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일가족 셋 박해로 잃은 다칭 여교사, 또 납치돼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성보도) 2011년 4월 24일 오후, 다칭시 스화 제1초등학교(大慶市石化第一小) 고급 교사 쉬수펀(許淑芬,여,48세추정)이 학생들에게 파룬따파의 진상을 알리다 체포됐다. 그녀는 진상을 똑똑히 모르던 학생의 신고로 다칭시 룽펑(龍鳳)공안분국 경찰에 납치된 뒤 불법가택수색까지 당했다. 현재 쉬수펀 교사는 다칭시 룽펑유치장에 불법 감금된 상태다.

1999년 중공(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전면적으로 박해하면서부터 쉬수펀의 일가족은 신앙을 견지하고 수련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중공정권에 의해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일가족 3명(아버지, 남편과 아들)이 박해받아 사망했고, 쉬수펀 본인도 이미 3번이나 불법으로 박해(2번은 노동교양 각각 1년씩, 1번은 1개월 반 동안 감금당했음)당했고, 지금도 여전히 직장에서 박해받고 있다. 그녀는 고급 교사이면서도 어쩔 수없이 수발실 업무를 담당하다 또 다시 4번째 불법 체포, 감금된 것이다.

쉬수펀은 1996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하면서 일가족도 함께 수련함으로써 많은 혜택을 입었다. 그녀는 ‘眞善忍(쩐싼런)’을 기준으로 근면성실하게 근무에 임해 다칭시 중학교, 초등학교에서 모범교사로 선정된 바 있다.

쉬수펀의 일가족 모두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전,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몹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남편 리샤오룽(李小榮)은 신염, 비염 등 만성질환을 앓아 왼쪽 발바닥에서부터 허리까지 늘 시리고 저려 입원을 해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아들 리화이(李華逸)는 어려서부터 허약한 체질에 잔병치레가 많아 늘 약과 주사를 달고 살았다. 경련을 일으켜 응급 처치를 받았을 때도 당시 의사는 병의 원인조차 밝히지 못했다. 쉬수펀은 어렸을 때부터 저혈압과 폐결핵이 앓았는데, 폐의 일부에 석회화(鈣化點)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어른이 된 뒤에는 치질을 심하게 앓아 항문열상 수술을 두 번 받았으며, 또 심장병, 신우신염, 자궁 내막염, 난소 낭종, 경추디스크, 류머티즘, 편두통(반쪽 머리부위, 태양혈, 눈, 치통), 구강궤양, 두드러기 등, 만성질환을 앓아 수차례 병원치료를 받아도 호전되지 않았다.

1996년 초, 그녀의 남편 리샤오룽이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행운아가 됨으로써 불행하던 이들 가족에게도 살아갈 희망이 보였다. 쉬수펀도 아주 빨리 수련의 행렬에 들어서면서 그들 일가족은 늘 연공장에 가서 법공부를 하고 연공을 하여 건강을 회복했다. 자녀도 어렸지만 함께 대법을 듣고, 또 ‘眞善忍 (쩐싼런)’의 요구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들은 가없이 넓은 부처님의 은혜 속에 푹 빠지게 된 그때부터 고통, 모순이 적어지고 행복과 기쁨이 많아졌다. 그들은 그렇게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아름다움을 절실하게 체험하면서 수련을 견지할 신심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은 ‘610’(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한,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데 종사하는 사악한 조직임)을 이용해, 완전히 인성을 말살시킨 채 파룬따파 수련생을 박해하는 운동을 발동했다. 이번 박해로 쉬수펀의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의 생명을 앗아갔고 그녀는 4번 불법 납치, 감금당하는 박해를 받았다.

1, 남편 리샤오룽, 박해로 사망

리샤오룽은 다칭 스화회사 정유공장(煉油廠) 크래킹작업실(裂化車間) 주임이었지만 사악한 중공의 박해로 2001년 12월 1일 다칭 제2병원에서 결국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41세였다.

2000년 3월 8일, 리샤오룽은 다칭 스화회사에서 조직한 세뇌반에 18일간 강제로 차출당했다. 그곳에 동원된 모든 수련생들의 직장에서는 직원 2명씩 동반 파견시켜 세뇌반에서 숙식하게 했다. 숙식비는 총 4백 여 위안이었으며 10명의 수련생이 그곳에 강제로 참가했다. 세뇌반이 끝난 후, 리샤오룽은 행정 강등 처분과 함께 당적을 제명당했다. 그녀는 정상적으로 출근해 근무했지만 매달 3백 50여 위안의 생활비 밖에 주지 않았다.

리샤오룽은 2000년 9월 3일 직공기술학교의 평가를 거치지 않고, 다칭 스화회사에서 개설한 직공 이직 양성반에 파견당했다. 그녀는 근무지를 떠나 3개월 학습(직공이직양성반은 다칭 스화회사에서 구조적 조정을 위해 그들 책임자와 직원이 각 방면에서 민주적으로 평가해 평정된 총 점수의 역순위인 직원을 위해 개설함)을 받았고 월급은 여전히 3백 50위안만 수급했다. 이 반에서 리샤오룽은 대법제자의 풍모를 표현해 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으며, 이직양성하고 있는 직원들을 위해 문을 여닫고 청소를 하는 등, 모두가 인정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학습반은 2000년 12월 1일까지 열렸다.

2000년 12월 1일 저녁 리샤오룽은 파룬따파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했다. 수차례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12월 4일 톈안먼 광장에 도착한 그녀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치다 현지로 이송돼 1백 일간 불법 감금당했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73kg에 달했으나 2001년 3월 21일에 석방될 때 30kg쯤으로 줄어들었고, 수염투성이 얼굴은 어머니마저 알아보지 못했다. 그를 집으로 데려다준 사람이 떠난 뒤에야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 보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허약한 상태로 치질을 앓았고, 또 폐병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다가 입원비가 부족해 퇴원했다(그때 쉬수펀은 청원 간 이유로 불법 노동교양을 선고받았음). 당시 직장과 파출소에서도 늘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고, 전화를 걸어 심문하는 동시에 자주 회보해야 한다며 그에게 연공을 시키지 말라고 했다. 그는 평소 과묵하고 굳센 사나이였지만 육체적, 정신적 압력을 견디다 못해 입원했고, 결국 2001년 12월 14일 다칭 제2병원에서 사망했다.

2, 부모의 박해 공포 속에 아들 리화이 사망

1999년 7월 20일, 중공이 전면적인 박해를 감행하면서 쉬수펀의 가족도 심하게 박해 당했다. 그들의 청원 행을 저지하기 위해, 다칭 스회 제1초등학교 담당책임자는 쉬수펀을 부교장을 대동해 학교에 이틀간 가두어 두었다. 남편 리샤오룽의 작업실에서도 그의 귀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초등5학년이던 아들 리화이는 혼자 집에 버려진 채 갑자기 닥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극도의 공포에 시달렸다.

결국 아들 리화이는 70여 세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살폈지만 그는 경찰차만 보면 두려워했다. 2001년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감금된 그해 여름, 리화이는 아이스크림이라곤 한 개도 먹어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런 손자가 마음 아파 냉수로 얼음을 만들어 먹였다. 리화이는 어머니가 구속되자 온종일 말을 하지 않고 기쁨이라곤 전혀 모른 채 친구들과도 어울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가 수발실에 복직한 뒤에야 그들의 생활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늘 감시당했고, 명절과 휴일에도 그녀의 행방을 문의하는 사람이 있었다. 리화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다칭60중학교에서 설을 보낼 때 설 앞 뒷날에 학교 당번을 시켰는데, 그 목적은 그의 어머니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리화이는 여위었고 키는 180cm였다. 다른 반 학생 몇몇 명에게 폭행을 당해 안경까지 깨진적도 있지만 그는 되받아치지 않았다. 그렇게 폭행당한 이후 리화이의 몸은 더욱 쇠약해졌다.

2003년 말, 쉬수펀이 하얼빈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바닥에 피덩이가 한 덩이씩 있는 것을 보았다. 아들에게 무엇인지 물었더니 “제가 토한 피입니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리화이를 데리고 검진한 결과 폐에 시커먼 물체가 보인다고 했다.

2006년 초, 선양(沈陽) 쑤자툰(蘇家屯)에서 파룬궁수련생의 기관을 생체로 적출한 사건이 폭로됐다. 소식을 들은 리화이는 “어머니 저는 두려워요!”라고 하면서 음식을 삼키지 못하게 되면서 점점 쇠약해졌다. 먼저 신체 반쪽이 마비되며 발에 통증을 느꼈고, 그 후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검진결과 폐결핵이란 진단을 받고 입원치료를 받았다.

평소 리화이는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쳐다보며 “아버지가 있으니 정말 좋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늘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그는 결국 영양결핍, 백혈병, 폐결핵을 진단받고는 6월 9일 다칭2병원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그는 18세였다.

3, 아버지 쉬뎬훙 사망

쉬수펀의 아버지 쉬뎬훙(許殿鴻)은 1998년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70여세인 쉬수펀의 아버지는 원래 글을 알지 못했지만 계속 수련해 나가면서 스스로『전법륜(轉法輪)』을 통독할 수 있게 되었고, 류머티즘을 앓았던 다리도 완쾌되었다.

쉬수펀의 아버지는 1999년 7,20박해 이후 성 정부에 파룬궁을 청원하러 갔다가 버스에 끌려가 야외에서 풀려난 적이 있으며, 또 신분증을 압수당하는 등 늘 공포 속에 생활하면서 딸을 그리워하다 2001년 6월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4, 쉬수펀이 심각하게 박해당한 경험

1999년 7,20 이전 쉬수펀은 다칭시 룽펑구(龍鳳區) 제신(街心)공원에서 단체 연공하는 게 현지 파출소에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박해가 막 시작된 뒤 그녀의 직장과 가도 그리고 파출소에서는 그녀에게 연공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쓰도록 강요해 그녀는 고통스러워 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무엇 때문에 연마하지 못하게 하는가?

그녀는 2000년 6월 20일, 다칭시 룽펑구 제신공원에서 단체 연공을 하다 다칭시 룽펑구 공안분국에 불법 구류돼 다칭구치소에 46일간 감금돼 있었다. 8월 4일 출감했다가 룽펑 공안분국 정보과 마윈펑(馬雲峰)에게 1만위안의 담보금(2002년에 돌려왔음)을 압류 당했다. 그 후 그녀가 있는 주관 직장인 다칭 스화 총공장 610, 다칭 스화 총공장 교육처에서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갖 방법을 다해 그녀를 곤경에 빠뜨렸다. 교육처의 겅자오펑(耿兆鳳)서기는 조간과(組幹科)의 장궈펀(張國芬)에게, 직장에서 그녀를 1년 관찰하는 처분을 내려 책임지라고 했다. 그리고 퇴직 연금으로 매달 3백 50위안을 지급했는데, 일부는 잡비로 사용해 2백 여 위안밖에 남지 않았지만 학교에서는 그녀에게 보직을 배치하지 않았다.

쉬수펀은 파룬따파를 수련하면서 심신의 건강을 회복했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 없음을 믿었다. 그녀는 2000년 12월 19일, 헌법에 규정된 바와 같이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갔다가 톈안먼 광장에서 체포되었다. 21일에 직장 서기 쿵링차오(孔令超), 부교장 왕제(王捷), 다칭 스화 교육센터 치안과 과장 치중(齊中)에게 파출소로 끌려가 불법 노동교양처분 1년을 받았다. 이어서 그녀는 2000년 12월 23일, 헤이룽장 하얼빈 마약 중독자 재활원으로 보내진 뒤 2002년 2월 22일 풀려났다(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또 2개월을 넘기고 감금당했음).

2002년 2월 22일, 석방된 뒤 복직한 그녀는 수련을 견지했다는 이유로, 다칭 스화 총공장 610, 다칭 스화 총공장 교육처 및 다칭 스화 총공장 제1초등학교에서는 계속 그녀를 박해했다. 그녀의 수업권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수발실을 지키게 했으며, 매달 3백 50위안의 생활비밖에 주지 않았다. 쉬수펀은 여러 차례 관련 부서를 찾아가 얻어 내려고 했다. 그 후 학교 측은 그들의 자금에서 그녀에게 매달 6백 위안(6개월만 지급했음)을 지급했다.

2002년 12월 21일 쉬수펀은 하얼빈 마약 중독자 재활원의 관리과 과장 양위산(楊雨善)에게 선을 권하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여성대대 교도원 닝리신(寧立新)이 그녀의 편지를 상부에 바치는 바람에 다칭시 룽펑 공안분국 국가보안과 과장 바이슈리(白秀麗)는 룽안(龍安)파출소의 구역 경찰 장린(張林), 경장 일행이 쉬수펀의 집으로 찾아 가 사전수색 영장 없이 불법으로 가택수색을 단행했다. 쉬수펀의 집 침대에 있던 돈(주택 보조금, 월급 등)을 적어도 만위안 이상 약탈해 감과 동시에 그녀를 다칭 구치소에 감금했다. 쉬수펀은 불법 노동교양처분 1년을 받아 하얼빈 마약 중독자 재활원 여성대대에 감금당했다.

쉬수펀은 신앙을 견지하면서 불법 감금된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박해에 항의했다. 1년 후 석방된 뒤 다시 수발실에 복직했다. 그녀는 3년 4개월간 퇴직수당을 받았고, 직장에서는 월급을 돌려받았지만 그녀의 수업권을 결국 되돌려 받지 못했다.

쉬수펀이 하얼빈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불법 노동교양을 당하는 동안 대장 장위수(張玉書)는 남자 교도관 스옌장(史彦江)을 꼬드겨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쪼그려 앉히기 고문을 비롯해 연속 6박7일 간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형사범을 동원해 그녀에게 폭행을 가해 발목과 발바닥까지 시퍼렇게 멍들었다. 5박6일이 아닌 6박7일은 간단한 게 아니다. 당시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쉬수펀은 노동교양기간동안 매일 세수하고 손 씻기가 허락되지 않았다. 밥 두 끼만 먹인 채 굶겼고, 화장실에는 세 번밖에 가지 못하게 해, 그녀의 발다리는 부어올랐다.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는 이렇듯 가혹하게 쉬수펀을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녀의 노동을 강도 높게 착취해 마약 중독자 재활원을 위해 벌게 했다. 하얼빈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는 여성 파룬궁수련생 천 명 이상 감금한 적이 있으며 그녀들도 마찬가지로 비안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쉬수펀은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석방된 후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 살아서 나올 수 있고, 미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대단한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쉬수펀이 처음으로 노동교양 처분을 받고 있는 동안, 그녀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을 간절히 그리워하다 2001년 6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오빠와 올케는 마약 중독자 재활원으로 찾아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 있도록 청했지만 재활원 측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2001년 12월 14일, 쉬수펀의 남편 리샤오룽도 파룬따파를 수련하다 박해받아 사망했다. 쉬수펀을 시체 안치실에 수감시킨 채 남편의 시신을 보여 주며 정신적인 고문을 가했다. “이 사람이 당신 남편이 맞는가?”라고 물으며 극도의 고통에 처한 그녀에게 파룬따파를 수련하지 말라고 위협했다. 당시 성 노교국 국장 쩌우촨바오(鄒全寳)는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다 이 비참한 장면을 녹화하라고 명령했다. 쉬수펀의 아버지와 남편이 죽자 쉬수펀의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마약 중독자 재활원에서는 다시 그녀의 감금기간을 2개월 늘리는 비행을 저질렀다.

2011년 4월 24일, 이미 세 가족을 잃은 쉬수펀은 지금도 불법 납치되어 감금된 상태다.

쉬수펀의 일가족은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었고 신체 또한 건강해져 가정이 화목해 진 것은 물론 직장근무 또한 성실히 임했다. 그러나 파룬따파가 박해 당하면서 연이어 가장 사랑하는 가족 3명을 잃었는데 도대체 누가 흉수인가? 누가 무정한가? 선한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선과 악을 분명히 가려,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박해를 제지하길 바란다. 또 예전에 그녀를 무고(誣告)하고 납치와 박해를 감행한 자들도 양심을 되찾아, 하루빨리 그녀의 자유가 회복되길 희망한다.

문장발표: 2011년 05월 06일
문장분류: 박해진상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1/5/6/三位亲人被迫害离世-大庆女教师又被绑架-240184.html