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네이멍구 보도) 네이멍구(內蒙古) 투취안현(突泉縣) 파룬궁수련생 류잔위(劉佔余)는 2013년 1월 18일 새벽 3시경, 랴오닝성(遼寧省) 잉커우시(營口市) 바위취안구(鱍魚圈區)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향년 57세다.
류잔위와 그의 아내 장원링(張文嶺), 세 아들은 모두 파룬궁을 수련했다. 그들은 수련하여 심신이 좋아졌음에도, 오히려 수년간 중공(중국공산당)에 의해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일가족 다섯 식구는 모두 악독한 경찰에게 수차례 납치당해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거나 불법 판결을 받아 고문 학대당했다. 그리하여 류잔위는 왼쪽 팔이 불구가 되었고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 큰아들 류푸리(劉福利)는 오른쪽 쇄골이 불구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 류푸밍(劉福明)은 다리에 감각을 잃었다. 몇 년 동안 이처럼 잔혹한 박해로, 그의 가족의 생활은 곤경에 빠지고 주거조차 일정하지 않은 채 노동으로 셋집을 얻어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어떤 때는 박해를 당해 돌아와도 밥 먹을 그릇과 젓가락마저 없었다.
류잔위는 1956년 네이멍구 투취안현 시류향(西柳鄉)에서 태어났다. 1997년 당시 46세인 아내 장원링은 견관절주위염(肩關節周圍炎), 경추병, 담낭염, 신장염, 관심병, 심장병, 고혈압, 혈액 지질 변형, 뇌 신경통 등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의 삶이 죽는 것만 못할 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한 뒤 10여 년의 병고가 단기간에 완쾌되었다. 가족 모두 대법의 아름다움과 신기함을 목격하고는 모두 수련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사당이 대법을 박해하기 시작한 뒤, 중공 사당 관리는 집으로 찾아와서 그들을 늘 교란했다.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그들 가족은 랴오닝성 잉커우시 바위취안구로 가서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류잔위의 일가족은 수차례 납치당하고 감금당했다.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당한 류잔위
2001년 정월, 악독한 경찰은 바위추안의 류잔위 집을 포위했다. 당시 그의 큰아들 류푸리는 친척이 숨겨주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악독한 경찰은 당시 6천 위안(약 107만 원)의 저축통장, 9백여 위안의 모토로라 (Motorola) 새 휴대폰, 6백여 위안(약 10만 7천 원)의 휴대폰 카드, 인력 삼륜차 한 대와 수련하지 않는 친척의 돈 7백여 위안(약 12만 5천 원)을 강탈해 갔다. 친척 가족이 바위취안 훙하이(紅海) 파출소로 납치당한 뒤, 악독한 경찰에게 욕설과 구타를 당했으며, 또 고향으로 돌아가라며 고통을 주었다. 류잔위 가족은 그때부터 유랑생활을 했다.
2001년 10월 16일, 류잔위는 랴오닝 가이저우시(蓋州市)에서 진상을 알렸다는 이유로 가이저우시의 한 파출소로 납치당했다. 그곳에서 그는 불법 심문을 당한 동시에 가이저우시 구치소로 납치당해 보름 동안 감금되어 있었다. 그 기간, 악독한 경찰은 죄수를 동원하여 고문박해-공갈·협박, 위협, 잠재우지 않기, 장시간 좌판(坐板)에 앉히기, 카이페이지(開飛機) 등 고문을 했다. 119일이 지난 후, 류잔위는 네이멍구 싱안멍(興安盟) 투취안현 구치소로 납치당했다. 그곳에서도 경찰은 죄수를 동원하여 그를 혹독하게 구타했고, 매일 잠재우지 않기 고문을 가해 비인간적인 박해를 감행했다. 2001년 12일, 류잔위는 네이멍구 투취안현 공안국에 의해 1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고, 2002년 1월에 네이멍구 투무지(圖牧吉) 노동교양소로 이감된 뒤 계속 박해당했다. 그는 또 투무지 노동교양소에서도 매일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무죄석방을 요구하다 소금물을 강제주입 당했다.
2002년 5월부터 6월까지, 투무지 노동교양소 교도관은 류잔위의 대법수련을 포기하도록, 악독한 경찰에게 줄지어 서기, 사람 수 보고하기, 감옥 규정 외우기, 뙤약볕에 쪼이기를 했고, 또 전기봉으로 번갈아 가며 그의 머리와 몸을 구타하는 고문을 가했다. 그는 팔을 등에서 한쪽은 위로하고 한쪽은 아래로 묶인 채 다시 나무 몽둥이를 끼워 함께 조이는 등등의 박해를 당했다. 이 때문에 그의 오른쪽 쇄골이 부러지고, 어깨뼈가 부러져 탈구되었으며 팔을 다쳐 이후에도 곧게 펴지 못했다. 그 뒤에도 류잔위는 ‘진ㆍ선ㆍ인(眞ㆍ善ㆍ忍)’에 대한 믿음을 견지했다가, 형사와 죄수에게 혹독하게 세워진 나무판자에 팔을 찍히고 온몸을 찍히고 머리부위를 사납게 공격당했다. 신체 부위 곳곳에 10~15센티미터의 상처가 20여 군데 생겼고, 한쪽 팔은 다리크기로 부어올랐다. 당시 박해에 가담했던 한 죄수는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한 업보로 목구멍이 부어올라 호흡하기 어렵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자백하기도 했다. 류잔위는 기한을 1개월 넘기도록 박해당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2년간 불법 노동교양처분 당하다
2004년 11월 11일, 네이멍구 싱안멍 투취안현 공안국은 랴오닝성 잉커우시 공안국과 바위취안 국가보안대대에 근무하는 악독한 경찰과 결탁해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류잔위의 둘째 아들 류푸밍을 싱안멍 우란하오터(烏蘭浩特)로 압송한 뒤 세뇌반에 가두었다. 그 후 악독한 경찰은 그의 셋째 아들에게 압수당한 인력거를 가져가라고 한 뒤 납치했다. 게다가 불법 가택수색을 감행해 대법 책, 연공 테이프, 설법 녹음테이프 등을 강탈해갔다. 맏아들 류푸리(劉福利)는 납치당했다가 오후에 풀려났다. 악독한 경찰은 류잔위를 국가보안대대로 납치한 뒤에 바위추안 구치소에 감금했다. 보름 후에 2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아 랴오닝 번시(本溪) 웨이닝잉(威寧營) 노동교양소에 감금당했다. 류잔위는 강제로 노역노동(이극관(二極管)을 비비기)을 했다. 노동교양소에서는 또 사당 문화인 텔레비전을 보도록 핍박했고, 바오자(包夾)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으며, 사상회보 등으로 핍박하는 사악한 수단으로 류잔위 등 파룬궁수련생을 상대로 세뇌박해를 감행했다. 그는 2년 뒤에야 출소해 집으로 돌아왔다.
매우 총명했던 류잔위는 수차례 비인간적인 박해로 오른팔이 불구가 되었고, 오른 어깨가 아래로 쳐졌으며 쇄골 부위에 큰 혹이 생겼다. 악독한 경찰은 전기봉과 판자로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쳐 머리에 상처를 입은 그는 기억력을 잃었고 반응이 무뎌져 무릇 가족의 일깨움에 따라야 했다. 장기간 불법 감금과 고문 학대를 당한 류잔위는 집으로 돌아온 후 늘 머리가 아팠고, 늘 속효 구심환을 먹었다. 조금만 놀라도 온몸은 심각한 증상을 일으켰는데 경련과 탈모 증상이 나타났다. 그는 장기간 정신적인 학대와 병고의 시달림을 겪다가 2013년 1월 18일 새벽에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박해를 당하다
2002년 1월 9일, 류잔위의 아내 장원링은 랴오닝 다스차오(大石橋)에서 파룬궁박해 진상자료를 배포했다가, 뤼왕(呂王) 파출소 몇 명 악독한 경찰에게 다스차오 구치소로 납치당했다. 그녀는 강제로 공예품을 만드는 등 노역노동을 했는데, 매일 10여 시간 노동해야 했다. 5개월 후에 2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해 마싼자 교양원에 수감되었다.
당시 마싼자 1, 2, 3대대에 감금된 사람은 모두 여성 파룬궁수련생인데, 모두 천5백 여 명 수련생이 감금당했다. 한 쑹야원(宋亞文, 1대대, 3년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음), 리펑(李嵐), 장펑윈(張鳳雲) 등이다. 악독한 경찰은 수련생에 대해 강제세뇌, ‘전향’, 강압 공갈·협박, 작은 걸상에 앉히기, 대법을 모독한 텔레비전 등을 보게 했으며, 또 유다(猶大), 바오자를 이용해 감시하며 세뇌를 시켰으며,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수련생에게 고문 학대를 감행했다. 그곳에는 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에 대해 고문을 하는 소굴이 있는데 중허루(鐘鶴樓)라고 불렀다. 그곳에서는 매일같이 파룬궁수련생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높이 외치는 목소리가 전해왔고, 또 파룬궁수련생이 고문 학대 당하는 형용할 방법이 없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곳에서 나온 수련생은 불구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장원링은 만기 된 후에 석방됐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박해당하다
2001년 9월 13일, 류잔위의 맏아들 류푸리(23세)와 둘째 아들 류푸밍(21세)은 고향 네이멍구 투취안현으로 돌아가서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다가 진상에 똑똑하지 못한 사람에게 모함당해, 16일 저녁 8시경 투취안현 현장이 공안국을 지휘해 대량을 경찰을 출동시켜 두 형제를 납치했다.
이들 형제는 투취안현 리민(利民) 파출소로 납치된 뒤 경찰은 그들을 따로따로 감금했다. 투취안현 공안국 국장 장더즈(張德智)는 악독한 경찰 장칭(張青), 페이푸청(裴福成), 천궈샹(陳國祥), 왕징화(王景華), 위하이린(於海林), 양춘리(楊立春) 등 10여 명 악독한 경찰로 하여금 그들을 고문하여 자백을 강요하도록 했다. 몇 명의 악독한 경찰은 윤번으로 류푸리에 폭행을 가했다. 뒷짐결박으로 채워서 두 팔 사이에 술병, 옥수수 몽둥이를 밀어 넣고, 무차별 폭력을 가했으며, 고무 몽둥이와 전기봉으로 류푸리를 구타해 코와 입에서 피가 흘렀다. 악독한 경찰은 또 강제로 그를 눌러 꿇어 앉혔다. 그가 꿇지 않자, 악독한 경찰은 발로 그의 가슴을 걷어찼고, 또 머리칼을 잡아당겨 일어나게 했으며, 무수히 뺨을 때렸다. 그리고 머리와 목을 내리치며 폭행했고, 신바닥으로 얼굴을 때리고 술병으로 늑골을 문질렀으며 전기충격 등을 가했다. 악독한 경찰은 오줌을 광천수 병에 주입해 그의 입안에 주입했으며, 또 밖에서 무슨 물을 가져왔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마시게 했다. 물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몇 명의 악독한 경찰은 그를 누르고 입안에 주입해 하마터면 질식해 죽을 뻔했다. 저녁 8시경 납치한 뒤부터 줄곧 새벽 3시 넘을 때까지 구타해서야, 악독한 경찰들은 손을 멈추었다.
이튿날 아침, 악독한 경찰은 또 각종 수단으로 2~3시간 동안 구타했다. 점심에 류푸리를 투취안현 구치소로 납치했다. 악독한 경찰은 죄수를 동원해 강제로 류푸리에게 감옥 규정을 외우고, 냉수로 목욕하고, 맨발로 저녁 9시까지 시멘트바닥 위에 세워두게 했으며, 또 나무판자에서 잠자게 했는데 이불이 없었다. 그리고 죄수가 발을 씻은 물을 마시도록 핍박했고 강제로 좌반(坐板)에 앉혔다. 악독한 경찰은 그에게 뒷짐결박(당시 류푸밍은 이미 서 있을 수 없게 되었음)으로 채워 왼쪽 손은 위로 오른쪽 손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중간에 술병 6개를 밀어 넣고 50분 동안 채운 후, 방향을 바꾸어 50분 동안 채워두었다. 무차별 폭력, 전기봉으로 전기충격을 가하기, 가죽 띠로 후려치기, 맥주병으로 구타하기, 옷을 깡그리 벗기고 빗자루로 그의 생식기를 구타하는 등등 고문은 극히 잔인했다. 게다가 휘발유로 그들 두 사람을 태워 죽이겠다며, 외부에 대해 스스로 분신자살했다고 말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류푸리는 11개월 후에 3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아, 우라하다(烏拉哈達) 감옥에 감금당했다. 10일 후에 네이멍구 바오안자오(保安沼)감옥으로 이송되어 불법 감금박해를 당했다. 2004년 10월, 류푸리는 불구로 된 몸을 끌고 석방되었다.
투취안현 악독한 경찰은 또 류푸밍에게 고문 학대했다. 허리띠로 그의 얼굴부위와 몸을 한 시간 넘게 후려쳤고, 단추로 그의 두 팔을 한쪽은 위로 한쪽은 아래로 해서 등에 짊어지게 하여 반대로 채우고는 두 팔 사이에 맥주병을 밀어 넣었다. 수갑은 살 속까지 패여 들어가 뼈가 드러났다. 담배꽁초로 그의 팔을 데우고, 허리띠로 걸상을 묶어서 그의 목 위에 매달아 놓아 허리는 90도로 되었으며, 뜨거운 물을 머리에서 몸 아래로 부어 그를 데웠다. 그리고 두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후벼 팠고 성냥개비로 눈꺼풀을 받쳐 잠을 재우지 않았으며, 머리칼을 잡아당겨 구타해 머리칼은 많이 잡아당겨 빠졌다. 그리고 또 맥주병으로 얼굴을 구타하고 늑골을 문질렀으며, 필사적으로 그의 머리를 구타해 류푸밍은 구타로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고 몇 차례나 땅 위에 기절했다. 악독한 경찰은 냉수를 끼얹은 동시에 전기봉으로 전기충격을 가해 정신을 차리게 한 뒤에 계속 혹독하게 구타했다. 고문은 16일 저녁 8시가 넘어서부터 17일 아침 6시쯤까지 지속되었다. 17일 오전, 구사일생인 류푸밍은 투취안현 구치소로 납치당했다.
구치소에서 악독한 경찰과 죄수에게 혹독하게 구타당했다. 악독한 경찰은 스스로 증거를 꾸며서 그의 손을 잡고 강제로 서명하게 했고, 법원은 그에 대해 3년의 불법 판결을 내려 9개월 후에 우라하다 감옥으로 보냈다. 20일 후에 네이멍구 바오안자오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바오안자오 감옥안의 악독한 경찰은 경찰봉으로 그에게 전기충격을 가한 체벌, 귀 뺨을 때리는 등 각종 강압 강제수단으로 그에게 믿음을 포기하도록 했다. 잔혹한 박해는 류푸밍의 다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는데 수 년 후 지각이 없었다. 3년 만기 후 석방되었다.
셋째 아들이 박해당하다
2001년 11월, 류잔위의 셋째 아들 류푸중은 진상을 알렸다가 모함당했다. 랴오닝 다스차오시 진차오(金橋)분국의 악독한 경찰은 그를 납치해 폭행을 가한 뒤, 다스차오 지역 유치장으로 납치했다. 동시에 붙잡힌 사람은 또 파룬궁수련생 푸(伏) 씨이다.
류푸중이 ‘진ㆍ선ㆍ인(眞ㆍ善ㆍ忍)’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연공을 하며 대법을 실증하자, 악독한 경찰은 발로 그를 걷어찬 동시에 죄수에게 지시해 그를 구타하게 하고 그의 몸 위에 냉수를 끼얹었다.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악독한 경찰은 쇠고랑을 채워 병원에 보내 위에 호스를 꽂고 일주일 동안 음식물을 주입했다. 26일 이후 다스차오 공안국에 의해 1년의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받아, 랴오닝 잉커우(營口) 노동교양원 5대대(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대대)에 보내졌다. 악독한 경찰은 죄수에게 지시해 강제로 류푸중에게 감옥규정을 외우게 했고, 작은 걸상에 앉히고 노역 노동을 시켜 매일 공예품 만드는 데 10여 시간 이상을 했다. 당시 잉커우 교양원 부원장 류강(劉剛)이고, 파룬궁을 박해한 교육과장은 친빙원(秦秉文)이다. 당시 30여 명 파룬궁수련생이 감금당했다.
잉커우 노동교양원에서 1년 동안 박해를 당한 후, 2002년 11월 22일에 또 랴오닝 번시 웨이닝잉(威寧營) 노동교양소로 납치당했다. 당시 그곳에는 50여 명 남자 수련생을 감금했는데, 웨이닝잉 노동교양소의 악독한 경찰은 유다(猶大)를 이용해 그에 대해 강온양책을 함께 써서, 대법을 모독한 텔레비전 등을 보도록 핍박하는 사악한 수단으로 수련생에게 세뇌를 시켰으며 정신적으로 그곳의 파룬궁수련생에게 손상을 입혔다. 류푸중의 불법 형기가 연말에 만기된 후 본래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오히려 집에 부모님과 두 형이 모두 불법 감금당했다는 이유로, 19세인 그는 어쩔 수 없이 감옥에서 설을 쇠고 2002년 정월에 출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부친 류잔위는 또 네이멍구 투무지 노동교양소에 감금당해 있었고, 모친 장원링은 마싼자 노동교양소에 감금당해 있었으며, 두 형은 네이멍구 바오안자오 감옥에 감금당해 있었다.
박해에 참여한 관련 인원과 당시 번호는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람.
문장발표: 2013년 4월 1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4/13/2720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