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산둥보도) 산둥성(山東省) 쯔보시(淄博市) 파룬궁수련생 왕전슈(王振秀)는 집에서 납치돼, 쯔보 구치소에 약 일년 동안 무고하게 구류 당한 뒤 2013년 3월 하순에 쯔보시 장뎬구(張店區)법원에 의해 억지 판결을 받았다. 가족이 여러 차례 판결 결과를 문의했으나 거듭 거부당했고 4월 1일에 이르러서야 그녀가 7년형 판결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가족이 법원에 가서 법에 의거해 판결서를 요구했을 때도 법관은 이를 거부했다. 60세에 가까운 왕전슈는 이미 중급인민법원에 상소했다. 변호사도 이 사건에 개입해 계속 왕전슈에 대해 무죄변호를 했고, 가족도 중급인민법원에 법에 따라 위증을 꾸미는데 참여한 관련자들을 처벌토록 요구했다.
왕전슈 여사 일가족은 여러 차례 중공(중국공산당)에 의해 감금 박해를 당했고, 남편 왕징쿠이(王景奎)는 예전에 두 차례나 강제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는데, 2010년에 박해로 사망했다. 남동생 왕신보(王新博)는 2003년에 쯔보 시의 사악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에게 13년의 불법적 판결을 받았고, 산둥 감옥에서 박해로 사경을 헤맬 때인 2006년 음력설 전야에 집으로 보내졌다. 결국 2월 10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왕전슈 여사는 여러 차례 중공에 의해 감금 박해를 당했고,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유랑생활을 한 적이 있다.
2012년 7월 3일, 왕전슈의 집 건물 아래에서 미행을 하는 한 부녀자는 장뎬구 국가보안대대에 파룬궁수련생이 왕전슈의 집으로 갔다고 신고했다. 쉐핑(薛平, 대장)을 우두머리로 한 여러 명의 경찰은 경찰복도 입지 않고 어떤 신분증도 꺼내 보이지 않은 상태로 강제로 왕전슈의 집에 들이닥쳐, 그를 납치하고 불법적으로 가택을 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백지 수색영장을 꺼내어 속이고는 증명서로 했다.
왕전슈의 거처에는 두 개의 방과 객실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단독으로 한 칸에서 살았고, 그의 아들은 옆방에서 병 요양을 하고 있었다. 왕전슈는 경찰에게 놀라게 하지 말라고 알려주었으나, 경찰은 문도 두드리지 않고 또 경고도 하지 않은 채 느닷없이 그녀 아들의 방문을 두 쪽이 되도록 걷어찼다. 이로 인해 그녀의 아들이 놀라 병세가 가중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녀 아들을 공안국으로 데려 가서 물품을 압수하는 것에 대하여 서명토록 하고 보충해서 써넣은 수색영장에 대해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공안국 내에서 경찰은 압수한 물품을 점검할 때 대충 훑어보았다. 시디 등 물품은 단지 수량만 점검했을 뿐, 컴퓨터를 점검할 때는 무슨 내용이 있는지 점검하지 않았다. 내용이 없는 새 CD마저도 안에 넣었다. 이어서 그녀의 아들의 병세가 비교적 심각하고 정신이 안정되지 않은 틈을 타 그에게 서명시켰다.
일이 발생한 후, 업무담당자는 여전히 수량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사건을 처리해 크게 공적을 세우기 위해서 사사로이 몰래 압수한 물품의 수량을 고쳤다. 그리고 선전서 난의 수량 앞에 사사로이 ‘삼천(三仟)’이란 두 글자(아래의 사진을 참조하시기 바람)를 더했다. 조금 분석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삼천’이란 두 글자는 후에 써넣은 것임을 식별해 낼 수 있다.
2012년 9월 12일에 불법 개정을 할 때, 변호사는 법정에서 예리하고도 엄숙하게 그녀를 위해 무죄변호를 하였고 그녀를 석방하도록 요구했다. 변호사는 공소 측에서 제출한 ‘증거’와 ‘죄명’을 법률상식으로 그것을 하나하나 따져 사실을 명백히 밝혔고, 꾸민 죄명을 뒤엎어 무죄석방을 요구했다. 왕전슈도 자신이 ‘진선인(眞善忍)’의 믿음을 추구함은 무죄임을 표시했다. 맨 마지막에 재판장은 휴정을 선포하고 일정을 잡아 판결한다고 했다.
왕전슈의 아들은 그 후에 여러 차례 검찰원과 주심 법관 궈젠(郭建)에게 물품을 압수당한 수량 문제에 대하여 항의했다. 검찰관과 법관은 항상 법에 의해 일을 처리하고 새롭게 감정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맨 마지막에 오히려 7년의 억지 판결을 내렸고, 판결 근거는 오히려 전혀 법률적 효력이 없는, 압수한 이 물품 명세서였다. 그의 아들이 법관에게 무엇 때문에 당시 새롭게 감정할 것임을 승인했는지 질문했을 때(그러나 실질적으로 오히려 새롭게 감정하거나 조사를 보충하지 않았음) 법관은 “우리는 새롭게 감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고 말했다. 그 아들은 또 무엇 때문에 판결서 위에 오히려 심리(이를테면 새롭게 감정하거나 조사를 보충함)를 연기한다는 것을 두 차례나 썼는지를 물었다. 법관은 스스로 모순되어 대답할 방법이 없게 되자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내며 “당신에게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의도가 매우 분명하다. 이것은 단지 2012년 7월부터 2013년 3월까지 왕전슈가 6개월 넘는 동안 기한을 초과해 감금당한 사실을 가리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왕전슈가 납치당한 후, 그녀의 아들은 변호사를 선임해 그녀를 위해 무죄변호를 하도록 했는데, 또 610의 교란을 당했다. 제1심 개정을 할 때, 변호사의 무죄관점에 대해 공소 측은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법관과 서기원은 더욱 공소 측 편을 들며, 왕전슈에 대한 유력한 증언에 대해서는 법관의 입회하에 서기원은 단지 간단하게 스쳐 지나가거나 혹은 근본적으로 기록을 하지 않았다. 판결서에서조차 변호사의 무죄변호에 관한 관점을 기록하지 않았을지라도, 심각하게 사실을 날조했다. 만든 후에 어느 날인가 왕전슈의 아들에게 현장에서 가상의 것을 입증시켰다.
2013년 3월 26일에 판결이 내려진 후, 가족은 여러 차례 결과를 문의했다. 법원은 여전히 가족을 속이면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가 되어서야 알려주었다. 가족은 법에 의거해 판결서를 요구하려 했다가 또 거부당했다. 이 행동은 분명히 도둑이 제발 저리는 표현이다.
왕전슈의 남편 왕징쿠이(王景奎)도 파룬궁을 수련하고 진리를 견지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노동교양처분과 불법 구금을 당했다. 맨 마지막 한 차례 노동교양을 당한 것은 단지 친구 집에 놀러 간 것 때문에 붙잡혔던 것이다. 어떠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에 대해 노동교양처분을 내렸다. 그 기간에 구타 등 고문을 당했는데, 시력이 저하되고 두 귀의 청각을 거의 잃었으며 머리 위에는 선명한 흉터가 있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아래의 사진은 윗면 사진의 완정판임)
문장발표: 2013년 7월 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7/5/2762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