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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파룬궁수련생 13명 불법 법정심리, 변호사 10여 명 법정에 나서다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다롄시(大連市)의 파룬궁수련생 13명이 납치, 불법 감금당한지 1년 가까이 된 6월 21일 오전 8시 30분에 다롄 시강구(西崗區)법원은 불법으로 재판을 열었다.

그 중 파룬궁수련생 위웨(佘鉞)는 210병원에서 직접 법정으로 들려갔고, 왕타오(汪濤)는 너무 허약해져 법정개정 중에 법정에서 들려나갔다. 처중산(車中山)은 몸에 심각한 상해를 입은 상태여서 법정에서 끊임없이 구토하고 트림을 했으며, 린리훙(林麗紅)은 특히 허약하고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다른 사람의 부축이 필요했다. 저녁 8시 30분에 휴정을 하여 날을 잡아 따로 개정한다고 했다.

이 전인 6월 19일에 변호사 10명이 다롄에 도착했고, 6월 20일에 변호사 2명이 도착했는데, 모두 12명이었다. 어떤 변호사는 방청하러 왔었다. 법원에서 4월 12일에 임시 개정을 취소하고, 또 함부로 체포한 사건(변호사가 구타당함을 포함)때문에 이 사건은 각계각층의 관심을 받았는데, 세계 매체를 포함해서이다. 소식에 따르면, 베이징 사법국, 랴오닝 고급인민검찰원, 고급인민법원 등이 다롄에 와서 이번 법정심리에 참가했다.

4.12사건 때문에 변호사가 대량의 고소를 하여 다롄 경찰에게 이번 법정개정에서 공개적으로 사람을 붙잡고 구타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다롄시 공안국은 배후에서 음모를 꾸몄는데, 줄곧 회의를 열어 배치하고 미행해 감시했다. 그리고 다롄 국가보안은 변호사가 묵는 호텔에 대량의 사복경찰을 배치했고, 현지 파출소에서는 한 경찰을 배치해 호텔 홀에서 유숙시켰다. 변호사 옆방에는 국가보안 인원이 있었고, 호텔 문밖의 차안에는 모두 사복경찰이 있었으며, 출입하는 인원마저 감시를 당했다. 비행장 및 인근 음식점에도 국가보안인원이 있었다. 6월 20일 저녁, 변호사에 대해 교란성 순시를 했는데, 변호사들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6월 21일, 시강구(西崗區)법원은 모든 개정을 전부 취소하고, 파룬궁수련생에 대해서만 개정했다. 법원에서 600미터 내에 있던 경찰은 행인들에게 어디에 가는지를 캐물었고, 주변 몇 리에는 전부 사복경찰과 크고 작은 각종 경찰차가 있었다. 차안에는 연한 남색 여름옷을 입은 남성이 꽉 차 있었다. 점심에는 통일적으로 도시락을 나눠줬으며, 또 이것은 사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저녁 8시 30분에 이르러 휴정을 선포하고 중공의 각급 관원이 법정을 떠났으며, 사복경찰은 그제야 철수했다. 각 파출소, 가도는 모두 각종 감시임무를 배치 받았다.

다롄 파룬궁수련생 왕서우천(王守臣)의 아내는 두 번째 변호인이었다. 6월 20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 집 인근에 경찰차가 감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부득이 호텔로 되돌아가서 묵는 수밖에 없었다. 4.12사건 당시에 경찰에게 집안에 포위당한 사건이 거듭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 법정에 나서서 변호할 수 없었다.

6월 21일 개정하기 전, 파룬궁수련생 둥쉬안(董選)과 류신잉(劉新穎)이 납치당했다. 그녀 둘은 가족을 도와 변호사를 맞이하고 보냈었다. 변호사가 많고 시간이 긴급했던 이유로 가족은 미처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도움이 뜻밖에 붙잡힐 구실이 되었다. 그날 아침 6시 40분, 중산구 파룬궁수련생 류신잉은 자기 집 아래에서 슈웨가(秀月街) 파출소에 납치당했다가, 그날 밤 10시 반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7시쯤에는 다롄 마란쯔(馬欄子) 류수(柳樹)의 파룬궁수련생 둥쉬안(여, 40세쯤)이 납치당했는데, 현재 행방불명 상태이다. 소식에 따르면 둥쉬안은 이미 한 동안 감시를 당했다.

이번에 박해당한 파룬궁수련생 13명은 각각 처중산(車忠山, 남), 주청첸(朱成乾, 남), 왕서우천(王守臣, 남), 왕타오(汪濤, 남), 위웨(佘鉞, 남), 스잔순(史佔順, 남), 베이전보(裴振波, 남), 판슈칭(潘秀清, 여), 린리훙(林麗紅, 여), 바이루위(여), 리성제(여), 궈쑹(郭松, 남), 위보(於波, 남)이다.

2012년 7월 6일, 다롄시 ‘610’(중공이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 조직임),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공안국, 국보(國保), 국가보안(國安)은 각 공안분국, 파출소, 가도사회구역과 결탁해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한 차례의 대규모 납치를 감행했다. 주로 위성텔레비전 안테나(중공은 민중이 NTD텔레비전을 관람할까 두려워함) 설치에 참여한 이를 겨냥했는데, 100에 가까운 파룬궁수련생이 불법 체포, 가택수색, 불법 감금을 당해 잔혹한 학대를 당했다. 그 중 개발구의 69세 노부인 장구이롄(張桂蓮)은 다롄구치소에서 심각한 박해를 당해 8월 5일에 박해로 사망했다. 파룬궁수련생 취빈(曲斌), 장궈리(張國立)는 박해로 생명이 위독해지고, 허우춘리(侯春麗)는 구치소의 악인에게 구타당해 다리가 부러졌고 신장이 손상되었다. 파룬궁수련생 처중산은 다롄구치소에서 엄혹한 관리, 고문학대를 당했다. 수갑과 족쇄에 채워진 동시에 지환(地環)에 2개월 동안 채워졌다. 어떤 때에는 밤새 호랑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결국, 이처럼 선량하고 부지런하며 건강한 사나이 처중산은 세 차례나 병원에 보내져 응급처지를 받아야 했다.

다롄 중산구법원에서는 원래 4월 12일 오전 9시 30분에 다롄시 중급인민법원 제6청을 빌려 파룬궁수련생 13명에 대해 불법 법정심리를 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4월 11일 저녁에 갑자기 변호사에게 개정을 취소한다고 통지했다. 4월 12일 아침, 대량의 경찰은 중급인민법원 문밖에서 광적으로 법정심리에 참가한 가족 및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했다. 변호사 2명도 한때 납치당했다. 그 중 청하이(程海) 변호사는 경찰에게 납치돼 구타당했다. 이것은 ‘다롄4.12사건’으로 알려져 이미 해외매체에 보도되었다.

60여 세인 청하이 변호사는 일이 발생한 후, 미국 희망지성(美國之音)의 취재를 승낙했다. 그는 당시 납치당해 큰 버스에 오른 정경을 묘사했다. 그는 “한 중년 경찰이 젊은이 세 명을 지휘해 나의 핸드폰을 빼앗았으나 나는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나의 목을 꼬집고 손을 붙잡더니 끝내는 핸드폰을 강탈해갔다. 내가 반항하자 곧 나를 구타했다. 경찰 번호가 202297인 경찰은 필사적으로 나의 왼쪽 팔을 비틀었고, 다른 한 180cm되는 젊은이는 나의 오른쪽 얼굴을 두 대 쳤다. 이렇게 20분 동안을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청하이 변호사는 그 후에 병원으로 가서 상처를 조사했는데, 어깨 근육이 손상되었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는 지금 오른 팔을 들기가 어렵고, 얼굴과 입술에도 상처가 있다.

법원 밖에 서있던 량샤오쥔(梁小軍) 변호사는 자신의 목격한 상황에 대해 자신의 블로그에 “나는 경찰과 사복경찰들이 때때로 갑자기 벌떼처럼 밀려와 부녀자나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을 큰 버스에 강제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격했다. 큰 버스에서 경찰이 서로 협력하고 있었다.”라고 썼다.

량샤오쥔 변호사는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왕취안장(王全璋) 변호사가 구류당한 것부터 시작해 오늘 청하이 변호사가 구타를 당한 것까지 연이어 발생한 변호사의 개업 권리와 인권 권리를 침범한 이 일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가오즈성(高智晟) 변호사는 또 신장 사야(沙雅)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있고, 텅뱌오(滕彪) 변호사는 스자좡(石家莊)에서 법정경찰에게 끌려 법원에서 내던져졌으며 캉지톈(唐吉田) 변호사와 류웨이(劉巍) 변호사가 변호사 면허를 정지당했고 장카이(張凱) 변호사와 리춘푸(李春富) 변호사는 충칭(重慶) 장진(江津)에서 쇠우리에 채워졌고 리징린(李靜林) 변호사는 만저우리(滿洲裏)에서 개정하는 전날 밤에 호텔에서 강탈당했다. 나는 산둥(山東) 자오위안(招遠)에서 개정을 하는 구치소 밖으로 깡패에게 내동댕이쳐졌다.”

“이들 변호사가 공권력의 불법적 대우를 받은 것은, 그들이 대리변호한 동일한 죄명의 사건 – ‘사교를 조직하고 이용해 법률실시를 파괴한 죄’(주 : 파룬궁은 사람을 선하게 가르치고, 중공은 진정한 사교임)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죄명에 뒤덮인 사람은 한 무리의 선량한 사람인데, 오히려 선전공구에 의해 요마화(妖魔化) 되어 지속적으로 14년 동안의 박해를 당한 군중이다. 각지의 공검법(공안, 검찰, 법률)은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의 인솔 하에 형사소송법의 실시를 짓밟고, 종래로 추궁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공을 세워 상을 받고 승진하고 부자가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이 변호사들을 탄압함에 있어서 힘을 실어 주었다. 그들은 상의(上意)를 추측해 자신이 이미 변호사를 탄압하는 자연적인 정의를 얻었다고 여겼다.”

“이 변호사들의 경험은 이 무리(파룬궁수련생들)가 조난을 당한 표현에 불과할 뿐이다. 이 변호사들이 당한 탄압은 이 무리가 당한 탄압에 비해 너무 너무 많이 가볍다.”

“14년 동안, 그들은 가족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집과 가족을 잃은 고통을 참아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14년 동안, 그들은 수시로 붙잡히고 고문당하고 노동교양을 당하고 판결을 당하는 공포 속에서 생활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14년 동안, 그들은 속임을 당한 군중의 불이해와 냉담한 태도에 직면하면서도 증오하지 않았고, 14년 동안 그들은 가택수색, 강탈, 무시를 당했지만 폭력적인 항쟁을 선택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들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주변, 이 권력이 집중된 독단적인 국가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운명을 함께하고 있다!”

“14년 이래, 줄곧 변호사는 이 무리를 도와주는 사람으로서 그들을 위해 무죄변호를 했으며, 법률과 사실상 반복적으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그들의 믿음과 항쟁은 어떠한 사람에게 상해도 입히지 않았고 사회에 위해가 없는 것으로 고발당할 죄명이 없다.’”

량샤오쥔 변호사가 말한, 중공에게 14년 동안 박해를 당해도 여전히 비폭력적 항쟁을 견지해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이들이 바로 파룬궁수련생이다.

문장발표: 2013년 6월 25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6/25/2758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