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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우수교사 다섯 명은 누구의 손에 참사 당했는가?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는 아름다운 해변 도시이다. 다롄은 중공(중국공산당)에 의해 여러 차례 ‘문명도시’로 평가받았다. 당신은 알고 있는가? 바로 이 이른바 ‘문명도시’에서 적어도 5명의 우수한 교사 펑강(馮剛), 천자푸(陳家福), 장춘란(張春蘭), 차이수펀(蔡淑芬), 왕유쥐(王友菊)가 중공의 박해로 살해당했다.

‘존사중도(尊師重道)’는 중화민족의 전통적인 미덕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국대륙에서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자신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고 또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오히려 중공에게 인성을 절멸한 박해를 당했다.

1. 펑강 교사의 죽음은 줄곧 ‘수수께끼’이다

펑강(馮剛) 부부

펑강 교사(향년 50세)는 랴오닝성 다롄 수산학원(水產學院) 미술강사로, 2009년 8월 14일에 다롄시 구치소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7월 4일에 붙잡혀서 8월 14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42일 사이에 펑강 교사는 강제적인 음식물 주입으로 식도가 호스에 꽂혀 터져서 화농 발병, 뒷짐결박으로 채우기, 입원했으나 경찰이 의사의 수술을 거부해 잠시 퇴원, 실종, 갑자기 사망, 시신 해부 등 일련의 변고를 겪었다. 펑강이 생전에 어떠한 박해를 당했는지 지금까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1) 펑강은 회화, 조형 예술에 드문 인재이다

펑강을 잘 아는 사람은 모두 그가 회화, 조형 예술방면에서 조예가 매우 깊음을 알고 있다. 펑강은 파룬궁을 수련한 뒤, 몸이 건강하고 사상 경지가 끊임없이 승화되었고, 예술 창작에서 더욱 성숙되고 순수한 드문 인재가 되었다. 그는 아주 많은 좋은 예술 구상이 있어 줄곧 사회에 대해 세상에 이로운 우수한 작품을 창작해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깊은 유감을 가져 왔고 영원히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남겼다.

(2) 친구 집에 손님으로 갔다가 납치, 아내는 불법 노동교양처분 당하다

2009년 7월 4일 점심, 펑강과 아내 왕쥐안(王娟)은 요청을 받고 스구이샹(石桂香)의 집에 손님으로서 방문을 했는데, 한 무리의 사복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펑강, 왕쥐안, 스구이샹, 왕융항(王永航) 등 12명을 전부 파출소로 납치했다. 그 후, 또 다롄 야오자(姚家) 구치소에 가둬 박해를 가했다. 펑강의 아내 왕쥐안은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아 마싼자(馬三家)교양원에 갇혀 박해를 당했다.

(3) 매일 교도관에게 뒷짐결박, 호스를 꽂고 음식물 박해 당하기, 식도가 꽂혀 터지고 화농하는 고통을 당하다

中共酷刑示意图:背铐

중공 고문 설명도: 뒷짐결박으로 채우기

구치소 안에서 펑강은 줄곧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이에 교도관은 매일 그를 뒷짐결박으로 채우고는 호스를 꽂고 음식물주입 박해를 가했다. 구치소 교도관의 음식물 주입 박해는 음식물을 먹지 않아 입는 상해보다 더 큰 상해를 입혔다. 8월 초, 펑강의 식도는 이미 꽂혀져 터지고 고름이 생겼다. 그러나 이른바 감옥 의사는 의사로서의 도덕을 무시한 채, 여전히 다롄 국가보안대대의 명령을 듣고 양심을 죄다 잃어버리고 계속 음식물 주입을 감행했다. 호스를 꽂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음식물을 주입한 뒤에 호스를 뽑지 않아 호스가 24시간, 심지어는 48시간 내내 체내에 꽂혀 있었다. 교도관은 음식물주입 호스를 펑강이 뽑을까봐 또 뒷짐결박을 채웠다. 수갑을 풀어줄 때에는 손이 두 배로 부어 있었고, 온통 수갑에 조여진 핏자국이 있었다.

(4) 국가보안경찰이 의사가 펑강을 수술하는 것을 거부, 펑강이 고통 참으며 퇴원 후 또 실종

악독한 교도관은 펑강을 괴롭혀 식도에 고름이 생기게 하고, 담낭부위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만들고는 그가 사경을 헤매자 8월 10일에 음식물 주입을 멈추었다. 8월 10일, 펑강은 다롄시 국가보안대대 경찰 3명에 의해 210병원으로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았다.

의사의 검사를 거쳐 펑강의 담낭은 이미 두 주먹만큼 부어 음식물, 물을 먹을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렇지 않으면 담낭이 파열되어 사람이 위험하다고 했다. 의사는 즉시 수술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뜻밖에 국가보안경찰은 전혀 인간성이 없이 의사에게 “오늘은 수술을 하지 마시오. 내일 내가 그를 풀어준 다음 다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뜻인 즉, 수술을 받는 비싼 비용을 펑강에게 떠넘기려는 것이었다. 의사는 동의하지 않았다. 세 국가보안경찰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병원비를 지불할 힘이 없다는 이유로 하루를 끌어서, 그들이 돌아가서 병보석 수속을 밟음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 펑강은 아픔을 참으며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8월 13일, 가족은 펑강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되었다.

(5) 시신을 해부하면서 왜 가족에게 통지를 내리지 않았는가? 생체로 장기를 적출했는가? 사람을 죽여 입을 막은 것인가?

8월 14일, 가족이 국가보안대대에 가서 사람을 찾자 국가보안대대 경찰은 “누가 붙잡고 누가 사건을 처리했으면 당신은 그를 찾아가라. 우리를 찾지 마라.”고 말했다. 가족이 또 황허로(黃河路) 파출소로 다그쳐갔는데, 마침 사건처리 경찰 리훙차오(李洪橋)가 현장에 있었다. 가족이 펑강이 어디로 갔는지를 묻자 리훙차오는 때로는 “펑강은 죽었다. 펑강은 며칠을 살지 못하고 곧 죽게 된다.”고 말했다가, 또 때로는 “펑강은 죽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나가기만 하면 또 잘 먹고 잘 마시기에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9월 16일, 가족은 펑강의 거주 지역 파출소인 다롄 사허커우구(沙河口區) 푸궈가(富國街) 파출소로 가서 펑강이 실종된 사건을 신고 했다. 접대한 경찰은 펑강이 이미 8월 14일에 사망했고, 시신은 사허커우구 공안분국에 의해 해부되었다며, 가족에게 사허커우구 공안분국으로 다그쳐가서 화장을 하라고 했다. 이때, 펑강의 아내 왕쥐안은 마싼자 노동교양원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었다.

8월 17일, 가족이 거듭 황허로 파출소로 가서 리훙차오를 찾아 석방을 요구하자 그는 펑강의 감옥 외 집행서(監外執行單)를 꺼내 “이미 감옥 외 집행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감옥 외 집행서의 날짜는 8월 10일이라고 했는데, 바로 펑강이 병원에 보내진 그날이었고, 또 집행서에는 펑강이 서명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이것으로 가족을 속이고 책임을 회피했다.

펑강은 실종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을까? 210병원에서 의사가 즉시 수술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을 때, 국가보안경찰은 왜 거부했는가? 다롄 공안, 국가보안은 펑강의 사망 사실을 가족에게 왜 감추었는가? 의사가 수술함을 왜 허락하지 않고 사허커우구 공안분국은 오히려 시신을 해부하고도 가족에게 통지를 내리지 않았는가? 생체로 장기를 적출했는가? 사람을 죽여 입을 막은 것인가? 이것은 이미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펑강의 죽음은 중공 장쩌민 이익집단에서 파룬궁수련생에게 진 또 하나의 핏값이라는 것이다.

2. 10일 만에 와팡덴시 위생학교 교장 왕유쥐 박해로 사망하다

왕유쥐(王友菊, 여), 향년 64세, 전 랴오닝성 다롄 와팡뎬시 위생학교 교장.

2000년 7월 22일, 왕유쥐는 와팡뎬시 궁지(共濟)파출소에 의해 집에서 끌려갔고, 와팡뎬 구치소에 불법 감금당해 매일 강제로 이쑤시개를 감는 등 장시간을 초과한 체력 노동을 당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7월 31일, 경찰은 왕유쥐 및 다른 파룬궁수련생을 석방하려 했다. 감방을 나설 때, 왕유쥐는 이미 매우 허약해져 다른 사람에게 부축을 받아 나왔다. 석방증에 서명할 때, 그녀는 떨기 시작했고 심장이 고통스러웠다. 그 후 서있지도 못했다. 구급차가 도착한 후, 의사는 구치소 사무실에서 응급처치를 진행했다. 그날 저녁, 왕유쥐는 와팡뎬 구치소 사무실에서 사망했는데, 납치부터 박해로 사망하기까지 딱 10일째였다.

3. 성, 시의 우수 교사 장춘란 박해로 사망하다

장춘란(여), 향년 55세, 랴오닝성 다롄시 시강구(西崗區) 창장로(長江路) 초등학교 교사이다. 생전에 여러 차례 성, 시의 우수 교사로 평가받은 적이 있다.

2000년에 한 국민의 합법적인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장춘란은 베이징으로 청원갔다가 다롄시 시강구 공안분국으로 납치당했다. 그 기간에 벌금을 부과당하고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또 경제적으로 수만 위안이나 손실을 입었다.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후 다롄시 교양원으로 납치당해 2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그 기간에 심신에 심각한 상해를 입어 몸무게가 70여kg에서 35kg가량으로 줄었다.

장춘란은 2003년 8월 29일에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4. 다롄 경공업학원 교사 천자푸, 박해로 사망하다

천자푸(陳家福, 남), 향년 40세, 다롄 경공업학원 교사로, 2000년 4월 14일에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해 다롄시 교양원으로 납치당했다. 천자푸는 단호히 폭력적인 ‘세뇌’ 박해를 저지했다가 2001년 7월 1일(혹은 2일)에 다롄시 교양원에 의해 박해로 사망했다.

5. 65세인 유치원 노 원장 차이수펀, 억울하게 사망하다

차이수펀(蔡淑芬, 여), 향년 65세, 다롄 중형그룹 유치원(重型集團幼稚園). 차이수펀은 장시기 다롄시 공안국, 시강구 공안분국, 샹루자오(香爐礁) 파출소 및 샹루자오 가도의 불법 인원에게 중점적으로 박해를 당한 피해자이다. 그녀는 장시기 감시, 교란, 여러 차례 납치, 불법 감금을 당한 동시에 노동교양 및 고문 시달림을 당했다.

2005년 9월 1일 이른 아침 6시 50분에 차이수펀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중공에서 파룬궁을 박해하는 과정에 다롄에서 적어도 우수 교사 5명이 박해로 사망했다. 올해 교사절 전야에 아이들에게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 다롄 왕위쓰(王語絲) 교사, 왕런궈(王仁國) 교사는 다롄 경찰에게 납치당해 다롄 구치소에 감금당했다.

박해를 당한 다롄 교사는 또 류룽화(劉榮華), 양번량(楊本亮), 리춘샤오(李春曉), 주항(朱航), 먀오위환(苗玉環), 하오웨산(郝躍珊), 류둥메이(劉冬梅), 리쉬안(李軒), 장샤(張霞), 니추이샤(倪翠霞), 리완전(李萬貞), 리웨(李悅), 예칭리(葉清麗), 류수이(葉清麗), 류팡(劉芳), 하오푸쿠이(郝福奎), 왕린카이(王林凱), 리성제(李聖傑), 텅즈저우(藤志洲) 등이다.

신앙은 합법적이며, 박해는 유죄이다. 다롄의 동네 어르신과 마을 사람들 및 학생들이 중공 사당의 사악한 본질을 똑똑히 가려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어서 선량한 민중과 교사에 대한 이번의 잔혹한 박해를 함께 제지하기를 호소한다.

문장발표: 2013년 9월 2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9/26/2803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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