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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살해되고 가이슈친은 8년 억울한 옥살이로 노동력 상실

[밍후이왕]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시 칭위안(淸原)현 파룬궁 수련생 가이슈친(蓋秀芹)은 2005년 3월에 남편 루광린(盧廣林)과 동시에 납치되었다. 그 후 부부는 중공에 의해 불법 판결을 받았다. 루광린은 무고하게 13년 형을 선고 받았는데, 수감 중이던 2009년 2월에 판진(盤錦)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했다. 가이슈친은 8년의 무고한 판결을 당해 랴오닝 여자감옥에서 학대를 당했다. 출소 후 여전히 등과 어깨가 아프고 손가락을 곧게 펼 수 없어 노동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올해 62세인 가이슈친은 남편 루광린과 함께 대법을 수련해 심신에 적잖은 이로움을 얻었다. 1999년 7.20 이후, 두 부부는 중공에 의해 감시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괴롭힘과 갈취를 당했다. 2005년 3월 21일, 가이슈친, 루광린과 파룬궁수련생 뤼단(呂炎), 천구이펑(陳桂鳳)은 동시에 푸순 공안 1처 경찰에게 납치당해 푸순 구치소에 11개월 동안 불법으로 감금됐다. 두 부부는 각각 불법 중형 판결을 받았다.

루광린이 4년 전 판진 감옥의 학대로 사망하다

卢广林 

루광린(盧廣林)

루광린은13년 불법 판결을 당한 후, 2007년 12월에 잉커우(營口)감옥에서 판진 감옥으로 이송돼 계속 박해를 당했고 장시간 강제 노동을 했다. 2008년 4월 1일과 3일, 판진감옥 1감금 구역에서 대대장 장궈린(張國林)을 우두머리로 한 악독한 경찰은 노예 노동을 거부한 루광린 등 13명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박해를 감행해 뒷짐 결박을 채우고 몸을 발로 짓밟았다. 그리고 7~8개 전기봉으로 파룬궁수련생 몸에 동시에 충격을 가했다. 특히 머리, 목, 가슴, 등, 손바닥, 발바닥, 허벅지 안쪽 등 민감한 부위에 전기 충격을 가했다.

酷刑演示:电棍电击
전기봉으로 충격하기

2009년 2월 하순, 루광린은 단식으로 박해를 저지해 병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루광린은 소금물 주입을 당했다. 류빙(劉兵)을 우두머리로 한 간호 죄수는 음료수병에 뜨거운 물을 넣어 그의 전신 여러 곳에 화상을 입혔는데 세 곳은 화상 면적이 매우 컸다. 그들은 엄동설한에 루광린 몸 위에 냉수를 끼얹고 창문을 열어 그를 추위에 떨게 했으며 땅바닥에 눕혀 그를 질질 끌고 다녔다. 루광린은 구타로 치아가 부러지기도 했다. 박해 기간, 루광린은 세 차례나 생명 위험이 나타났는데 판진 제2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해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병감 대장 의사 가오(高)씨, 간사 장(張)씨는 죄수 3명을 지명해 세 곳에 화상을 입힌 책임을 전가했다. ‘루광린의 체온을 올려주기 위해 간호했지만 조심하지 않아 그에게 화상을 입혔다’고 말했는데, 이것으로 그들의 죄행을 감춘 것이다.

선양 여자감옥에서 고문으로 ‘전향’을 강요당하다

가이슈친은 억울한 옥살이 판결을 당한 후 선양 여자감옥 7대대로 납치돼 불법 감금을 당했다. 막 감옥에 도착한 파룬궁 수련생은 바로 고문으로 ‘전향’을 강요받았다. 한 명의 파룬궁수련생이 두 명의 죄수에게 밀착 감시를 당했는데 이름을 ‘3인 행동팀’이라고 불렀다. 즉 파룬궁수련생이 무엇을 하든지 막론하고 밀착 감시원 2명이 모두 반드시 신변에 붙어 다니면서 감시 했다. 밀착 감시원이나 교도관에게 파룬궁수련생의 일거일동을 보고해야 했는데 파룬궁 수련생 사이에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교도관은 형기를 단축해 줌으로써 밀착 감시원들이 파룬궁 수련생을 심하게 박해하도록 부추겼다.

가이슈친을 밀착 감시한 두 죄수 중 한 사람은 치웨(齊月-지금 매우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음)라고 부르고, 한 사람은 장궈룽(張國榮)이라고 불렀다. 어느 해 겨울, 감옥 측은 가이슈친에 대해 폭력으로 ‘전향’[즉 ‘진선인(眞善忍)’을 포기함을 가리킴]하도록 핍박해, 그녀를 감옥에서 전문적으로 고문 박해를 감행하는 작은 방안에 가뒀다. 그곳은 박해에 참여한 밀착 감시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는 곳이다. 추운 겨울날, 그들은 먼저 강제로 가오슈친을 맨 발로 쭈그려 앉도록 했다. 첫날, 가오슈친은 그들의 잔인한 고문을 견뎌냈다. 그러자 그들은 그녀를 쭈그려 앉히고 나무판자로 발을 때리는 등 사람들이 그녀를 집단 구타하게 했다. 그리고 창문을 연 후, 냉수를 한 대야씩 그녀 머리에 끼얹어 솜옷과 솜바지마저 푹 젖게 만들었다. 그녀는 추위로 온몸을 떨었다. 저녁에 죄수들은 바늘로 그녀의 두 손가락을 찔렀다……이처럼 꼬박 며칠 동안 박해를 가했다. 이런 잔인한 학대 하에서 가이슈친은 마음을 어기고 ‘전향서’를 썼는데 내심은 몹시 고통스러웠다.

선양 여자감옥의 강제노동으로 가오슈친은 노동력 상실

파룬궁수련생은 강제로 ‘전향’당한 후 모두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6시에 작업실로 가서 일을 해야 했으며 그런 후 다시 아침 밥을 먹었다. 선양 여자감옥은 대대마다 모두 가공공장이 하나씩 있었는데 수감자에게 강제노동을 시켜 폭리를 취했다. 7대대 노역 공장은 4층 건물이었고 매층마다 제조공정을 하나씩 맡았다. 7대대 노예상품은 수출용 제복이다. 매 번 의류 주문서가 오면 모두 일정 기한 내에 완수해야 했다. 정량을 완수하지 못한 사람은 저녁에 감방으로 갖고 돌아와 또 밤새 완수해야 했다. 정량을 완수하지 못하면 강제로 반성문을 쓰게 해서 완수하지 못한 원인을 분명히 써야 했다. 심지어 악독한 경찰의 고문학대를 당하기도 했다.

체력을 초과한 노역을 당했지만 하루 세끼는 늘 무국이나 배춧국이었다. 매끼마다 단지 몇 분 시간만 주었고, 오전과 오후에는 각각 한 차례씩 단체로 대소변을 보는 시간을 주었다. 가이슈친은 강제노동을 하는 기간에 두 손을 마치 기계처럼 멈춘 적이 없었다. 이렇게 해야만 겨우 정량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가오슈친은 손가락이 굳어져 노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문장발표: 2013년 8월 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8/5/2776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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