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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어른에게 달력 선사했다고 악독한 경찰의 구타로 사망 (사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쑹차이훙(宋彩虹.41)은 이름과 같이 아름답고 건강한 부녀였는데, 후루다오시(葫蘆島市) 유치장에 감금된 후 설 밑 10여 일의 짧은 기간에 후루다오시 유치장 부소장 장쥐펑(張俊峰) 싱청시(興城市) 댜오위타이(釣魚臺) 파출소 부소장 자오리양(趙利陽) 등 악경(사악한 경찰)들에게 폭행 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했다. 쑹차이훙이 납치 감금되어 고문을 당한 이유는, 고향 어른에게 파룬궁(法輪功) 진상 달력을 선사했다는 것과 납치 감금 되어 이름을 말하지 않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하고 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宋彩虹生前照片
쑹차이훙(宋彩虹)이 생전에 찍은 사진

이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다고 경악했다.

쑹차이훙의 박해 경과

쑹차이훙은 싱청시 자오자완(趙家灣) 사람으로, 파룬따파를 수련한 뒤 심신에 이로움을 얻었고,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도덕 경지가 높아져 좋은 사람으로 되었다. 1999년 7월 중공(중국공산당)이 광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그 청원의 이유와 둥산(東山)체육장에서 연공을 했다는 이유로 불법 납치되어 마싼자(馬三家) 노동교양소에서 3년의 박해를 당했다.

쑹차이훙은 노동교양소에 감금될 당시 젊고 아주 예쁜 모습이었는데 강제로 화장실 청소를 했다. 그런 후 얼마 지나 지 않아 얼굴 전체에 발진이 돋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악경에게 불려갔다 돌아오면 두 눈은 멍해졌고 머리칼은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어느 날은 악경이 감방 안으로 들어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를 잡아채면서 사정없이 구타를 가했다. 마싼자 노동교양소에서는 2002년 7월 쑹차이훙이 여전히 연공을 견지했다는 이유를 들어 5년의 형기를 연장시켜, 선양(沈陽) 다베이(大北)감옥으로 이송하여 계속 박해를 가했다. 감옥으로 이송된 후 2개월간 독방에 감금되어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했다. 추운 섣달에 창문을 열어놓고 입고 있던 두터운 솜옷 바지를 벗겨내어 얇은 속옷차림으로 차디찬 쇠 걸상 위에 앉히고 두 손 두 발은 이중 쇠고리에 결박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 상태에서밤낮 24시간 동안에 화장실은 단 한 번만 갈 수 있게 하는 혹독한 혹형을 당했다. 밤이면 추운 겨울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고 옥죄인 육신은 고통이 극심했어도 “파룬따파하오!”라는 외침의 소리는 고통과 항쟁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소리칠 때 마다 악독한 경찰은 전기봉으로 소리치는 입에 전기충격을 가했다. 8년 동안의 혹독한 고문과 학대로 쑹차이훙의 온 입은 헐고 치아는 모두 흔들렸고 전신은 온전하지 않았다.

酷刑演示:绑在铁椅子上电击
고문시연: 쇠의자 위에 묶고 전기충격 가하기

쑹차이훙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한 경과

쑹차이훙은 최근 고향 어른에게 ‘평안하고 길한’ 달력을 선사했다는 이유로 후루다오 유치장에 감금되어 고문 박해를 당하다가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에 사망했으며 그 사망 상황은 다음과 같다.

2011년 12월 30일 쑹차이훙은 진상 달력을 배포하다가 진상을 똑바로 알지 못하는 우매한 사람의 무고로, 댜오위타이 파출소에 납치되었다. 사건담당 부소장 자오리양은 쑹차이훙이 이름을 말하지 않자 폭력적인 구타를 가한 후 당일 오후 후루다오 유치장으로 압송 감금했다.

12월 31일 오전 8시경 쑹차이훙은 이름 대기를 거부하고 “파룬따파하오”를 외쳤다. 격분한 유치장 부소장 장쥔펑은 4, 5명의 경찰을 대동 쑹차이훙을 으슥한 다른 감방으로 옮긴 후 바닥에 때려눕힌 뒤머리채를 틀어잡고 배를 밟고 등을 걷어차면서 장시간 무자비한 구타를 가했다. 구타하는 과정에서 부소장 장쥔펑은 “더 세게 때려줘라. 그래도 이름을 대지 않는지, 여전히 외쳐댈지 두고 보겠다!” 하면서 두 개의 경찰봉을 가져다가 더욱 무자비하게구타하려고 할 때 한 여경이 만류했다.

쑹차이훙이 구타당한 후 감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상태였다.그때부터 자주 구토를 하고 가래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어떤 때는 피를 토해 음식물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악경 장쥔펑은 쑹차이훙에게 이름을 말하도록 계속 핍박하고 또 혹독한 구타를 하며 항복을 받겠다는 결심을 하다가, 쑹차이훙의 몸 상태가 극도로 나빠진 것을 보고나서야 화가 치밀어 씩씩거리며 그만 두었다.

宋彩虹生前照片
쑹차이훙이 생전에 찍은 사진

宋彩虹被迫害得奄奄一息
쑹차이훙이 박해로 사경을 헤매다

2012년 1월 6일, 쑹차이훙은 잠시 의식이 없는 모호한 상태가 나타났다. 그제서야 장쥔펑은 인명사고가 발생하게 되면 책임문제가 돌아올 것을 우려하여 담당부서를 통해 병원 검진을 요구했다. 댜오위타이 파출소 경찰이 쑹차이훙을 데리고 후루다오 중심병원으로 가서 검진을 했다. 의사는 즉시 입원을 요구했으나, 수행한 경찰은 이를 거부하여 병원 측에서 진행하려던 제반 검사조차도 할 수 없었다. 쑹차이훙은 그대로 다시 유치장으로 보내져 감금됐는데, 이로써 쑹차이훙이 치료를 받아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됐다. 중공의 경찰 눈에 일반 국민들의 생명은 초개와 같이 무시되는 대상인 것이다.

1월 8일, 쑹차이훙의 몸은 점차 악화되어 늘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이미 어렵게 되자, 유치장 측에서 절차를 거쳐 가족에게 통지하여 쑹차이훙을 싱청시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했다.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 내장이 손상을 입어 음식물을 먹지 못하고 계속 토했으며 더구나 이런 상태를 장시간 방치하여 급성 요독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응급처치 후 위독하여 후루다오 313병원으로 옮겼으나 다음 날인 2012년 1월 15일 오전 7시경에 내과 신장 병동에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쑹차이훙은 사망했으나 큰 눈을 뜬 채 감지 못했다. ‘조화로운 성세’에서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음이라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는가? 젊은 딸을 먼저 보낸 78세의 부친은 딸을 잃은 아픔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 목 놓아 소리쳐 울었지만 딸은 대답이 없었다.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후루다오 일대에서만 20여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이 박해로 사망했다. 노동교양처분과 법원의 판결에 의해 박해당한 사람들의 수는 말할 수 없이 많다. 오늘날 중공 통치의 기형적인 사회에서 파룬궁수련자란 신분을 구비한 중국 국민에 대해 말하면, 보답을 위해서도 아니고 정치 권리의 쟁탈을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동네 사람들이 사악한 당과 함께 순장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위험과 곤란 앞에는 하나의 광명한 선택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마다 모두 미래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바른 믿음에 대한 박해는 모두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반드시 하늘의 징벌을 당할 것이다.이것은 신불(神佛)에게 선전 포고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고향 사람으로서의 당신, 당신의 살인자에 대한 한 마디의 질책은 모두 선량함에 대한 지지와 사망자에 대한 위로이며, 더욱 악도들이 두려워 떨게 하는 경종인 것이다.그러면 반드시 신불에게서 복을 받을 것이다.

멀쩡하던 생명은 바로 이렇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역사는 쑹차이훙을 살해한 이들 죄인들을 기억할 것이다. 주요 책임자는 장쥔펑(유치장 부소장), 자오리양(댜오위타이 파출소 부소장)이고, 참여한 악인들은 또 장리쥔(張力軍, 국가보안대대 부대장), 쑹창장(宋長江, 싱청 610주임) 등을 포함한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적덕필창(積德必昌) 여적덕불창(如積德不昌) 조상필유여앙(祖上必有餘殃) 앙진필창(殃盡必昌), 작악필멸(作惡必滅) 여작악불멸(如作惡不滅) 조상필유여덕(祖上必有餘德) 덕진필멸(德盡必滅)” 하다고 했다. 하늘의 이치는 공정한 바, 신목여전(神目如電)하다. 나쁜 짓을 저지른 악도는 언젠가는 법으로 제재를 당할 것이며, 그들을 기다리는 것도 꼭 하늘의 징벌일 것이다!

문장발표: 2012년 1월 31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31/25256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