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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에 아들이 죽은 헤이룽장성 친위핑, 고통을 겪고 세상을 뜨다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헤이룽장보도)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동북의 겨울에 사람들은 환갑에 들어선 노부인이 한 손에 손자를 안고, 한 손에는 손녀를 데리고 등굣길을 어렵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2년이 흘렀다. 아이들의 부모가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했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감옥에 갇혀 박해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노인(친위핑)은 2005년에 무단장감옥에서 박해로 사망한 파룬궁수련생 판싱푸의 모친이다. 2012년 4월 7일,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지 7년 만에 온갖 고난을 겪고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노인의 작은 아들 판싱푸는 천성이 총명해 화중이공대학 소년반에 합격했다. 졸업한 뒤 솽야산시우체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전신국 교환센터의 부주임겸 유이현전신국 부국장을 맡았다. 우편계통에 의해 솽야산시 카자오싱시 모범근무자로 뽑혔고, 세기를 뛰어넘는 헤이룽장성 인재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좋은 아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직원들에게 좋은 책임자, 동료에게 좋은 친구였던 그는 파룬따파를 견지했다는 이유로 2002년에 중공 당국에게 5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았다. 2년 후 무단장감옥의 박해로 결핵성 뇌막염, 폐부종 증상이 나타나 사경을 헤매자 집에 돌려보내졌다. 결국 2005년 1월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潘兴福
판싱푸

牡丹江监狱将潘兴福迫害得奄奄一息后放回家
무단장 감옥은 판싱푸를 박해하고 사경을 헤매는 그를 집에 돌려보내다

고난의 인생

친위핑 여사는 헤이룽장성 솽야산시 사람으로, 1994년에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노인은 그녀가 순조롭게 출생해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임신한 줄도 모르고 다섯 달 동안 줄곧 약을 먹었다. 친위핑은 출생한지 20일 만에 야채저장실에 놓여졌다. 당시 그녀 아버지는 일본 병사에게 잡혀가 강제노동을 당하고 정신이 혼미해졌고, 어머니는 남편이 제정신이 아닐 때 딸을 해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2개월이 지난 뒤 외할머니가 친위핑을 데려갔는데, 이때부터 온몸에 병이 생겼다.

중공의 다롄 강철 시대에 모든 사람들은 기아에 시달렸다. 친위핑은 헤이룽장성 솽야산시로 도주했다. 그 다음해에 고향에 돌아갔다가 80여 가구의 마을 사람들 거의 전부가 굶어죽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다행히 재난을 피했다.

친위핑이 가정을 이룬 뒤, 탄광에서 근무하던 남편은 사고로 외상성 정신병에 걸렸다가 세상을 떠났다. 친위핑과 아이 넷을 남겼는데, 당시 큰 아이는 17세, 작은 아이는 7세였다.

친위핑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모른다. 10년 사이 혼자 네 아이를 공부시켰고, 세 아이가 대학시험에 합격했다. 그 동안의 고생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고난은 끝이 없었다. 하나뿐이던 딸이 졸업하고 화학공장에서 근무하다가 염소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끝없는 재난과 생활의 압력은 결국 친위핑을 지쳐 쓰러지게 했다. 그녀는 간염, 류머티즘, 두통, 위통, 안면신경마비 등에 걸려 자루처럼 많은 약을 먹었지만 치료를 하지 못했다.

다행히 대법을 수련하다

끝없는 고통을 겪은 친위핑에게 1994년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발생했다. 우한 이공대학에서 공부하던 작은 아들 판싱푸가 파룬궁 창시자 리훙쯔 선생님이 전수하신 학습반에 참가해 어머니에게 파룬궁 녹음테이프를 갖고 왔다.

파룬궁을 수련한지 한 달 후 친위핑은 기적처럼 건강한 몸을 얻었고, 정신상태도 예전처럼 좋아져 온몸이 가벼웠다. 가족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노인의 병 치료를 하는 나날도 이로부터 끝났다. 두 아들과 며느리도 파룬궁수련에 들어섰으며, 가족은 화목하게 지냈다.

바른 믿음을 개변하지 않다

그러나 행복한 세월은 짧았다. 1999년 7월, 중공은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후의 12년간 친위핑은 시달림을 당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을 개변하지 않았고, 원망도 없고, 증오도 없이 무수한 시련을 겪었으며, 생활에서 진선인(眞善忍)을 실증하는 길을 걸었다.

노인은 파룬따파에 대한 바른 믿음을 확고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한번은 한 무리 사람들이 노인의 집에 들이닥쳐 가택수색을 하려했다. 노인은 리훙쯔 사부님의 사진 앞에 서서 엄숙하게 말했다. “가져가려면 나의 생명을 먼저 가져가시오. 나의 생명은 바로 파룬궁이 준 겁니다.” 사람들은 맥없이 떠나갔다.

아주 가끔 먼 길을 떠나는 노인은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톈안먼광장에서 경찰은 주먹으로 그녀의 머리를 맹렬하게 때렸다. 그녀는 마음속의 말을 계속해서 높이 외쳤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 진선인은 좋습니다)!”

한번은 구치소에 붙잡혀 꼬박 7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해 결국 자유를 얻었다.

대선대인(大善大忍)

그녀는 옷깃을 여미면 팔꿈치가 보일 정도로 가난 속에서 생활했지만 열정적인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따사로움을 줄만큼 대선대인을 체현했다. 불법 감금당한 파룬궁수련생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멀리 떠났을 때, 친위핑 노인은 추위를 막는 솜옷을 보냈다. 박해당한 파룬궁수련생의 가족과 아이의 형편이 어려울 때 노인은 방열기 비용을 보태 가족들이 영하 20여도의 엄동설한에 따사로움을 체험하게 했다. 노인은 설이나 명절을 맞이하면 친구들이 보내온 맛있는 음식을 형편이 비슷한 다른 노부인에게 모두 보내주었다.

파룬궁수련생 우웨칭이 12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고 무단장 감옥에서 박해로 심각한 폐결핵 증상이 나타나자, 감옥에서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우웨칭을 보살펴주던 누나 우웨샤도 중공에게 납치되어 감금을 당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살펴줄 힘이 없었고, 여동생도 일주일만 보살펴 주고는 근무하러 떠났다. 이때 착한 친위핑 노인은 우웨칭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우웨칭이 세상을 뜬 후 친위핑은 후사를 처리해주었다. 우웨칭의 형은 소식을 듣고 서둘러 와서 군중 앞에서 친위핑 노인에게 꿇어앉았다. 가족이 하지 못한 일을 노인이 해냈기 때문이다.

노인의 대인지심은 그녀가 시달림에 직면했을 때 비할 바 없는 견강함에서 체현되었다. 노인은 19세에 부모를 잃고, 40세에 남편을 잃고, 50세에 딸을 잃고, 환갑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만약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노인은 일찍이 쓰러졌을 것이다. 며느리는 9년의 불법 판결을 선고받고 하얼빈시 여자감옥에 갇혔다. 친위핑 노인은 180위안의 생활비로 손자와 굳게 의지하며 살아갔다. 온갖 고생을 참고 견디며 9년 동안 손자를 보살펴주었다. 그 기간에 늘 하얼빈에 가서 며느리를 면회했다. 기차에서 다른 집 노인들은 모두 침대석에 앉았지만, 친위핑은 손자를 데리고 일반석에 앉았다.

노인의 둘째 아들과 며느리도 붙잡혀 한동안 갇혔다. 노인은 손자 손녀를 보살펴 주면서 감금당한 아들을 면회하러 갔다. 그녀는 친척과 친구의 천대와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받아주어야 했다. 어떤 때에는 큰길에서 경찰들이 와서 협박했다. 그러나 노인은 고생스럽다고 말하지 않았고 원망의 말도 없었다. 동북의 겨울은 찬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사람들은 환갑의 노부인이 늘 한 손에 손자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손녀를 데리고 등굣길을 어렵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한 파룬궁수련생이 노인의 집에 갔다가 마침 밥을 하는 가마솥 뚜껑을 몰래 열었는데, 감자와 배추를 삶는 것을 보고 몰래 눈물을 흘렸다.

친위핑은 근심걱정 속에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랐다.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12년의 암담한 세월 속에서 시련과 인간의 후함과 박함을 맛보았으나 원망도 없고 증오도 없이 진선인(眞善忍)을 실증했다. 그녀는 끝없는 시련을 당한 노인이고, 위대한 어머니이며, 확고한 파룬따파 수련생이다. 그녀는 세상을 뜨기 전에도 리훙쯔 사부님의 가없이 넓은 부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죽음에 상심하고, 괴로워했다.

문장발표: 2012년 04월 16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557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