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랴오닝보도) 랴오닝(遼寧) 진저우시(錦州市)의 후펑쿠이(胡鳳奎)는 두 차례 노동교양 박해를 받고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채 결국 2011년 7월 7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억울함에 두 눈을 감지 못했다.
1996년 후펑쿠이는 오랫동안 치료받아도 완치되지 않던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뇨, 저칼륨혈증(低血鉀), 건선 등 여러가지 질병을 앓던 그가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을 시작한 지 3일째부터 빠른 속도로 병이 낫기 시작했고 병원에 가지 않게 되어 많은 의료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개인은 물론 국가에도 큰 이득이었다.
1999년 7월 중공의 사악한 무리가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 후, 톄젠(鐵建)주민위원회, 진저우시 류화파출소 경찰이 늘 그의 집을 찾아가 수련을 방해했다. 파룬궁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은 후펑쿠이는 2000년 6월 박해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수차례 베이징에 청원했고, 이 과정에서 세 차례 체포되어 불법 구류된 그는 이후 총 4년 간 두 차례 노동교양을 받았다.
후펑쿠이는 베이징에 청원했다는 이유로 불법납치를 당해 진저우 유치장에 수감됐다가 단식으로 6일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20일 후 류화파출소 경찰 가오펑팅(高鳳廷)이 아무런 절차도 없이 그를 납치해 제2구치소에 수감했다. 그는 2개월 후 3년의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고 진저우 노동교양소로 이송됐다. 그 곳에서는 모든 파룬궁수련생에게 강제 세뇌와 잔혹한 고문을 가하며 대법수련을 포기하도록 핍박했다. 노인은 14개월 간 노동교양소에서 불법 감금됐다 풀려났다.
2002년 6월 어느 날 오후 후펑쿠이 집 앞에 경찰차 몇 대가 들이닥쳤다. 후펑쿠이를 연행하기 위해 차에서 내린 20여 명의 경찰들은 건물을 완전 포위했다. 경찰은 단지 조사할 것이 있다며 문을 열라고 했다. 간단한 조사라면서도 20여 명의 경찰이 출동한 것을 이상하게 여긴 후펑쿠이 가족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정법위원 쑨즈안(孫治安)이 강제로 문을 열어 가족들과 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였고, 화가 난 경찰들은 문을 부수려 했다. 가족들이 문에 쇠파이프를 꼽고 오랜 시간 완강히 저항하자 잠복을 위한 경찰 몇 명만을 남겨 둔 채 모두 철수했다.
이 일이 있고 후펑쿠이는 한 달간 외출할 수 없었다. 계속된 잠복에도 그를 체포하지 못하자 경찰들은 그의 직장 ‘철도 셴차오(線橋) 공정단(工程段)’ 책임자에게 후펑쿠이의 양로금 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다급해진 후펑쿠이가 직장을 방문할 때 납치할 생각이었던 경찰의 계획과는 달리 후펑쿠이는 부당함을 진정하기 위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 그러나 베이징에 도착도 하지 못하고 진저우 ‘610’에 납치된 후펑쿠이는 3년의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받고 또 다시 진저우 노동교양소에 수감되어 박해받았다.
수감 후에도 대법수련을 계속 견지한 후펑쿠이는 진저우 노동교양원 2대대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악독한 경찰 한리화(韓利華), 펑쯔빈(馮子賓), 장춘펑(張春風), 리쑹타오(李松濤), 장자빈(張加彬), 양팅룬(楊庭倫), 무진성(穆錦生)은 후펑쿠이의 손을 스팀난로에 묶고 번갈아 가며 서지도, 앉지도, 잠을 잘 수도 없게 고문했다.
2002년 가을, 그가 끝내 전향하지 않자 다시 2대대에 보내졌다. 악독한 경찰 장춘펑은 그의 나이가 많다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장춘펑은 다른 경찰과 함께 후펑쿠이의 손을 스팀난로에 묶고 또 다시 서지도, 앉지도, 잠을 잘 수도 없게 고문했다. 악독한 경찰 궈성청(國升曾)은 그에게 “원장이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회의에서 말했다. 때려서 상처를 입던 불구가 되건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며 그를 협박했다.
노동교양소의 교도관은 후펑쿠이를 책상으로 밀치고 전기봉을 강제로 만지게 했으며 0.3평 크기의 타일에 쪼그려 앉히고 장시간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가했다.
2005년 말 석방되어 집에 돌아온 후펑쿠이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무엇보다 오랜 강압적인 생활은 그에게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혀 회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그러나 그는 출소 후에도 계속 파룬궁을 수련해 약간의 건강을 회복하기도 했지만 오랜 수감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늘 두려움 속에 불안하게 지내던 후펑쿠이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문장발표: 2011년 12월 10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2/10/2503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