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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까이 감옥살이한 창춘 텔레비전 방송 삽입자 쑨창쥔 긴급 구원요청 (2)

[밍후이왕] (밍후이왕 대륙 통신원, 밍후이왕 기자 연합보도) 2002년, 국내외를 놀라게 한 창춘 유선 텔레비전 방송 삽입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가까이 되었다. 파룬궁 진상방송 삽입에 참여한 이들 중 5명은 중공의 잔혹한 박해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겨우 26살이었던 쑨창쥔(孫長軍)이 지린(吉林)감옥에 수감된 지도 이미 9년이 넘었는데, 잔혹한 박해로 생명위험에 부딪히기도 했다.

쑨창쥔은 10년 가까이 감옥에서 박해를 당했다. 호랑이 의자에 앉기, 고압 전기 몽둥이로 전기 충격 당하기, 갈비뼈가 부러지고 엄한 관리를 당하는 등 잔혹한 박해로 폐결핵, 흉막염결핵, 복막염결핵, 가슴과 복부에 물이 차는 등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중공 ‘610’과 경찰 측은 보석을 거절하고 있다. 지금 잠시 약간 호전을 보이긴 했지만 각계의 시급한 구출을 요하고 있다.

(前文 링크 : 10년 가까이 감옥살이한 창춘 텔레비전 방송 삽입자 쑨창쥔 긴급 구원요청 (1))

‘분신자살’은 사실 속임수이다

2001년 1월 23일 섣달 그믐날, 천안문 광장에는 유람객이 별로 없었다. 신화사 보도에 따르면, 오후 2시 41분, 인민영웅기념비 북동쪽에서 왕진둥(王進東)이 먼저 몸에 불을 붙이자 경찰 4명이 즉시 소화기를 들고 1분도 안 돼 재빨리 불을 껐다. 몇 분 후에 여자 4명이 기념비 북쪽에서 몸에 불을 붙이자 또 1분이 좀 넘어 불을 껐는데, 전 과정은 7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중 한 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4명이 화상을 입었다. 중공 대변인 매체는 이 사람들은 파룬궁수련생이며 원만(圓滿)하여 승천하려고 천안문 광장에서 분신자살 했다고 보도했다.

사건 발생 후, 외부에서 수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파룬궁은 불법(佛法)수련으로서 살생과 자살을 금지한다는 법리가 명확한데, 진정한 파룬궁수련생이라면 어찌 분신자살을 할 수 있겠는가? 천안문 광장의 경찰은 소화기를 메고 순찰하지 않는데, 어떻게 즉시 그렇게 많은 소화기를 꺼낼 수 있었는가? 게다가 평소에 보이지도 않던 불 끄는 담요가 즉시 그렇게 많이 나타났다.

CCTV의 ‘분신자살’녹화를 느린 동작으로 분석한 결과 많은 허점이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류춘링은 타 죽었나 아니면 맞아 죽었나이다. 영상 속의 경찰이 소화전으로 류춘링의 몸에 붙은 불을 꺼 주는 장면이 보이는데, 느린 화면으로 보면 불을 끌 때 어떤 물체가 류춘링의 머리를 쳐 그녀가 두 손을 허우적거리다 갑자기 쓰러졌다. 그리고 또 류춘링의 몸에서 길쭉한 물건 하나가 재빨리 튕겨져 나가는 것도 발견됐다. 그 장면을 정지시켜서 보면, 머리 부근에서 팔을 허우적거렸고 외투를 입은 남자가 바로 손을 꺼내들고 타격한 위치에 서 있는데, 1초 전에 힘을 쓴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류춘링은 불에 타 죽었는가 아니면 현장에서 맞아 죽었는가?

분신자살이 발생한 후 얼마 안 되어 워싱턴포스트지 기자가 류춘링이 살던 허난 카이펑(河南開封)에 취재를 갔다. 그런데 이웃들은 류춘링이 파룬궁 수련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류춘링은 외지에서 왔으며 노모와 12살 된 딸이 있었고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으로서 술집에서 막일을 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늘 모친과 딸을 때렸다고 한다. 이런 것은 모두 진정한 파룬궁수련생의 행위가 아니다.

CCTV의 분신자살 프로그램 화면에는 또 ‘왕진둥’의 현장 특집기사가 있는데, 그가 아주 또렷하게 외치는 구호를 들을 수 있고, 또 경찰이 불 끄는 담요를 들고 여유롭게 기다리다가 왕진둥의 연출이 끝나자 그제야 담요를 왕 씨의 머리에 덮는 장면이 있다. 분신자살은 원래 돌발 사건인데 이런 특집 장면과 구호를 녹음한 자체가 바로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집 장면에 아주 뚜렷한 허점이 있었는데, 왕진둥의 옷은 타서 너덜너덜했지만 그의 두 다리 사이에 끼인 휘발유를 가득 담은 플라스틱 스프라이트병은 멀쩡했다.

생사를 내려 놓고 진리를 견지

거짓말이 폭로되고 세인이 각성하는 것을 중공 독재 통치자는 가장 무서워한다. 창춘 삽입방송의 성공과 광범위한 영향에 장쩌민 일당은 극도로 두려워 ‘철저히 없애 버리라’는 밀령을 내렸다. 이어서 검은 구름이 도시를 짓누르고 창춘 파룬궁수련생 5천명이 불법체포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잔인한 혹형을 당하였다. 대대적인 체포 중에 적어도 7명이 맞아 죽었는데, 그 중에 이미 이름이 확실하게 밝혀진 사람들은 류하이보(劉海波, 남, 34, 의사), 리수친(李淑芹, 여, 54), 리룽(李容, 35, 지린대학 졸업), 허우밍카이(侯明凱, 남, 35), 류이(劉義, 남, 34)이다.

酷刑演示:电棍电击
혹형시연 : 전기충격

2002년 9월 19일, 중공은 재판을 열어 진상 삽입방송에 참가한 파룬궁수련생을 불법으로 판결했다. 법정에 들어선 파룬따파 제자 15명이 ‘파룬따파는 좋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정법이다(法輪大法是正法)!’를 끊임없이 높이 외치자 악경들은 극도로 겁에 질려 허둥거렸다. 처음에는 두 경찰이 한 명을 지키다가 나중에는 셋이서 한 명을 지켰는데, 팔 하나에 경찰이 한 명씩 달라붙었다. 당시에 어떤 경찰은 졸도까지 했기에 10분에 한 번씩 바꾸던 것을 3~5분에 한 번씩 교체했는데, 법정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악경들은 전기곤봉 몇 십 개로 수련생 몸의 민감 부위를 돌아가며 전기 충격을 가하였지만 광적인 박해에도 여전히 견정하게 ‘파룬따파는 좋다‘를 외쳤다. 현장에서 이 정경을 듣고 본 많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2002년 10월 25일, 삽입 방송에 참가한 남자 파룬궁수련생 11명이 지린감옥에 보내졌고, 여자 파룬궁수련생 4명은 지린성 여자 감옥, 즉 헤이쭈이쯔(黑嘴子)여자 감옥으로 보내졌다. 지린 감옥은 극한을 초월하는 각종 사악한 방식으로 그들을 잔혹하게 괴롭혔다. 9년 동안의 박해에 남자 파룬궁수련생 4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바로 류청쥔(劉成軍, 03년 당시 34), 웨이슈산(魏修山, 04년), 레이밍(雷明, 06년 당시 35), 량전싱(梁振興, 2010년 당시 46)이었다. 윈칭빈(雲慶斌)은 박해로 정신이상에 걸렸는데, 지금 지린감옥 8감구 전향반에 수감돼 있다.

2002년 8월 말, 쑨창쥔은 악경에게 납치돼 이틀간 호랑이 의자에 앉는 고문을 당했다. 재판이 열렸던 9월에 대법을 위해 있는 힘껏 변호하다가 고압 전기곤봉으로 곳곳에 전기충격을 당했다. 2002년 10월 25일에 지린감옥으로 보내졌고, 그 날 저녁에 늑골 한 대가 부러졌다. 2003년 말, 신념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70일간 박해를 당해 20kg이상이 빠졌다. 2005년에는 폐결핵으로 양쪽 폐에 공동이 생겨 피를 토했는데도 감옥 측은 보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7년~2009년까지 병은 계속 악화되었다. 폐결핵, 흉막염결핵, 복막염결핵, 가슴과 복부에 물이 찼으며 뼈만 앙상하고 배는 북처럼 컸다. 지린감옥은 쑨창쥔이 믿음을 견지하고 ‘5서’를 쓰지 않는다며 가석방을 거부하고 있다. 소식에 따르면, 지금 약간 호전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위험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酷刑演示:老虎凳
혹형전시 : 호랑이 의자

추억

그 해에 진상 방송 삽입에 참여했던 파룬궁수련생 15명 중 5명이 이미 박해로 사망하였다. 수련생들은 그들의 웃음 띤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류청쥔은 몸집이 웅장하고 목소리가 종처럼 우렁찼으며 수련에 매우 정진했다. 수련생들은 여러 사람이 함께 법공부하면서 책을 읽을 때면 그가 글 읽는 속도가 평온하여 아주 듣기 좋았다고 기억한다. 류청쥔은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찍으며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여러 번 노동교화소에 갇혔으나 사악의 박해에 종래로 굴복한 적이 없었다. 이런 류청쥔에게도 다른 한 면이 있었는데, 한 번은 수련생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으로 아들 모한(默涵)을 데리고 왔다. 당시에 아들은 겨우 대여섯 살이었는데, 밤에 아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면서 잠을 재우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刘成军因插播法轮功真相电视节目遭严酷迫害,年仅三十二岁
파룬궁 진상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을 삽입한 뒤 잔혹한 박해를 당하여 사망했을 당시 류청쥔은 겨우 32살이었다.

류청쥔은 1년 9개월간 감옥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해 2003년 12월 26일에 창춘 지린대학 중일(中日)친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梁振兴在遭受了近十年、四个中共监狱的残酷迫害后,于二零一零年五月离世
량전싱은 네 곳의 감옥에서 10년 가까이 잔혹한 박해를 당하고 2010년 5월 사망했다.

 

梁振兴在遭受了近十年、四个中共监狱的残酷迫害后,于二零一零年五月离世
량전싱은 네 곳의 감옥에서 10년 가까이 잔혹한 박해를 당하고 2010년 5월 사망했다.

梁振兴在遭受了近十年、四个中共监狱的残酷迫害后,于二零一零年五月离世
량전싱은 네 곳의 감옥에서 10년 가까이 잔혹한 박해를 당하고 2010년 5월 사망했다.

량전싱은 말을 상냥하게 하고 늘 싱글벙글 했다. 사람들에게 진상을 더 많이 알리려고 종일 바삐 보냈다. 그는 2010년 5월 1일, 궁주링(公主嶺) 감옥 내 경찰의 감독 하에 궁주링 중심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레이밍은 쑨창쥔과 동갑이며 성숙하고 노련했다. 방송 삽입 장소를 선택할 때, 한 곳은 방송국과 아주 가까웠으나 전봇대에서 해야 했으므로 잘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이 제일 좋았기에 하지 않는다면 창춘 시민 절반을 빠뜨리게 되는 것이었다. 레이밍은 험난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동적 그곳을 택하였다. 그러나 삽입과정에 악인이 선을 찾아 길에서 장원(張聞), 레이밍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레이밍은 장원을 밀고 자신이 악도를 마주했다. 그는 결국 납치를 당했으며, 잔인무도한 각종 고문을 당해 2006년 8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雷明,时年三十岁,因插播讲真相,被迫害致残、致死
레이밍은 당시 30살이었으며, 삽입방송으로 진상을 알려 박해로 불구가 된 후에 사망하였다.

화뎬(樺甸) 파룬궁수련생 웨이슈산은 지린감옥 7감구에서 고문당해 2004년에 사망했다.

허우밍카이는 2002년 8월 창춘에서 납치당했고, 이틀 사이에 악경에게 맞아 35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증인에 따르면, 2008년 8월 20일, 지린시 610과 국보대대가 허우밍카이와 그 외 수련생 세 명을 붙잡았다. 그 날 밤에 허우밍카이를 수감한 방에, 적어도 경찰 십여 명이 모여 들어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우밍카이는 아주 견강(堅強)하여 한 마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떤 악경은 때리다 지치면 다른 방에 가서 쉬면서 사람을 때리고 무슨 혹형을 사용하던 모두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고 했다. 후에 다른 경찰들이 그 방에 많이 모여 들었고, 그 사이에 사람을 때리는 소리와 욕설이 끊임없이 들려 왔다. 반시간도 되기 전에 악경들이 “허우밍카이는 끝장났어. 안 되겠다(죽었다는 의미임).”라고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 때는 8월 21일 새벽 3~4시경이었다.

侯明凯的身份证复印件
허우밍카이 신분증 복사본

끝맺는 말

중공 장쩌민 집단은 파룬궁을 박해하면서 정직하고 선량한 1억의 수련자에 대해 ‘명예를 실추시키고, 경제를 파탄시키며, 육체를 소멸시킨다’, ‘때려죽이면 때려죽인 것이고, 때려서 죽으면 자살로 처리하라’는 인성을 상실한 박해를 감행하였는바, 법조계 인사들은 이를 두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인권재난’이라 했는데, 또한 중국 대륙이 당한 최대의 민족 재난이다.

전에 없던 잔혹한 박해에 직면하여 억만의 파룬궁수련생들은 믿음을 굳게 지키고, 세계는 ‘진선인(眞善忍)’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굳게 믿으면서 굳센 참음과 이성으로 고통을 감당하고, 심지어 피와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면서 진상을 전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 민중의 알 권리를 수호하고 더 많은 중국 사람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국내외 선량한 사람들이 긴급 동원되어 진상을 알고 파룬궁수련생들과 함께 쑨창쥔을 비롯한 불법수감 된 모든 파룬궁수련생을 구출하고, 중국인을 도와 ‘진선인’ 믿음을 되찾아 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히 하며 도덕이 승화될 권리를 되찾아 오기를 호소한다.

(全文 끝)

문장발표 : 2011년 10월 21일
문장분류 : 박해진상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10/21/24817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