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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즈화시 우수공무원 펑중량, 박해로 사망(사진)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쓰촨보도) 쓰촨성(四川省) 판즈화시(攀枝花市) 건설국 설계관리원 펑중량(馮忠良, 1963년 3월 출생)은 쓰촨성 난부현(南部縣) 출신으로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전문대학을 졸업했다. 파룬궁을 수련해 몸이 건강해진 그는 매사 업무에 적극적이었고 일체 부적절한 뇌물을 받지 않는 우수한 공무원이었다. 이미 3차례에 걸쳐 건설위원회로부터 최우수 선진 공무원에 선정된 바 있다.

冯忠良被迫害致死前的照片
박해로 사망하기 전의 펑중량(馮忠良)

펑중량은 2006년 여름에 시민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말했다는 이유로 중공(중국공산당)에 납치된 후 불법 판결을 받았다. 우마핑(五馬坪)감옥에 수감되어 박해로 그는 폐결핵에 걸렸다. 2009년 4월 28일 석방됐을 당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신체가 쇠약해져 있었고 호흡도 곤란한 상태였다. 시 인사국은 그의 수감 사실을 이유로 생계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게 된 그는 80세 부친이 살고 있는 고향 난부로 돌아갔다.

2011년 6월 6일(단오절), 향년 48세의 파룬궁수련생 펑중량은 억울하게 눈을 감았다.

1. 이틀 밤낮으로 고문을 받아 심신에 손상을 입다

2006년 여름, 업무상 방문한 시 임업국 스(石)씨를 접대하던 펑중량은 그에게 파룬궁 진상자료 한 부를 건넸다. 그러나 스(石)씨는 이 사실을 책임자에게 보고했고, 임업국의 책임자는 시 정부에 보고했다. 그의 진상자료는 곧 시 공안국에 보고된 후, 옌볜현(鹽邊縣) 공안국까지 보고됐다.

옌볜현 공안국 국장은 10여 명을 대동하고 펑중량을 납치해 시 공안국 사무실 2층에 감금한 후 박해를 가했다. 그날 저녁, 경찰은 진상자료의 출처를 요구하며 펑중량의 두 손을 거꾸로 채워 사무실 책상 다리에 채워 놓았다. 쭈그려 앉을 수밖에 없었던 그를 경찰은 강제로 옷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갑자기 다리와 허리에 극렬한 통증을 느낀 펑중량은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주저앉았다. 이런 그에게 경찰은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7~8명의 청장년 경찰들이 번갈아가며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펑중량을 박해했다.

다음날 오후, 펑중량은 이마에 궤짝을 올린 채, 몸을 지면과 45도 경사진 자세로 있게 했다. 펑중량이 다리를 떨며 서 있지 못하자, 기마자세로 쭈그려 앉힌 후 나무 막대로 그의 손과 발을 구타했다. 경찰은 몸이 떨리고 체력이 한계에 다 달아야만 그를 앉게 했다.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한 경찰의 이틀 밤낮에 걸친 고문으로 펑중량은 심신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2. 경제박해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다

펑중량은 이틀에 걸친 고문을 당한 후 판즈화(攀枝花) 완야오수(彎腰樹) 구치소로 이송돼 불법으로 감금당했다. 불법 수감에 놀란 가족들은 변호사를 선임했으나 변호사에게 몇 만 위안을 사기당했다. 펑중량은 가족이 그리운 마음에 수련을 포기한다는 이른바 ‘보증서’에 서명을 했다. 그럼에도 징역 3년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받은 그는 현지의 빙차오강(炳草崗) 파출소에 인계됐다. 겨우 집으로 돌아오게 된 그에게 직장에서는 보직을 변경해 창고를 지키게 했지만 월급은 지급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이른바 ‘범죄자 상황보고’를 위해 빙차오강 파출소를 방문해야만 했다.

같은 해 가을, 펑중량의 아내는 매일 매일의 정신적 압박과 경제적 압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와 이혼했다. 아내는 모든 재산과 아이 양육권까지 인정받았다. 결국 펑중량은 어쩔 수 없이 과쯔핑(瓜子坪)에서 세를 살 수 밖에 없었다.

9월 하순, 빙차오강 파출소와 과쯔핑 파출소는 그의 집을 수색하고 파룬따파 자료와 대법 사진을 압수하고 펑중량을 판즈화시 완야오수 구치소로 납치해 불법 감금했고 쓰촨성 러산시(樂山市) 무촨현(沐川縣) 우마핑감옥으로 이송했다.

3. 감옥에서 박해당해 폐결핵에 걸리다

눈과 얼음이 대지를 덮은 한 겨울에 그는 우마핑 감옥 임감대(入監隊)에 수감됐다. 교도관들은 매일 강제로 얇은 옷을 입힌 채 밖에 세워두거나 혹은 부동자세로 15~17시간 동안 앉아 있게 했다. 펑중량은 고열로 갈증과 어지러움을 호소했고, 한기에 몸을 떨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밥을 넘기지 못하자 교도관들은 물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저녁 9시 이후에도 맨땅에 앉아 감옥규정을 외워야 했으며, 11시가 넘어서야 침대에 누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교도관은 사악한 중공의 당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했고, 부르지 않을 경우 배식을 중단했다. 펑중량은 늘 선임수감자인 장원밍(張文明), 뤼슝차오(吕雄超), 후다젠(胡大健)로부터 구타와 세워두기 고문을 당했다.

마중량은 2개월간의 박해를 당한 뒤, 또 2감 구역으로 이송됐다. 펑중량은 박해로 한 달 동안 고열에 시달렸고, 끊임없이 기침을 하며 힘이 없어 걷지도 못했다. 2006년 말, 2감 구역 담당 의사는 폐결핵 진단을 내렸다. 교도소는 그가 노역을 할 수 없고 병이 중해지자 그를 1감 구역 병원으로 이송해 격리한 후 박해했다.

펑중량은 강제로 마스크를 쓴 채 링거를 맞고 약을 먹어 생명이 위독해졌다. 결국 다른 파룬궁수련생이 강력히 항의하자 펑중량을 젠웨이현(犍委縣)감옥 병원으로 이송해 계속 박해했다.

펑중량은 병원침대에 강제로 두 발을 묶인 채 산소마스크를 쓰고 링거를 맞았다. 죄수 양(楊)씨는 늘 그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 저녁에도 여전히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결국 펑중량은 침대에서 내릴 힘도 없을 정도로 박해 당했다. 10개월 후 다시 우마핑감옥 1감 구역으로 이송됐다.

1감 구역 입구에 도착한 그를 교도관들은 다른 죄수에게 지시해 입에 마스크를 씌워 말할 힘도 없고 숨쉬기도 극도로 곤란해 하는 펑중량을 경찰차에서 끌어 내렸다. 죄수들은 또 그를 강제로 2층 침대의 윗층에서 잠을 재웠고 직접 소독기를 쐬게 했다. 감방 안에서는 죄수 양씨와 황융(黄勇), 황밍(黄明)에게 폭행을 당했고, 그들은 그가 아래 침대에서 밥을 먹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약을 먹지 않으면 매일 당신을 괴롭히겠다.’며 협박했다. 잡범 양밍은 연속 10일간 몽둥이로 펑중량을 구타하기도 했다.

펑중량이 침대 위에서 연공을 하면, 죄수는 담배꽁초로 그의 발을 지졌고, 그의 머리에 냉수를 끼얹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찬바람을 쐬게 했으며, 흉악한 표정으로 대법을 욕했다.

어느 날 저녁, 죄수에게 폭행당한 펑중량은 매우 괴로워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침대에서 일어난 죄수 황밍은 펑중량의 가슴을 심하게 발로 찼다.

죄수 황밍은 나중에 보응을 받은 뒤에야 대법의 진상을 믿게 됐고, 죄수 양씨와 황융은 약을 먹지 못하게 된 펑중량으로부터 폐병이 전염되는 보응을 받았다.

4. 3년 옥살이에 모든 것을 잃은 후 억울하게 세상을 뜨다

2009년 4월 28일, 3년의 옥살이를 당한 펑중량은 호흡도 곤란하고 걷지도 못한 상태에서 석방됐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그는 80세 부친이 있는 고향 난부로 돌아가 살 수 밖에 없었다. 판즈화시 인사국에서는 그가 수감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그에게 생활비를 지급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년 8월 펑중량의 병이 위중해 졌고, 병원은 폐기중, 폐결핵, 기관지염 진단을 내렸다. 판즈화시 인사국은 이 기회를 이용해 그를 회유하여 ‘반성문’을 쓰게 한 후에야 매달 225위안의 최저생계비를 지급했다.

2011년 상반기, 펑중량은 누구의 간호도 받지 못한 채 판즈화시 제4인민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를 병문안 온 친구에게 병원 간호사와 간호책임자, 주민위원회와 ‘610’(간호사와 간호책임자가 주민위원회와 ‘610’에 전화로 통보함)은 제재를 가했다. 신분증을 제시하게 했고 방문기록을 쓰게 했다. 이 기간 병원을 찾아 온 사회구역, 거민위원회 위원과 펑중량의 사촌은 그에게 이른바 ‘반성문’을 써야만 그의 집을 되찾아 주고 최저생계비를 지급한다고 회유했다. 펑중량이 ‘반성문’을 쓰지 않자 그의 사촌과 주민위원회 위원들은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2011년 6월 6일(단오절) 펑중량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역주 : 박해에 참여한 관련 기관 및 명단, 연락처는 원문을 참조 바람.

문장발표: 2011년 12월 27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2/27/2510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