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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보면 용감히 뛰어 들다’를 말해 보자

글/ 대륙 파룬궁 수련생

[밍후이왕] 옛 사람은 ‘정의로운 일을 보고도 행하지 아니함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 (논어-爲政)고 여겼다. 선량한 사람은 모두 정의로운 일에 봉착하면 용감히 뛰어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정의로운 일을 보고 용감히 뛰어드는 것은 전통적인 고상한 풍격으로 널리 발양해야 한다. 이는 문명의 정신적 동력이다. 하지만 오늘의 중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일을 보고 용감히 뛰어 들었다가 오히려 억울함을 당하거나, 심지어 사취, 협박을 당하여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의로운 일에 선뜻 나서는 것에 대해, 의기소침해 하던 데로부터 나서야 할지를 의심하기 시작 하였다.

한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하나의 예가 있다. 한 젊은이가 차에서 내린 후 어떤 할머니가 땅에 넘어진 것을 보고 얼른 다가가서 부축해 주었는데, 잠시 후에 다른 한 중년 사나이도 다가와 함께 그 할머니를 부축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계속 감사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함께 할머니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다음은 180도로 반전되고 말았다. 할머니와 그 가족들은 부축해 줬던 젊은이가 다치게 한 것이라고 덮어씌우고 생사람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시비를 가리던 중에 그 가족들은 결국 젊은이를 사직당국에 고발했고, 법원에 의해 13만여 위안(약 2400만원)의 배상금을 물게 했다. 이것은 중국사회의 현실로, 말 그대로 ‘농부와 뱀’의 격이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런 부면적인 행위의 사건들이 중국대륙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노인이 실신하여 땅에 쓰러져 15분이 지나도록 구경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누구 한 사람도 감히 그를 살펴보거나 도우려 하지 않았다.’ 이 일은 푸쩌우(福州) 교통로 푸잰(福建)의과대학 부근에서 있었던 일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92세 된 할머니가 난징 해방남로 보도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을 때, 그 옆을 지나며 오가는 행인들은 많았으나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을 도와주려고 잘못 건드렸다가 피해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런 무관심의 비정한 세태로 변해,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목숨을 잃게 되는 지경으로 사회상태가 발전한 것이다. 노인 또는 어린이가 위험에 노출되어도 감히 누구도 도우려는 사람이 없다. 이는 모두 도와주려다 잘못되면 오히려 피해를 본다는 생각에 명철보신(明哲保身)의 무관심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뒤집어 쓸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득불 이해를 따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좋은 마음이 좋은 보응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 재삼재사 생각하고 주저하다 결국 조용히 현장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깊이 고려하는 마음도 없이 정의로운 일을 보고도 용감히 뛰어드는 사람은 아주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란 이 황량한 땅 위에는 정의로운 일을 보고 감히 뛰어드는용감한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물론 있다. 뿐만 아니라 몇 사람만이 아닌 몇 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십여 년 동안 줄곧 모함과 박해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속에 도의를 고수하면서, 정의로운 일을 보고 용감히 뛰어드는 자비롭고 선한 일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파룬궁 수련자들이다.

1999년 중공(중국공산당)이 불법적으로 파룬궁 탄압을 시작한 이래, 폭력으로 선량한 파룬궁 수련자를 진압했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로 모든 중국 사람을 기만하였다. 파룬궁에 대한 모든 선전은 모두 악의적인 비방, 함부로 된 왜곡이었다. 중공 언론 매체들의 사악한 선전으로 인해 수많은 중국 사람들이 파룬궁에 대한 인식이 모두 부정적이고, 심지어 원한으로 충만 되어 중상모략에 맹종하면서 수련자들을 박해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모두 ‘3무1종(三武一宗)’의 멸불(滅佛) 사건을 알고 있을 것이다. 부처를 소멸시킨 황제 네 사람은 모두 악보를 받아 종말은 몹시 처참하였고, 모두 명이 짧았다. 아울러 나라에는 전란 등으로 멸망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사람이 끝없는 지옥의 고생을 당하지 않으려면, 정법을 함부로 비방하지 말아야 하고, 수련인을 박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중공은, 가짜 선전으로 중생을 기만하여 불법을 헐뜯게 하고 박해하게 하여 하늘에 죄를 짓게 하는가? 안 된다. 자비를 가슴에 품은 사람이라면 모두 일어나, 중공의 거짓말에 독해된 중생들에게 진상을 분명히 알려, 자각적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도록 하여 암흑에서 걸어 나와 광명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구도해야 할 것이다. 거짓말이 하늘과 땅을 뒤 덮을 때 언제나 용감히 일어나서 명백한 사실의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인데,바로 이것이 정의로운 일을 보면 용감히 뛰어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엄중한 박해 속에 있으면서도 남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룬궁 수련자는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진상을 알려서 진실을 밝히는 책임을 짊어졌다. 그들 수련자들은 ‘진선인(眞善忍)’을 숭상하고 행동으로 남을 배려하며, 진실한 말을 하며 참고, 양보하는 대범함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만의 파룬궁수련생들은 이처럼 진상을 알리거나, 알렸다는 이유로 참혹한 박해를 당했다. 어떤 사람은 체포되고, 어떤 사람은 불법 노동교양처분을 당하거나 징역형을 당했으며, 어떤 사람은 고문당해 신체를 훼손당하고, 병들거나 죽었으며, 심지어 생체 장기 적출을 당하며 죽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겁에 질려 쓰러지지 않았으며, 위축되지 않았다. 진상을 알리기 전에 득실을 따지거나 사전사후를 가늠하는 사람이 없었다. 추호도 주저하거나 흔들림 없이 오직 도의에 따라 행했다. 진(眞)을 수련하니 거짓말이 넘쳐날 때 진상을 알려야 하고, 선(善)을 수련하니 위난에서 자신을 잊고 남을 구해야 하며, 인(忍)을 수련하니 치욕과 고난을 참아 가며 진상을 알리는 무거운 책임을 맡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어찌 슬프지 않으리! 어떤 사람은 중공의 사악한 선전에 너무 깊이 독해되어, 정의로운 일에 용감히 뛰어든 수련생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며,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하고, 모함하고, 납치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동기가 나쁘기도 하고 또 다른 심보를 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일은 온 몸에 상처투성인 수련자의 몸에 소금을 뿌리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 따위 배은망덕한 소인들의 비루함은, 정의로운 일을 보면 용감히 뛰어드는 자비로움과는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자신의 양심을 반성할 때인데,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위험을 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수방관하고 못 본 척 하겠는가? 아니면 정의로운 일에 선뜻 나서서 용감하게 뛰어들겠는가? 바로 이 파룬궁 수련생들이 가장 훌륭한 답안을 주었다. 설령 모함과 체포, 고문과 시달림에 직면한다 하더라도 추호의 주저도 없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정의로운 일에 용감히 뛰어드는 수련자는 무사무외(無私無畏)하며 악을 제약하고 선을 발양할 것이다. 그들은 비록 잠시 억울함과 잔혹한 박해를 당하고 있긴 하지만 나중에는 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깨우쳐 줄 것이며, 기만당한 세인을 구도해 줄 것이다.

문장발표 : 2011년 11월4일
문장분류 :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1/4/248650.html

 

 
문장발표 : 2011년 11월4일
문장분류 : 시사평론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1/4/2486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