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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 사허시 장차이샤, 8년의 억울한 옥살이 후에 또 납치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허베이보도) 2013년 5월 20일 오전, 막 출소한 지 6개월인 허베이성(河北省) 사허시(沙河市) 파룬궁수련생 장차이샤(張彩霞)가 싱타이(邢台)에서 거듭 납치당했다. 장차이샤는 예전에 파룬궁진상을 텔레비전 스팟 방송을 하여 중공(중국공산당) 사당 공검법(공안, 검찰, 법원)에 의해 8년의 불법 판결을 받은 적이 있는데, 2012년 10월에야 감옥에서 나왔다.

2004년 새해 전후에 허베이 싱타이, 사허 두 곳의 서부 파룬궁수련생은 무선 텔레비전을 이용해 진상을 성공적으로 방송했는데, ‘위화(偽火)’, ‘전 세계에서 장쩌민 공개 재판’, ‘대법이 세계에 홍전되다’ 등 75분짜리 진상 시디를 방송해 사람들에게 대법진상을 보게 했다.

신뢰 있는 소식에 따르면, 이 진상방송에 악도들이 매우 질겁했다. 산둥성 공안청은 전문적으로 전문사건팀을 파견해 싱타이에 도사리면서 이 일을 추적 조사하려고 시도했다. 장차이샤는 2004년 정월에 납치당했고, 그 후에 8년의 불법 판결을 받았다. 장차이샤는 몇 달 동안의 단식을 진행해 박해를 저지했다. 몸이 극도로 허약해졌을 때, 악독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 당했다. 2004년 12월 12일 전후, 장차이샤는 정념으로 감금에서 벗어났다.

아는 바에 의하면, 이 일은 사당 중앙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사악의 우두머리 뤄간(羅幹)은 현지 공안국을 제한해 2개월 동안 사람을 찾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안국 정위를 면직하고 국장은 처분을 받는다고 전한 말도 있다. 사허시 공안국은 경내에서 물샐틈없는 수색과 체포를 감행해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광적인 교란을 진행했으며,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감행했다. 2005년 정월 15일 후, 허베이성 사허시 ‘610’(중공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일삼기 위해 설립. 법률 위에 군림한 불법 기구임) 두목 위수핑(俞書平)은 직접 악독한 경찰을 거느리고 이 시의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대규모적인 수사를 감행했는데, 숨진 파룬궁수련생의 집도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다.

2005년 새해 이후, 장차이샤는 한단시(邯鄲市)에서 납치당했다. 경찰은 장차이샤가 예전에 정념으로 벗어났음을 구실로 3년 형을 내리려고 망상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장차이샤는 탕산(唐山)감옥과 허베이성 여자감옥에 차례로 불법 감금돼 온갖 고문학대를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시종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을 견지해 종래로 ‘전향’하지 않았다.

밍후이왕 보도에 따르면, 2008년 9월 26일에 장차이샤는 인원 보고와 노역을 거부했다. 허베이성 여자감옥 5감구역 부감구역장 왕옌칭(王彥卿)은 그녀를 감구역 대문에 하룻밤을 채워두었고, 또 전기봉으로 전기충격까지 가했다. 이튿날에 또 장차이샤를 작업실 계단에 채워두었다. 꼬박 이틀 동안 채운 뒤, 맨 마지막에 그녀를 영창실에 가둬 보름 동안 박해를 가했다. 장차이샤는 영창실에서 나온 뒤에도 여전히 인원 보고를 거부했고, 악독한 교도관이 그녀를 또 보름 동안 영창실에 가뒀다. 영창실 안은 또 음침하고 축축했으나 악독한 교도관들은 그녀에게 바지 하나와 상의 두 벌만 입게 했다. 교도관은 누구도 장차이샤와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2009년 정월 7일, 장차이샤 등 파룬궁수련생들이 죄수 배지 착용을 거부하자 교도관이 쇠문에 채웠다. 교도관 왕옌칭은 사람을 시켜 이 여성 파룬궁수련생 세 명의 솜옷을 벗기고 홑옷 두 벌만 입게 했으며, 또 창문을 열게 했다. 장차이샤의 왼쪽 손은 채워져 오랜 시간 동안 또 마비되었다. 장차이샤는 8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겪은 뒤, 2012년 가을·겨울 때 출소해 집으로 돌아갔다.

뜻밖에 출소하고 6개월 만에 또 중공에 납치당했다.

직접 박해에 참여한 관련 책임단위와 개인의 정보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람.

문장발표: 2013년 5월 2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5/23/2743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