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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 눙안현 위창리 박해받아 사망, 양수메이 생명 위독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지린성보도) 2011년 5월 2일, 눙안현(農安縣)구치소에 불법 감금돼 있던 위창리(于長麗)와 양수메이(楊淑梅)는 창춘시(長春市) 지린대학 제2병원[런민(人民)광장 인근] 응급실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44세의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당시 양수메이는 의식이 없었고 건강 또한 극도로 위독한 상태였으며, 수 명의 경찰이 그녀를 감시했다고 한다.

위창리, 양수메이가 박해당한 과정

눙안현 파룬궁수련생 위창리와 장단펑(張丹鳳)은 2010년 5월 13일 진상을 알리다 미행, 납치된 뒤 국가보안대대와 구치소에서 박해받았으며, 위창리는 창춘 제3구치소로 이감돼 갔다.

2011년 3월 5일 위창리는 창춘 제3구치소에서 눙안현구치소로 다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2011년 3월 2일 불법 체포당한 수련생 양수메이, 장단펑과 함께 단식으로 박해를 반대했다.

중공(중국 공산당)의 이른바 ‘양회’ 전후, 지린성 눙안현공안국 국가보안대대, 반공(反恐)대대는 양수린향(楊樹林鄕)파출소와 합작해 2011년 3월 2일 저녁 5시에 수련생 양수메이 집으로 무단 침입했고, 맨발인 채로 곧장 수갑을 채운 뒤 납치해 갔다.

3월 4일과 7일, 양수메이 가족은 공안국으로 2번 찾아가 그녀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공안국은 각종 핑계를 대다 도리어 그들을 위협했다. 양수메이의 시어머니(80여세)와 일행 6명이 공안국 건물에 들어가 공안국 국가보안대대 사무실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다 건물 복도에서 양수메이를 납치했던 한 흉악한 경찰을 보았다. 양수메이의 시어머니는 그에게 “우리 며느리를 어디로 붙잡아 갔소? 파룬궁을 연마해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이오. 집에는 또 팔순 시아버지가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살고 있소! 내 둘째 아들 왕치보(王啓波)도 쳰궈현(前郭縣)에서 불법 판결 받아 지린감옥에서 박해받다 죽었는데 당신들은 또 나의 작은 며느리마저 붙잡아갔소. 우리 며느리가 안에서 무슨 고문이라도 받다가 변고라고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것이오?” 흉악한 경찰은 “우리는 사람을 체포하는 것만 책임질 뿐이다. 당신 며느리는 이미 형사구류(刑拘) 받았다.”

3월 15일 경찰은 양수메이를 지린성감옥 관리중심병원(管理中心醫院, 지린성노개(勞改)병원)으로 보냈다. 3월 16일, 양수메이의 아들과 딸, 조카딸과 시어머니는 공안국으로 가서, 구치소에 수감된 양수메이의 석방을 요구했다. 눙안현공안국에서는 그녀를 풀어주기는 커녕 도리어 양수메이의 네 가족을 구류했다.

3월 31일 양수메이는 눙안현 구치소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구류된 상태다.

4월 11일 양수메이와의 면회를 요청하자 눙안현구치소 소장 류카이(劉凱)와 흉악한 경찰은 양수메이 가족에게 대법을 비난해야 만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 가족은 원래 몸무게가 70여kg이던 양수메이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는데, 손은 자색이었고 발에는 5kg 넘는 무거운 쇠고랑이를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기운이 없어서 말을 해도 힘들어보였고, 매일 침대에서 강제로 6번씩 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특수 경찰이 총을 든 채 24시간을 지키면서 꼼짝도 못하게 했다. 움직이기만 해도 곧 총을 잡고 공갈 협박을 했다.

2011년 5월 2일 위창리는 결국 박해받아 사망했고, 양수메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면회를 요구하던 양수메이 가족, 무자비하게 폭행당해

5월 4일 오전 9시, 양수메이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그리고 조카는 그녀의 석방을 요구하러 다시 현 공안국으로 갔다(조카는 양수메이의 시아버지를 업고 있었다. 노인은 이미 걸을 수 없었다). 윗 층으로 올라 가 한 경찰에게 국가보안대대 대대장 탕커(唐克)를 찾자 “탕씨가 없다”고 해서 국장을 찾자 그도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민원실 옌(闫)씨를 만났을 때 시아버지는 “우리 며느리와 함께 갇혔던 한 수련생이 이미 박해받다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 며느리도 당신들이 창춘시 지다2원(吉大二院)에 가두었는데 지금 어떻게 됐나? 며느리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자 옌씨는 “당신의 며느리는 지금 눙안현구치소에 있고, 이미 밥을 먹었다”고 했다. 그래도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눈으로 확인해야 믿겠다”고 하자 옌씨는 “사건을 이미 검찰원으로 넘겼다.”고 했다. 그래서 노인은 상황을 똑똑히 파악하기 위해 검찰원으로 갔더니 “오늘 이미 법원으로 넘겼다.”고 했다. 그래서 노인은 또 법원으로 갔더니 “이제 갓 자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오후에 노인을 업고 눙안현구치소로 다시 가서 면회를 요구했다. 문지기는 “그녀가 있기는 하지만 면회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윗층으로 가 부소장을 찾아 온 이유를 설명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부소장은 “류소장(류카이, 劉凱)이 출장을 가서 자리에 없으니 류씨가 오기를 기다려”라고 말했다. 그래도 노인이 면회를 강력히 요구하자 부소장은 “이곳에 없고 노개병원에 있다.”고 말했다.

5월 5일 오후 8시, 양수메이의 시어머니와 양수메이의 조카는 노인을 업고 공안국으로 가서 “당신은 우리 며느리가 구치소에 있다고 했는데 아예 구치소에는 없었다.”고 말하며 며느리와의 면회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그들은 끝까지 거절하다 결국 공갈 협박하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곧장 흉악한 경찰 3명이 양융수메이의 조카를 사무실에 끌고 가 4~5명이 한꺼번에 폭행을 가한 뒤 심문을 하면서 기록을 했다. 기록한 자료와 심문한 내용이 일치하지 않자 조카가 이의를 제기하자 흉악한 경찰은 곧장 공갈 협박을 했고, 또 두 노인에게도 다시 오면 모두 체포하겠다고 공갈협박을 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며느리를 만나지 못한 채 핍박에 못 이겨 집으로 돌아갔다.

문장발표: 2011년 05월 08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8/吉林农安县于长丽被迫害致死-杨淑梅命危-2403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