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 통신원 헤이룽장 보도) 7년 전 완자(萬家) 노교소 집중대에서, 유난히 더운 여름날 오후 교도관이 파룬궁수련생 장훙을 고문 학대했다. 사람들은 대략 8시경 장훙(張宏)이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저는 집으로 돌아갈래요. 저는 둥리구(動力區) ××가 ××호에서 살고 있어요.”라고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5시가 넘어서, 옥경은 아무 반응이 없는 장훙을 병원에 보냈고, 그곳에서 그녀를 ‘심장병으로 사망’으로 진단했다. 그때가 2004년 7월 31일, 장후이가 노동교양소로 납치당한 지 겨우 9일째 되는 날이었다.
사건이 7년 지났으나, 장훙의 억울한 사건은 여전히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장훙(여, 1973년 4월 출생)은 파룬궁을 수련하고 ‘진ㆍ선ㆍ인(眞ㆍ善ㆍ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이유로, 생전에 수차례 중공(중국공산당) 경찰에 납치돼 두 차례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박해로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 겨우 31세였다.
기쁘게 파룬궁을 만나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던 장훙은 원래 성질이 고집스럽고 말하기 싫어했으며 자존심도 무척 강했다. 1992년 졸업한 그녀는 하얼빈시(哈爾濱市) 제4병원에서 검증사(檢驗師)로 근무했다. 근무기간에 황담성간염(黃膽性肝炎)에 걸려 전염병원에 보름 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1997년, 잔병치레가 많았던 장훙은 동창의 소개로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련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은 그녀가 완전히 변한 것을 발견했다. 원기가 왕성해져 매일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기도 좋아했고 신체도 건강해져 점점 더 튼튼하게 변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매일 좋아지기 시작하여 주사 한 대 맞지 않고 약 한 알 먹지 않아도 건강했다.
신체가 건강해지자 그녀는 더욱 충실하게 근무했다. 그녀는 매일 근면하고 성실하게 업무에 임하며 고달픔을 참고 힘든 일을 견뎌냈다. 그 당시 검증과 주임이 퇴직하면서 그녀를 추천하여 검증과 주임으로 키우려고까지 했다.
법 공부팀 숫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두 개 팀으로 나누었다. 장훙은 하얼빈시 제5병원 앞에 있는 공원에 연공장을 마련했다. 그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녹음기를 들고 연공장에 가서 청소한 뒤 홍법(洪法) 전시판을 걸었다. 그녀는 또 연공할 때 주동적으로 동작을 시정해 주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문의하면 진솔하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많은 사람이 그녀의 인도 하에 대법수련으로 들어섰다.
대법 책이 부족했던 당시에 장훙은 원고지를 사서 책을 베껴 모두에게 선사했다. 그녀는 책을 베끼기에 앞서 먼저 손을 깨끗이 씻고 주위도 깨끗이 정리했다. 그녀는 늘 밤중까지 베꼈는데 한 권을 다 베낀 다음에는 가족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여 한 글자 한 글자씩 대조했다.
그녀는 또 늘 다른 사람과 함께 교외로 가서 홍법을 했는데, 홍보판을 걸고 현장에서 연공을 했으며, 한 집 한 집씩 홍법을 했다. 장훙은 또 퇴직한 파룬궁수련생들을 독촉해 낮에도 나가서 연공을 통해 홍법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파룬궁의 신기함을 알게 했고 모두 건강하고도 평안할 수 있게 했다.
박해 속에서 청원하다
중공은 1999년 7월 20일부터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훙은 이튿날에 여전히 공원으로 연공 하러 갔다가 경찰에게 납치당해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에서 돌아온 뒤, 장훙은 1999년 10월 11일 베이징으로 가서 파룬궁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10월 20일, 파출소에서 그녀를 데려가라고 직장에 통고했고, 가족에게는 천 위안을 갈취하고도 그녀를 하얼빈시 제2구치소(야쯔취안(鴨子圈))로 납치했다. 그 후 공안국 정보과 과장 양서우이(楊守義) 등에 의해 1년 반의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했다.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하다
1999년 11월 말, 장훙은 완자 노동교양소로 납치당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매달린 채 구타당했으며, 남자 경찰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했고, 쇠 우리에 갇혀 꼬박 3일 동안 쭈그려 앉히기 고문을 당했다. 엄동설한인데도 솜옷 입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매일 추위에 덜덜 떨어야 했다. 여름에는 또 홑옷을 못 입게 했다. 장훙은 고문 학대를 감당하지 못해 단식으로 항의했고, 악경은 곧 야만적으로 음식물을 주입했다. 그녀의 가족이 공안국과 시장, 그리고 노동교양소의 관리국 국장을 찾아 도리를 따졌으나, 도리어 갖은 어려움을 당하기만 하면서 꼬박 8개월 동안 면회조차 못했다.
장훙은 노동교양소에서 22개월 동안 불법 감금당했다. 그 뒤 석방된 뒤에도 직장에서는 그녀의 출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2년 5월이 되자 그때부터 생활비 2백여 위안(약 3만 7천 원)을 지급했는데, 그녀는 직장에 복귀하여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해 2003년 10월에야 제4병원으로 출근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근무했던 업무가 아니라 진료 안내만 시켰다. 출근한 뒤에도 그녀는 역시 고생스럽게 여기지 않고 묵묵히 일만 했다. 힘든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지러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환자 이동을 담당했다. 병원에서 위로부터 아래까지 관계를 아주 잘 처리하여 모두가 그녀를 진실하며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고문당해 사망하다
2004년 5월 8일, 그날은 큰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퇴근한 후 하얼빈 둥펑(東風)감옥 담장 위에 파룬따파(法輪大法) 진상표어를 쓰다가, 감옥 망루 보초에게 발각되어 다오와이구(道外區) 둥펑 파출소에 근무하는 장광밍(張廣銘)과 우진룽(武金龍) 경찰에게 붙들려 타이핑구(太平區) 공안국으로 납치당했다. 어떠한 기록도 없이 경찰은 6월 초 그녀에게 3년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내렸다. 신체검사를 할 때 이상이 있어서 완자(萬家) 노동교양소에서는 한때 그녀의 수감을 거부했다. 7월 22일, 경찰은 다시 한 번 장훙을 완자 노동교양소 집중훈련대로 강제 납치했다.
당시 완자 노동교양소 집중훈련대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한 사람은, 소장 루전산(盧振山), 대장 우훙쉰(吳洪勛), 부대장 자오위칭(趙余慶), 부대장 야오푸창(姚福昌)이었다. 이 외에 또 2명의 여성 대장이 있었다.
7월 22일 오전, 장훙이 ‘3서(三書, 보증서, 반성문, 결렬서)’를 거부하자, 경찰은 곧 그녀에게 쭈그려 앉히기 고문을 가했고 밥도 먹이지 않았다. 그리고 교도관과 집중훈련팀의 팀장 장구이윈(張桂雲)은 수갑으로 장훙의 두 팔을 곧게 편 상태에서 침대에 매달았는데, 점심때부터 이튿날까지 매달았다.
7월 23일, 경찰은 장훙에게 심장병(본래 병이 없음)이 있다면서 강제로 주사를 맞히려 협박하며 계속 ‘3서’를 쓰도록 핍박했다. 장훙이 거부하자, 경찰은 곧 장훙을 침대 위에 눌러 넘어뜨리고(침대 위에는 하나의 나무판자만 있었음), 양팔을 침대머리에 매달았다. 게다가 끈으로 두 발을 침대 발치에 묶은 채 강제로 독극물을 주사해 그녀는 대소변을 가릴 수 없었다.
경찰은 이처럼 그녀의 양손과 두 발을 채운 채 침대에 눕혀 똥오줌마저 침대에서 해결해야 했다. 경찰은 또 그녀의 하반신을 몽땅 벗기고, 상반신은 러닝셔츠 하나만 입혀 바람 입구에 놓고 바람을 맞게 했다. 한 처녀가 이렇게 대낮에 막심한 굴욕을 당했다. 어느 날 저녁 장훙은 당직을 서는 사람에게 애걸하여 옷 한 벌 얻어 입었다. 이튿날 경찰 우바오윈은 당직자에게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7월 24일, 장훙은 경찰의 고문 박해를 단식으로 항의했다. 7월 26일, 대장 자오위칭, 과장 야오푸창은 다른 경찰을 교사해 장훙에게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했는데, 주입한 옥수수죽 안에 대량으로 진한 소금물을 넣었다. 자오위칭과 야오푸창은 그녀에게 물을 주지 않고 화장실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명령을 내렸다. 장훙은 몸이 묶여 움직일 수 없자 곧 큰 소리로 그녀를 박해하는 악인을 폭로했다. 경찰은 즉시 테이프로 장훙의 입을 막았다.
7월 29일, 장훙이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 당한 뒤, 수건마저 선혈에 물들자 경찰은 화장실에 수건을 던져 버렸다.
7월 30일, 야오푸창은 링거를 차갑게 한 뒤 강제로 장훙에게 링거를 맞혔다. 그 후 하루에 세 번씩 음식물을 주입했다. 매번 음식물을 주입할 때 교도관과 엄한 관리팀 팀장 장구이윈 등이 장훙의 머리칼을 힘껏 잡아당기며 머리를 내리누른 뒤 강제로 호스를 꽂았다. 그리고 불결한 저질 욕설을 퍼붓고 모욕을 가했다.
극단적인 고문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장훙은 여전히 자신을 박해하는 경찰에게 도리를 따졌고 좋은 말로 권고했다. 장훙은 예전에 그들에게 학대를 당해 혼절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여경 리창제(李長傑)는 대장 자오위칭에게 장훙이 꾸민 것이라고 말했다. 자오위칭은 장훙이 좀 나아지면 다시 힘껏 그녀를 혼내 주겠다고 말했다.
30일 오후, 장훙은 핍박에 못 이겨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하나하나 흰색 반창고가 가득 붙어 있었고, 두 손은 뒷짐결박으로 한데 채워져 있었다. 얼굴은 시퍼렇게 멍들고 수척해졌으며, 두 다리와 두 발은 아주 굵게 부어 있었다.
7월 31일 오전 8시경, 악독한 경찰이 또 한 차례 장훙을 고문하자 그녀는 큰 소리로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저는 집으로 돌아갈래요. 저는 둥리구(動力區) ××가 ××호에서 살고 있어요.”라고 외쳤는데, 경찰이 암암리에 그녀에게 독수를 뻗쳤음을 분명하게 알려준 것이다.
그날 오후 한 시경, 2명 경찰과 4명의 노동교양원이 들것으로 장훙을 싣고 갔는데, 말로는 211 병원에 보냈다고 했다. 사실 이때는 이미 박해로 그녀가 사망했을지 모른다. 3시 20분에 가족은 통지를 받았는데, 말로는 장훙이 그날 오후 두 시에 심장병으로 급사했다고 했다. 그 후 대장 자오위칭은, 장훙은 심장병으로 신장 기능이 극도로 쇠약해져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은 장훙은 근본적으로 심장병이 없음을 알고 있다.
8월 5일, 완자 노동교양소에서 장훙을 감금한 집중훈련대 엄혹한 관리팀 팻말을 ‘의무실’로 고쳤다. 중훈련대의 교도관은 산소통 등 의료용품을 가져와 실내에 두었는데 안색마저 자연스럽지 못했다.
가족이 그녀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은 크게 벌린 채, 입안에 피가 가득했음을 목격했다. 그리고 팬티에는 대소변이 가득했고, 시신은 수척해져 3개월 만에 체중이 15~20kg이나 줄어 있었다. 가족은 경찰에게, 심장병으로 급사했다고 하는데 왜 입안에 피가 가득한지 질문하자, 감옥의사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가족이 시신을 녹화하고 사진을 찍으려 하자, 경찰이 강제로 제지했다. 그들은 빨리 시신을 화장하라고 재촉했다. 가족이 불복하고 법률적 절차에 따라 부검하라고 요구했으나, 오히려 노동교양소 경찰에게 위협과 공갈 협박을 당했다.
2004년 8월 26일, 가족은 경찰의 압력으로 부득이하게 화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40여 세인 경찰의 감시하에, 장훙의 시신은 강제로 화장당했다. 장훙의 직장에서 지급해준 1천2백 위안(약 22만 원)의 장례비와 가족의 5백 위안(약 9만 원)도 전부 완자 노동교양소의 경찰이 가져가 버렸다.
한 젊은 생명은 이렇게 하얼빈시 완자 노동교양소에서 무참하게 박해당하다 사망했다.
문장발표: 2012년 5월 17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5/17/2576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