 않았어요. 그러자 저에게 노동교양을 20일 동안 연장했고 샤오잉은 1개월을 연장했어요.”

5. 거듭 노동교양 미수, 감시와 교란이 끊임없다

2009년 2월, 옌중팡은 또 ‘610’ 두목 리펑룬(李奉潤), 리룽(李榮), 국가보안 악독한 경찰 양쭤핑(楊佐平), 웨강 한 무리로 납치돼 모함을 당했으며 또 그녀에게 불법으로 1년 6개월의 노동교양처분을 내렸다.

옌중팡 여사는 생전에 말했다. “2009년 2월 18일, 저는 ‘9평공산당’을 배포할 때, 창시현 ‘610’의 악도 리룽에게 미행을 당했는데 저를 ‘610’ 사무실로 끌어갔어요. 국가보안대대의 몇 사람이 와서 강제로 몸수색을 감행했고, ‘610’ 주임 리룽은 ‘610’의 류잉(劉穎), 국가보안대장 양쭤핑, 웨강(嶽剛) 그리고 몇 사람을 파견해 함께 저를 광위안(廣元)구치소로 보냈어요. 이튿날에 저의 집을 수색해 대법 책 20여 권을 강탈했어요. 그리고 저의 자료를 모함했는데, 매번 모두 국가보안대대의 악독한 경찰 양충(楊聰), ‘610’의 리룽이 사실을 과장해 꾸며낸 것입니다. 저를 가두기 위해, 어떠한 법률적 수속이 없는 상황해서 또 저에게 1년 6개월의 노동교양처분을 내렸어요……오래지 않아 저는 마(馬) 대장 등 몇 명 경찰에게 난무쓰 여자노동교양소로 보내졌어요……결과 심전도를 할 때 위장병이 있다고 말했고 제 목 위에 그렇게 큰 베인 곳이 있는 것을 보더니 저에게 물었어요. 저는 ‘바로 당신들 노동교양소에서 한 것입니다. 룽잉(龍影)이 저의 목을 조이고 음식물 주입을 하여 하나의 큰 혹이 생기자, 런펑밍(任鳳鳴) 대장이 저를 병원으로 끌어다가 칼로 한 번 그었는데 지금까지 완쾌할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노동교양소의 사람은 ‘당신은 돌아가세요. 수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창시현 ‘610’은 옌중팡이 거주하고 있는 현지 지역사회 주민위원회에서 옌중팡에 대해 24시간 동안 감시를 하도록 했다. 지역사회 주민위원회는 전문적으로 한 ‘보모’를 배치해 집에서 옌중팡을 지켰다. 이 이른바 보모는 사실 바로 주민위원회 사람으로 그녀는 매일 ‘610’과 공안국 국가보안대대에 옌중팡의 상황을 보고했다. 옌중팡 집에 사람이 가기만 하면 누구든지 막론하고 이 ‘보모’는 ‘610’에 신고했고, 또 ‘610’은 곧 국가보안대대의 사람을 거느리고 함께 사람을 붙잡았다. 둥칭(東靑)진 파룬궁수련생 황츙(黃瓊)과 창시현 정부 소재지 파룬궁수련생 천융(陳勇)은 모두 옌중팡 집으로 갔을 때 붙잡혔다.

2011년 8월 25일, ‘610’의 리룽, ‘국가보안’ 장룽 등 두 사람, 지역사회 주민위원회의 두 명의 여자는 또 옌중팡 집안에 뛰어들어, 어떠한 수속도 보이지 않고 광적으로 가택수색을 감행했다. 그리고 ‘전법륜(轉法輪)’ 경서와 ‘밍후이(明慧)주간’, 션윈 CD 두 장, 진상 CD 두 장, MP3 하나, 노트북 컴퓨터 한 대, 전화 책 하나를 강탈해 갔다.

2012년 1월 16일 저녁 6시가 넘어 옌중팡은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지역 사회의 여자 야오(姚) 씨에게 발견되었다. 그녀는 옌중팡이 손에 작은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자 곧 옌중팡을 가로막으며 강제로 가방을 열어보려고 했다. 옌중팡은 그녀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옌중팡을 미행했고 또 ‘610’, 국가보안에 전화를 걸었다. 그 결과 영화관 밖에서 옌중팡은 ‘610’의 리펑룬(李奉潤), 리룽, 국가보안 웨강, 그리고 둥청 파출소의 경찰에게 포위당해 둥청 파출소로 납치당했다. 강제로 몸수색을 당한 동시에 집 문 열쇠를 빼앗아 불법적으로 그녀의 집을 수색해 대법 서적 20여 권을 강탈해갔다.

중공 불법인원은 또 옌중팡 노인에 대해 1년 6개월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내려 감옥 외에서 형기를 집행했다. 가족은 ‘610’에게 공갈·협박을 당한 뒤 매우 두려워 그녀에 대해 더욱 엄중하게 지키며 수련생들이 그녀와 접촉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610’은 또 시시각각 전화를 걸어 공갈·협박을 했다. 대법 책이 없는데다 노동교양소의 박해를 당한 상처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옌중팡 노인은 스스로 생활할 수도 없게 됐다. 결국 2013년 6월 5일 오후 4시에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3년 6월 17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6/17/2754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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