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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성 자오허시 창구이윈 여사, 박해로 사망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지린보도) 지린 성(吉林省) 자오허 시(蛟河市) 퇴직 직원 창구이윈(常桂雲) 여사는 파룬궁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수련해 늘 곳곳에서 다른 사람을 고려했다. 2008년에는 중공(중국공산당) 당국에 의해 8년의 불법 판결을 받고 지린 창춘(長春) 헤이쭈이쯔(黑嘴子) 여자감옥에 불법 감금, 박해당해 반신불수가 되어 생활도 스스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치아는 전부 부러졌고, 입과 눈이 비뚤어져 발음이 불분명하며, 온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2012년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2013년 3월 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였다.

창구이윈 여사가 1996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한 뒤, 매우 빨리 온몸의 질병이 깨끗이 없어졌다. 그녀는 청춘의 활력이 넘쳐 몸과 마음을 다해 대법수련 중에 뛰어들었다. 중공(중국공산당) 사당(邪黨)이 파룬궁을 박해한 뒤, 그녀는 2번이나 베이징에 가서 사부님과 대법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데 대해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다. 그녀 자신은 핍박에 못 이겨 다년간 의지할 곳을 잃고 유랑생활을 했다. 2003년 5월 17일, 창구이윈은 자오허 시 쑹장 진(松江鎮) 산쑹링(衫松嶺) 수련심득교류회에서 자오허 시 형사경찰대대, 쑹장파출소, 쑹장진정부의 교란으로 겹겹이 포위되어 곤경에 처했는데, 당시 현지의 파룬궁 수련생 여러 명이 납치를 당했다. 현지 수련생의 도움으로 창구이윈은 포위에서 벗어나 고산 밀림에서 고생스럽게 먼 길을 걸어갔다.

2007년 봄, 창구이윈은 자오허 시 창안(長安)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 불법 가택수색을 당해 집안의 사부님 법상과 대법자료를 강탈당했다.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한 뒤에 구치소에 감금당했다. 박해당해 심각한 병 상태가 나타나자 경찰은 책임을 감당할까 두려워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했는데, 입원해 검사받을 때 그곳을 벗어났다. 그 후, 여러 차례 경찰과 가도, 사회구역 등 중공 사당에게 속아 넘어간 경찰에게 교란당했다.

2008년 3월 21일, 창구이윈은 다른 사람에게 무고당해 하이얼(海爾) 컴퓨터 상점에서 지린 시 국가보안, 창안 파출소에 의해 납치당하고, 집안의 텔레비전, VCD 기계와 위성접수기 등 설비를 강탈당했다. 창구이윈은 폭력방지 경찰대대로 납치당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큰 괘에 올리기, 호랑이의자에 앉기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당했다. 자오허시구치소에서 박해로 한쪽 몸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고, 마비되어 발음이 분명하지 못했으며 행동도 불편했다. 자오허시공안국은 국민의 생사를 완전 무시하고 억지로 그녀를 구치소에 넣어 진일보로 박해를 가했다.

2008년 7월 4일 오전 8시, 지린 자오허법원 제8재판청에서는 불법으로 창구이윈에 대해 재판했다. 창구이윈은 자오허 시 사당이 조종한 법원에서 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8년의 불법 판결을 받았다. 자오허 시 공검법사(공안, 검찰, 법원, 사법)는 가족이 변호사를 선임해 무죄변호를 못하게 하려고 공갈 협박하고 위협했다.

2008년 10월 12일, 창구이윈은 지린성여자감옥으로 납치당했다. 그녀는 장기간 바오자(包夾)에게 감시당했고 끊임없이 강제세뇌를 당했다. 점심과 저녁에 밥 먹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외에 하루에 대략 15시간 동안 줄곧 강제로 작은 플라스틱 걸상에 앉아 둔부에 굳은살까지 박였다. 그리고 강제로 매일 세뇌녹화 프로그램, 이른바 ‘학습자료’을 보게 했고, ‘인식을 이야기하고’ 강제로 반복적으로 체험을 쓰게 했다. 다 쓰지 못하면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창구이윈 여사는 감옥에서 박해로 왼쪽 팔이 부러지고 온 머리가 백발이 되었으며,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해 침대에 몸져누웠다. 그리고 치아가 전부 부러져 발음이 이상해져 사람들은 그녀의 발음을 잘 못 알아들었다. 치아가 없어 밥을 먹는 것도 굉장히 느렸다. 그녀 혼자서는 그릇과 젓가락을 쥐지 못해 다른 사람이 밥을 먹여 줬으나 매일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밥을 먹었기에 충분히 먹지 못했다. 생활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게 되어 대소변을 눌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바지에 누었다. 바지는 늘 축축했고 옷과 이불은 지저분하고도 구렸다. 시간이 길어지자 감옥 측은 가족에게 일회용기저귀를 사주라고 했는데, 자루로 보내도 부족했다. 창구이윈의 아들은 부족한 분량을 어쩔 수 없이 창춘의 친구에게 부탁해 감옥에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감옥 측은 예전에 가족에게 수천 위안을 치료비로 썼다고 했으나, 실제 이 돈을 치료에 사용했는지 아니면 박해에 사용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창구이윈 여사는 건강은 도리어 갈수록 나빠져 점점 심각해졌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악독한 교도관은 여전히 바오자를 배치해 밤낮 감시하며, 다른 파룬궁 수련생이 접근하거나 혹은 도와주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매번 가족이 창구이윈을 면회하려 해도 바오자 2명이서 붙잡고 나왔다. 창구이윈은 가족을 만나면 울기만 했다. 박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가족의 질문에 바오자나 교도관이 대신해 대답했다. 사실 이때, 창구이윈은 이미 정상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가족은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계속 요구했으나, 감옥 측은 줄곧 책임을 미루며 얼버무렸다.

예전에 한 외지의 대법제자가 문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창구이윈이라고 부르는 한 파룬궁 수련생은 이미 60세로 현지 구치소에서 박해로 뇌혈전 증상이 나타났는데도 감옥에 보내졌습니다. 악인은 억지로 꾀병을 부린다고 말하며, 매일 그녀에게 구타, 세워두는 고문, 화장실 출입금지, 단수 고문을 가했습니다. 화장실 그릇 안의 물을 몰래 마시다 발각되면, 곧 흠씬 구타를 당하고 또 스스로 자신의 뺨을 때리게 했습니다. 결국에는 학대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었고 몸이 마비되었습니다. 그녀를 구타한 사람은 관춘링(關春玲), 장옌메이(張豔梅), 천옌메이(陳豔梅)입니다. 양후이(楊惠)는 그녀가 제대로 ‘전향’되지 못했다고 보고했으며, 그녀에게 끈으로 묶는 고문을 가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 후, 이 파룬궁 수련생은 두 손을 펴지 못했고 묶인 상처는 2년이 되어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2012년 초에 이르러, 감옥 측은 창구이윈에 대해 완전히 ‘안심’할 수 있게 되어서야 만 위안의 보석금과 보증을 받고 풀어주었다.

창구이린은 돌아왔다. 그녀를 본 모든 사람은 멀쩡하던 사람이 3년 사이에 감옥의 박해로 폭삭 늙고 몸져누워 반신불수가 되어 생활을 스스로 할 수 없게 된 것을 목격하고는 깜짝 놀랐다. 눈과 입이 비뚤어지고 치아는 모두 부러졌으며, 대부분 그녀는 다만 ‘아, 아’ 하는 소리만 했을 뿐, 다른 말은 전혀 발음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감옥 측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또 창구이윈의 아들에게 매달 감옥 측에 어머니의 상황을 보고하거나, 혹은 현지 파출소에서 날인한 자료를 감옥에 부치도록 핍박했다.

창구이윈은 집으로 돌아왔으나 박해로 조성된 상해가 너무 심각했다. 정신과 물질적인 상해가 너무 크고 몸 상태가 갈수록 악화되어 결국 2013년 3월 8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3년 3월 16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3/16/271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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