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간수보도) 간쑤성(甘肅省) 칭양시(慶陽市) 양궈량(楊國梁) 이라는 노인은, 중공(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정부를 뒤엎기 전에는 국민당 정부군 부사령관이었지만, 1949년부터는 중공의 시달림을 받아 산다사는 게 죽는 것만 못했다. 1978년 소위 ‘누명을 벗겨’진 때는 이미 심신이 모두 크게 상하였는데, 1997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뒤에야 비로소 진정한 건강을 얻었다. 그러나 2년 후, 중공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한 번 더 박해를 당했으며, 결국 2004년 11월 25일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중공의 수 십 년 박해 하에서 희망을 잃다
양궈량은 1926년 9월 22일에 출생하여 칭양시(慶陽市) 시펑구(西峰區) 샤오진진(肖金鎮) 미왕대대(米王大隊) 먀오먼촌(廟門村)에서 거주했다. 1944년 국민당 군대에 입대하여 1948년에는 부사령관으로 진급했다. 1949년에 공산당이 함정을 설치한 부대에 파견되어 전쟁을 했는데, 거의 전군이 전멸되었으며, 결국 장교 두 사람만 살아남았다. 양궈량은 시체더미에서 기어 나와서 날이 어두워지자 집으로 돌아갔지만,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편안한 날을 얼마 보내지 못했다. 사악한 중공(中共)은 국민이 모반할까 두려워, 1958년에 양궈량에게 일부의 죄명을 뒤집어 씌워 그를 쯔우링(子午嶺)으로 보내 노동교양을 하도록 핍박했다. 1960년 설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뒤에는 다시 반혁명분자로 몰렸다.
지식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중공 사악한 당의 박해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고한 탄압을 당해야 했다. 몇 십 년 동안 양궈량은 중공에 의한 각종 시달림과 고문박해로, 온몸에 질병을 얻었고,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입어 죽음과 같은 나날을 보냈다. 1978년에 이르러 정책이 변하자, 그때야 비로소 누명을 벗게 되었다.
하지만 1984년에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이 인생이 허망함을 느끼고는 수행하는 길을 찾아 나섰고, 많은 고대서적을 뒤지며 진정한 수련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수행하는 길을 찾기 위해, 그는 자전거를 타고 많은 사원들을 찾아다녔는데, 핑량(平涼)의 ‘쿵퉁산(崆峒山)’, 산시(陝西) 푸펑(扶風)의 ‘파먼쓰(法門寺)’로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뒤에 그는 그들이 진정으로 수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중공 사악한 당에게 다년간의 이유 없는 박해를 당했던 까닭에, 양궈량의 성격은 아주 좋지 않게 변해, 걸핏하면 성질을 냈다. 몸도 좋지 않아 늘 감기에 걸렸고 등도 굽었다.
대법을 수련해 새 삶을 얻다
1997년에 양궈량은 기쁘게도 대법을 얻게 되었는데,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했다. 온몸의 질병이 모두 사라져 버렸고, 마음도 상냥해졌으며, 굽었던 등도 바르게 펴졌다. 그의 며느리는 말했다. “아버님은 원래 시중들기 어려운 분이었어요. 식사하실 때면 이것저것을 불만스러워 하셨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면 무엇을 드시고, 밥과 반찬이 구미에 맞지 않다고 불평하시지도 않아요. 저도 밥을 짓기가 훨씬 수월해졌어요.”
한 번은 시안에서 양궈량과 딸 그리고 사위 세 사람이 함께 걸어갔는데, 딸은 늘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어느 새 딸이 뒤쳐지자, 양궈량은 곧 되돌아가서 딸에게 상화하게 웃어주었다. 예전에 그가 계단에 오를 때는 늘 숨을 헐떡였는데, 대법을 수련한 이후 그가 오르막길을 오르면 아무도 그를 따라잡지 못했으며, 그의 커다란 변화를 본 그의 딸도 대법을 수련하려 했다. 양궈량은 늘 몇 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법공부를 하고 파룬따파를 널리 전했다.
‘진선인(眞善忍)’수련을 견지해 각종 박해를 당하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사악한 당은 파룬궁에 대해 아무런 이유 없이 미친 듯 탄압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파룬궁수련을 견지한 사람의 집은 평안한 적이 없었다. 칭양시 샤오진진 파출소의 한융(韓勇), 장전화(張振華) 등은 샤오진진 유치원에서 이른바 ‘학습반’을 조직해,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을 불법 감금하고는 강제로 수련을 포기시켰다. 문화소에서도 세뇌반을 조직했는데, 파룬궁수련생에게 청소시키기, 팻말을 걸고 계단에 세워놓고 대중 앞에서 인격 모욕하기, 심판회의 열기, 설에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기 등의 방법으로 파룬궁수련생에게 연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쓰도록 핍박했다. 양궈량은 조건이 아주 어려운 환경 하에서도 여전히 단체법공부를 견지하고 소형 법회를 열었다.
2000년 2월 29일, 74세인 양궈량은 현지 파룬궁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대법이 좋음을 실증하였고, 사부님에 대한 누명을 벗겨 드려야 한다고 했다가, 악한 경찰에게 납치당하여 시펑구치소에 한 달 동안 감금당했다. 얼마 후 양궈량은 두 번째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갈 때 단지 구운 떡 두개와 물 한 병만 지녔으나, 돈을 쓰기 아까워서 다른 음식을 더 사지 않았지만, 톈안먼광장에 도착해 대법을 실증한 뒤, 엿새 만에 무사히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2000년 4월 18일, 중공의 악한 관리들은 구치소에 감금당해 있던 파룬궁수련생16명[자오리리(焦麗麗), 양궈량(楊國梁), 차오구이팡(曹桂芳), 스시친(史喜琴), 마오차이전(毛彩珍), 차오창창(曹強強), 류룬란(劉潤蘭), 진슈란(金秀蘭), 쭤펀란(左粉蘭), 허쉐메이(賀雪梅), 장슈윈(張秀雲), 셰강펑(謝剛鋒), 류즈룽(劉志榮, 이미 박해로 사망), 리루이화(李瑞花), 쉬정쩌(徐正則), 야오시쿠이(姚喜奎)]를 강제로 시펑시 샤오진진의 대로로 끌고 가서 모욕을 당하도록 했다. 동시에 샤오진 영화관에서 이른바 만 명 군중대회를 열어 그들을 비판, 투쟁하고 모욕했다.
2001년에 텔레비전에서 한창 가짜 ‘톈안먼 분신자살사건’이 방송되자, 손자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빨리 와서 보세요. 텔레비전에서 할아버지네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분신자살을 해 자신을 해치고 또 다른 사람을 해쳤다고 말해요” 라고 하자, 양궈량은 신문을 본 뒤에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파룬궁은 정법이다. 나는 정법을 여러 해 동안 찾아다녔다”
2001년 7월 26일, 양궈량은 어느 파룬궁수련생의 집에서 수박을 먹던 중, 현지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안 사오쥔(邵軍), 허궈화(賀國華), 진젠쉰(金建勛) 등에 의해 파출소로 납치당했다. 그 악한 경찰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노인을 6시간 넘게 뙤약볕 아래 있도록 했으며, 그의 몸에 있던 재물을 빼앗아 가고는 시펑구치소로 보내 혹독하게 구타한 뒤에 한 달 동안 가뒀다.
2002년 시펑시 공안분국 경찰인 더푸이쿠이(德付義奎), 정샹(鄭翔) 등은 양궈량 노인에 대하여 1년 6개월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내렸다. 성 노동교양소에서는 양궈량의 연세가 많아 감히 수감하지 못하자, 시펑시의 공안은 즉시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 불법 감금했다. 양궈량은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박해로 몸이 허약해졌는데, 가족은 거듭 석방을 요구했으나, 공안국의 악독한 경찰은 석방해주지 않았다. 2003년 5월경, 양궈량의 가족이 다시 시펑구 마약 중독자 재활원으로 가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여위었는데, 스스로 일어나서 걷지도 못했다.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는 책임이 두려워 그제야 석방한다고 대답했다.
시펑구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불법 감금을 당한 기간, 양궈량 노인은 여전히 사부님과 대법을 믿었으며, 항상 온화하게 사람들을 대했고, 다른 수련생을 도와주었다. 그가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 있을 때, 그가 모모와 함께 가부좌를 했는데, 그들을 관찰하고 지키는 사람이 들어왔지만, 누가 들어왔는지를 상관하지 않고 계속 가부좌를 견지하자, 그 간수는 그냥 한 바퀴를 돌고는 가버렸는데, 이 사건은 그들로 하여금 한 층의 법리를 깨닫게 했으며, 또 아주 많은 법리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1999년 7월 29일부터 시작해, 중공 악독한 경찰은 늘 양궈량의 집으로 가서 교란했으며, 양궈량은 3차례나 불법 감금을 당했다. 그의 가족이 수 차례에 걸쳐 석방을 요구한 끝에 2003년 5월,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2004년 11월 25일 결국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2년 09월 27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9/27/2632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