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박해로 사망한 우한시 류윈차오 가족, 억울함 호소

[밍후이왕] (밍후이왕기자 웨이징 취재보도) 2012년 7월 7일 저녁 7시, 겨우 56세인 우한시(武漢市) 파룬궁수련생 류윈차오(劉運朝)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밍후이왕 보도에 따르면, 류윈차오는 세상을 뜨기 전에 두 눈이 거의 실명에 이르렀고 말을 할 수 없게 됐으며, 몸 여러 곳은 감금돼 구타당한 뒤 상처가 생겼고 불구가 됐다. 그는 예전에 판자타이(范家台) 감옥에서 3년 동안 갇혀, 8명의 악독한 경찰에게 구타와 고문을 당해 생명이 위독해진 적이 있다. 게다가 독극물 손상을 입은 것 같기도 했다. 그의 형 류한차오(劉漢朝)는 극심한 비통 속에서 후사를 처리한 동시에 눈물을 머금고 해외 밍후이왕 기자의 취재를 접수했으며, 국제 사회에 박해 원흉을 징벌하도록 호소했다.

遭受迫害前的刘运朝
박해를 당하기 전의 류윈차오

예전의 위암 환자이자 골목 깡패가 대법을 얻어 새 생명을 얻다

키가 180cm인 류윈차오는 예전에 대책 없는 나쁜 사람으로 알려졌고 어려서부터 싸움질을 했다. 어른이 된 후에는 또 동업자를 괴롭히며 시장을 독점해 보는 사람마다 두려워했다. 그 후 운 좋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만나서 수련한 뒤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그는 완전히 참고 양보함과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함을 아는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예전에 파룬따파는 그의 인생을 개변시켰고 그로 하여금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게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형 류한차오가 회억해 말하기를, “류윈차오는 1996년에 대법을 얻었습니다. 1996년 이전에 그는 늘 병을 앓았는데 대법을 얻은 뒤 병이 없어졌습니다. 수련하기 전에는 위암을 앓았습니다. 수련한 뒤 몸이 좋아졌고 사람도 좋아졌으며 원기가 왕성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허리가 굽었으나 연공을 한 뒤 허리가 펴졌습니다.”

대법을 얻은 류윈차오는 엄격하게 ‘진선인(眞善忍)’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 예전의 깡패가 예절 있게 양보함을 배웠고 규칙을 지켜 줄을 서서 장사를 했다. 이 일을 말하기 시작한 가족은 탄식해 마지않았다.

전향을 거부하자 8명 악독한 경찰들에게 비참하게 구타당하다

2009년 4월, 수련을 포기함을 거부한 류윈차오는 황스시(黃石市) 샤루구(下陸區)법원에 의해 무고한 7년 판결을 선고받았다. 류윈차오가 억울한 재판에 불복해 상소를 제출한 후 황스 법원은 재판을 열어 법정심리를 하지 않은 상황 하에 다시 3년이란 억울한 판결을 내렸다. 류윈차오는 판자타이(范家台) 감옥으로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감구역장 샤오톈보(肖天波)는 류윈차오를 위협해 말했다. “당신이 전향(수련에 대한 믿음을 포기함)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가 없다.” 류윈차오는 감옥에서 구타와 학대를 당해 하지가 마비되어 대소변도 스스로 볼 수 없었으며 그가 사경을 헤매자 감옥병원으로 보내져 응급처치를 받았다. 장안구(江岸區) ‘610’주임 후사오빈(胡紹斌)은 오히려 “그가 그곳에서 죽으라고 해라”고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2010년 9월 7일, 감옥에서는 책임을 감당할까 두려워 류윈차오의 형에게 그를 데려가도록 했다. 그의 형은 비분해서 말했다. “돌아왔을 때 바로 병원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공산당의 말대로 그가 여태껏 병원에 입원했었다고 말했습니다. 의사는 완전히 그들(610)이 요구한 대로 무슨 중풍이고 또 뇌수종이라고 했습니다. 제 남동생의 몸은 도처에 모두 상처였고 돌아왔을 때는 각혈과 혈변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치아도 치켜들려 흔들렸고 앞니마저 없었습니다. 구타로 흔들렸는지 아니면 무슨 물건에 치켜들려 흔들렸는지 저도 모릅니다. 그는 의식이 똑똑할 때 감옥 안에서 8명의 경찰이 그를 구타한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경찰 이름을 모르고 있습니다. 제 남동생도 알지 못하는데 그들은 모두 상부에서 파견해 온 사람들이며 사양(沙洋) 노동교양소에 있습니다.”

180cm의 키에 몸이 건강하던 류윈차오는 학대로 피골이 상접해졌고 상처투성이가 됐다. 감옥에서는 무엇 때문에 그를 이렇게 폭행했는가? 류한차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동생은 의식이 똑똑할 때, 감옥에서는 그에게 파룬궁을 반대하라고 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련하는 사람으로 어찌 파룬궁을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를 전향시키려 한 것이지요.”

약물학대로 2년 넘게 인사불성이 되다

류윈차오가 사망할 당시 다리 위, 손 위, 등은 모두 검은 자색을 띠었고 포진이 가득 생겨난 상태였다. 그 후 판자타이에서 석방당한 파룬궁수련생은 감옥에서 심한 구타를 당한 뒤 또 약물학대를 당해 조성된 것으로 의심했다.

형 류한차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류윈차오는 2010년에 석방됐을 때, 바로 독극물을 주사당했던 것입니다. 그는 몸에 전부 상처였고 돌아온 뒤 즉시 인사불성이 됐습니다. 등 뒤는 전기고문을 당한 상처였고 둔부의 뼈마저 모두 상처가 있었습니다. 2년 동안 모두 침대위에서 우리가 그를 보살펴주었어요. 그는 기본상 기절한 상태였습니다. 약물이 그로 하여금 혼미해지게 한 것입니다. 사망 전 상황은 바로 독극물을 주사당해 약물 반응이 나타난 것으로 무슨 약을 주사했는지는 모릅니다.”

밍후이왕 보도에 따르면, 많은 파룬궁수련생은 판자타이 감옥에 있을 적에 강제로 몸을 상해하는 약물을 주사당했음을 말했다. 한 수련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옥병원과 총병원은 모두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함에 참여했어요. 많은 수련생들은 모두 병원에 끌려가서 생명이 위험한 증상이 나타난 뒤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어요. 몇 해 동안에 판자타이 감옥에서 6명의 파룬궁수련생이 박해로 사망했어요.”

집안이 참혹하게 불행을 당한 가족, 눈물을 머금고 고소하다

소식에 따르면, 류윈차오가 몇 년 동안 박해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 그의 병원비는 어쩔 수 없이 형과 다른 가족이 모두 지불하는 수밖에 없었다. 2010년 9월 7일부터 14일까지 짧은 일주일 동안에 1만 위안(약 180만원)의 병원비용을 썼다. 박해로 이 지경에 이르렀을 지라도, 류윈차오가 거주한 가도와 사회구역, 예컨대 얼치가(二七街)와 창젠(長建)사회구역, 다이자산(岱家山) 사회구역(류씨의 호구 소재지)에서는 여전히 끊임없이 집을 찾아와 그를 핍박해 전향서에 서명시키려고 시도했다.

중공의 박해는 류윈차오의 가정에 재난을 가져다주어 원래 행복하던 가정을 무참하게 깨뜨렸다. 그의 형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얼치가의 서기 롼(阮)씨가 그들(류윈차오 부부)을 이혼시켰어요. 공산당이 그들을 이혼하도록 핍박했습니다. 80여 세인 저의 노모친도 예전에 연공을 했으나 남동생이 붙잡힌 뒤 감히 연마하지 못했습니다. 동생이 구타를 당해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으로, 어머니는 특별히 조급해 하셨어요. 이 결산은 모두 공산당 우두머리와 계산해야 합니다.”

류한차오는 또 다음과 같이 표시했다. “남동생이 세상을 뜬 뒤 610 사람들은 잠시 오지 않았어요. 이후에 올지 안 올지는 모르지요. 온다 해도 저는 그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다시 오면, 나는 또 나의 남동생을 도와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배포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들이 온다면 저는 이렇게 할 겁니다. 저는 그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류윈차오가 박해로 사망함에 그의 가족과 친구는 슬프고 분노를 느꼈고 또 더욱더 천리 공의가 구현되기를 바랐다. 형 류한차오는 눈물을 머금고 비분해서 말했다.

“사람마저 이미 사망했는데 제가 무슨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바로 국제인권기구에서 공산당을 징벌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소원입니다.”

문장발표: 2012년 07월 26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7/26/260775.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